목차
1. 고대 : 죠오몽[繩文]~헤이안시대 : 기원전 1만년~1192년 5
죠오몽[繩文]시대 ・ 야요이[弥生]시대・
아스카시대 · 나라시대 · 헤이안시대
2. 중대 : 가마쿠라~전국시대 :1192~1576년 21
가마쿠라시대 · 무로마치시대 · 전국시대
3. 근세 : 1576~1868 28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 에도시대
4. 근대 ; 1868~ 37
메이지시대 · 다이쇼시대
죠오몽[繩文]시대 ・ 야요이[弥生]시대・
아스카시대 · 나라시대 · 헤이안시대
2. 중대 : 가마쿠라~전국시대 :1192~1576년 21
가마쿠라시대 · 무로마치시대 · 전국시대
3. 근세 : 1576~1868 28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 에도시대
4. 근대 ; 1868~ 37
메이지시대 · 다이쇼시대
본문내용
황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을 주장하였다. 막부의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반대파를 처벌하여 막부독재를 강화하였으나, 반대파에 살해되고, 막부는 천황 조정과 결합하여 막부정치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1863년 이후 영국 등의 함대와 전투를 통해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 사츠마[薩摩]번과 쵸슈번[長州藩]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실권을 잡고 영국과 제휴하여 근대적인 군비를 갖추어, 막부를 타도한 후 천황중심의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막부는 프랑스의 원조로 군사개혁을 추진하고 쵸슈 정토를 꾀하였으나, 쵸슈번과 동맹을 맺은 사츠마번은 막부의 출병명령에 불응하였고, 물가 상승으로 전국에서 약탈행위와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막부는 쵸슈 정토에 실패하여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867년 10월 막부의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천황 밑에서 계속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하였으나, 12월 토막파 번과 천황조정은 막부의 폐지와 신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를 공표하였다. 신정부의 영지반환 요구에 반발한 막부측은 1868년 1월 교토를 공격하였으나, 사츠마번과 쵸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군은 1869년까지 구 막부군을 모두 항복시켰다. 이 싸움을 무진(戊辰)전쟁이라 한다.
무진전쟁이 계속되던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親政)과 여론의 존중 개국화친 등, 신정부의 기본 정치이념을 선언하였다. 신정부는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고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하였다. 1869년에는 천황조정이 교토[京都]에서 도쿄로 천도하였다. 이후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한다.
개혁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1869년 신정부는 토지와 인민에 대한 다이묘(大名)의 지배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하고, 1871년에 신정부는 다시 번을 폐지하고 부(府) 현(縣)을 두어 부지사와 현령을 파견하였다. 막부말기의 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했던 번들은 이 개혁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봉건제도는 붕괴되고 중앙집권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신정부의 구성원은 대부분 사츠마 쵸슈 토사[土佐] 비젠[肥前]의 4번 출신의 실력자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번벌(藩閥)정부라 부른다.
정부는 신분제도를 고쳐, 황족 화족(다이묘와 천황조정의 귀족) 사족(무사) 평민(농공상민)등으로 하여, 결혼과 직업선택의 자유 평민의 성(姓) 소유 등, 사민평등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천민도 해방하여 평민에 편입시켰다.
신정부는 1873년 1월, 만 20세의 남자를 징병하는 징병령을 공포하여, 구미열강을 모방한 국민군대를 창설하였다. 이로서 국력의 군사적 기초가 만들어졌다. 사민평등과 징병령에 의해 특권을 상실한 사족들의 불만은 반란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반란인 1877년의 세이난(西南)전쟁도 국민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신정부는 재원의 안정을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지주가 토지세를 국가에 납부하게 하였다.
한편 신정부는 외국기술자를 초빙하고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산업의 육성을 꾀하였다. 조선소 병기공장 광산 생사공장 면사 · 방적 공장 등, 많은 관영공장을 만들어, 정부의 공부성 내무성을 통해 산업을 보호 육성하였다.
또한 교통 통신의 발달을 위해 1871년에 서양식 우편제도를 발족시키고 1872년에는 철도를 부설하였고, 일본 근해의 해운권의 확립과 군사수송을 위해 해운회사를 보호하였다. 또한 원전을 단위로 하는 새 경화를 만들고 국립은행을 설립하였으며, 1882년에는 일본은행을 만들어 금융과 지폐발행을 맡긴다.
신정부는 신도(神道)의 국교화를 추진하면서 크리스트교 금지를 해제한다. 사상계에서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천부인권사상 등의 서구근대사상이 유행하였고, 1870년 일일신문인 橫濱每日新聞이, 1873년에 잡지(明六雜誌)가 등장하여, 봉건사상의 배제와 근대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71년 이후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은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제도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실패한다. 1871년에는 청과도 조약을 맺었으나, 류큐왕국의 귀속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대립하게 된다. 메이지정부는 류큐왕국을 류큐번(藩)으로 하고, 류큐어민 피살 사건을 핑계로 1874년 대만에 출병하여 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낸다.
한편 메이지 초기 개국요구를 거절한 조선에 대한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였으나, 국내개혁 선행론에 패배하고 정한론자는 정부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1875년 메이지정부는 무력시위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다음해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어 개국시켰다. 또한 러시아와 국경에 관한 조약을 맺어 일본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도 1912년 메이지천황이 죽으면서 끝난다.
다이쇼[大正] 시대
1914년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동맹군으로 출병한 일본은 중국에서 독일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고 1920년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1차 대전으로 일본 경제는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아시아 시장을 상대로 한 공업용품 수출로 생긴 막대한 이익을 챙겨 대재벌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쌀과 생필품 가격의 폭등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했다. 이에 1819년 토야마 현에서 쌀가게를 습격하는 등 쌀 소동이 벌어졌으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문화의 특색
서양문화의 섭취 : 에도시대의 문화 + 서양문화
- 구미의 문교제도생활양식풍속 등의 모방
국민문화형성 : 정부의 지도보호를 통해 국민 스스로 문화형성
민간에 보급 : 교육교통통신출판의 발달로 문화가 일반국민에 보급
과학적 연구정신의 고양 : 학문예술이 정치도덕으로부터 독립
모방적 성격
- 건축과 조각
<영국인이 설계한 니콜라이堂 : 1891년>
<1896년에 완성한 일본은행>
<로엔[老猿] : 사생적(寫生的) 기법과 전통적 기법을 융합한 高村의 걸작>
<온나[女] : 봉건적 복종으로부터 몸을 편 일본여인의 모습을 잘 표현한 걸작>
1863년 이후 영국 등의 함대와 전투를 통해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 사츠마[薩摩]번과 쵸슈번[長州藩]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실권을 잡고 영국과 제휴하여 근대적인 군비를 갖추어, 막부를 타도한 후 천황중심의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막부는 프랑스의 원조로 군사개혁을 추진하고 쵸슈 정토를 꾀하였으나, 쵸슈번과 동맹을 맺은 사츠마번은 막부의 출병명령에 불응하였고, 물가 상승으로 전국에서 약탈행위와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막부는 쵸슈 정토에 실패하여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867년 10월 막부의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천황 밑에서 계속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하였으나, 12월 토막파 번과 천황조정은 막부의 폐지와 신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를 공표하였다. 신정부의 영지반환 요구에 반발한 막부측은 1868년 1월 교토를 공격하였으나, 사츠마번과 쵸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군은 1869년까지 구 막부군을 모두 항복시켰다. 이 싸움을 무진(戊辰)전쟁이라 한다.
무진전쟁이 계속되던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親政)과 여론의 존중 개국화친 등, 신정부의 기본 정치이념을 선언하였다. 신정부는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고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하였다. 1869년에는 천황조정이 교토[京都]에서 도쿄로 천도하였다. 이후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한다.
개혁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1869년 신정부는 토지와 인민에 대한 다이묘(大名)의 지배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하고, 1871년에 신정부는 다시 번을 폐지하고 부(府) 현(縣)을 두어 부지사와 현령을 파견하였다. 막부말기의 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했던 번들은 이 개혁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봉건제도는 붕괴되고 중앙집권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신정부의 구성원은 대부분 사츠마 쵸슈 토사[土佐] 비젠[肥前]의 4번 출신의 실력자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번벌(藩閥)정부라 부른다.
정부는 신분제도를 고쳐, 황족 화족(다이묘와 천황조정의 귀족) 사족(무사) 평민(농공상민)등으로 하여, 결혼과 직업선택의 자유 평민의 성(姓) 소유 등, 사민평등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천민도 해방하여 평민에 편입시켰다.
신정부는 1873년 1월, 만 20세의 남자를 징병하는 징병령을 공포하여, 구미열강을 모방한 국민군대를 창설하였다. 이로서 국력의 군사적 기초가 만들어졌다. 사민평등과 징병령에 의해 특권을 상실한 사족들의 불만은 반란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반란인 1877년의 세이난(西南)전쟁도 국민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신정부는 재원의 안정을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지주가 토지세를 국가에 납부하게 하였다.
한편 신정부는 외국기술자를 초빙하고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산업의 육성을 꾀하였다. 조선소 병기공장 광산 생사공장 면사 · 방적 공장 등, 많은 관영공장을 만들어, 정부의 공부성 내무성을 통해 산업을 보호 육성하였다.
또한 교통 통신의 발달을 위해 1871년에 서양식 우편제도를 발족시키고 1872년에는 철도를 부설하였고, 일본 근해의 해운권의 확립과 군사수송을 위해 해운회사를 보호하였다. 또한 원전을 단위로 하는 새 경화를 만들고 국립은행을 설립하였으며, 1882년에는 일본은행을 만들어 금융과 지폐발행을 맡긴다.
신정부는 신도(神道)의 국교화를 추진하면서 크리스트교 금지를 해제한다. 사상계에서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천부인권사상 등의 서구근대사상이 유행하였고, 1870년 일일신문인 橫濱每日新聞이, 1873년에 잡지(明六雜誌)가 등장하여, 봉건사상의 배제와 근대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71년 이후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은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제도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실패한다. 1871년에는 청과도 조약을 맺었으나, 류큐왕국의 귀속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대립하게 된다. 메이지정부는 류큐왕국을 류큐번(藩)으로 하고, 류큐어민 피살 사건을 핑계로 1874년 대만에 출병하여 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낸다.
한편 메이지 초기 개국요구를 거절한 조선에 대한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였으나, 국내개혁 선행론에 패배하고 정한론자는 정부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1875년 메이지정부는 무력시위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다음해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어 개국시켰다. 또한 러시아와 국경에 관한 조약을 맺어 일본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도 1912년 메이지천황이 죽으면서 끝난다.
다이쇼[大正] 시대
1914년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동맹군으로 출병한 일본은 중국에서 독일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고 1920년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1차 대전으로 일본 경제는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아시아 시장을 상대로 한 공업용품 수출로 생긴 막대한 이익을 챙겨 대재벌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쌀과 생필품 가격의 폭등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했다. 이에 1819년 토야마 현에서 쌀가게를 습격하는 등 쌀 소동이 벌어졌으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문화의 특색
서양문화의 섭취 : 에도시대의 문화 + 서양문화
- 구미의 문교제도생활양식풍속 등의 모방
국민문화형성 : 정부의 지도보호를 통해 국민 스스로 문화형성
민간에 보급 : 교육교통통신출판의 발달로 문화가 일반국민에 보급
과학적 연구정신의 고양 : 학문예술이 정치도덕으로부터 독립
모방적 성격
- 건축과 조각
<영국인이 설계한 니콜라이堂 : 1891년>
<1896년에 완성한 일본은행>
<로엔[老猿] : 사생적(寫生的) 기법과 전통적 기법을 융합한 高村의 걸작>
<온나[女] : 봉건적 복종으로부터 몸을 편 일본여인의 모습을 잘 표현한 걸작>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