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지역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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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양지역 답사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청양개관
Ⅱ. 장곡사(長谷寺)
Ⅲ. 무량사(無量寺)
Ⅳ. 성주사지(聖住寺址)
ⅴ. 모덕사(慕德祠)와 최익현

본문내용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壤論)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그는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펴서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여 개국을 적극 반대하였다.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은 서양의 침략성을 간파한 역사적 통찰력이 있었고 이를 통해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지도이념인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은 기정진의 민족자존적인 위정척사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한 사람은 기우만(奇宇萬)과 송병선(宋秉璿)이다. 기우만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제의 만행과 위정자들의 친일개화를 응징, 배격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또,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결사항쟁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송병선은 <벽사론>을 지어 양학(洋學)의 배격과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조약의 폐기와 조약체결에 참여한 역신들의 참형을 극력으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순국하였다.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양대 지주의 한 사람은 이항로이다. 그는 성리학을 주리철학으로 대성시킨 한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의 심전주리설적 주리철학(心專主理說的主理哲學)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이기는 하나, 근저에는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를 민족적으로 승화시킨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하는 애국우국정신이 있었다. 그는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주전척화론(主戰斥和論)을 전개하고 천주교를 이단사설로 규정하였다. 또, 그는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여 서양제품의 사용금지론과 불매불용론(不買不用論)을 제시하기도하였다. 그의 애국우국정신, 위민정치관, 문화적 자존의식, 경제적 배타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에서 위정척사사상의 전개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항로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실천화, 행동화하여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주류가 되었는데, 김평묵(金平默) · 유중교(柳重敎) · 최익현(崔益鉉) 등이 대표적이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청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으로 말미암아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이 발생하였다. 이 책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대비책으로 조선국은 친청(親淸)·결일(結日)·연미(聯美)의 외교정책을 수립할 것과 서양의 제도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책을 쓸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림들은 이 책을 개국과 양화를 종용한 사설로 규정하고, 책을 국내에 반입, 보급한 김홍집을 처형하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남유생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萬人疏)가 그것이다.
이 상소에 대해 김평묵은 성현의 가르침을 지키고 왜양(倭洋)의 금수와 같은 풍습 등을 배격한 만고에 없는 상소라고 격려, 고무하는 글을 소청에 보냈다.
또, 그는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의 척왜소(斥倭疏)를 대필하여 일본과의 개화를 반대하면서 이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국왕을 비난하였다. 그 결과 상소의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 하여 홍재학은 참형되고 대필자 김평묵은 유배되었다. 그의 사상이 인수대별적 화이의식에 근거하고 있으나 단순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민족자존과 민족문화의 자존을 위한 자각된 자주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어양론(禦洋論)은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실천이념의 중요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유중교도 신사척사론이 비등했을 때 이에 동조하여 정통사상과 예교질서를 수호할 것과 화이적 춘추대의로 척양척왜할 것을 역설하여, 스승 이항로의 애국우국적인 위정척사사상을 실천하였다. 열렬한 항일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이 그의 제자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김평묵과 더불어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2대 실천자의 한 사람인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전자는 주로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관인지배체제에 나타난 정치적·경제적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한 왕도정치의 이론으로 작용하였다. 후자는 주로 대외적 위기상황에서 외침을 물리치기 위한 왜양배척의 실천 명분론으로 전개되었다. 즉, 전자의 경우는 대원군 집정에 대한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한 상소로 표현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밀어닥친 왜세에 대한 척왜척화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상소들로 표현되었다.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바로 후자인 척왜척화적인 상소들에 의하여 구현되었다.
그의 사상은 이미 강화도조약 때 올린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에 나타나 있으나, 단발령을 계기로 정통문화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자수사상(自守思想)과 민족주체의식이 더욱 강해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의 사상은 항일의병 무력투쟁으로 행동화되었다. 이 조약을 민족의 자존권을 박탈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약의 무효를 만천하에 공포할 것을 강력히 주창한 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구국제민의 실천철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심화는 극변하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관념적인 상소운동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 위정척사를 행동화하면서 실천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역사적 상황변동에 따라 위정의 가치내용과 척사의 배척대상의 새로운 수정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70세의 고령으로도 항일의병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는,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 및 유소(遺疏) 등의 글을 통하며 애국충정을 피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한말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유교사상, 즉 성리학의 화이적 춘추대의와 존왕양이의 명분론을 사상적 근간으로 하고, 이항로의 애국우국정신과 기정진의 내수외양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상은 그들의 제자 김평묵의 척화적 어양론과 최익현의 실천적 척화론에 의하여 항일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정착함으로써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한국적 위정척사사상의 특질이 있다. 위정척사사상을 한말에 있어서의 배타적·보수적인 사상, 근대화를 저해한 사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말의 위정척사사상은 단순히 배타사상·보수사상으로만 볼 수 없으며 보다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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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5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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