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영덕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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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울진 영덕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울진봉평신라비
2. 신돌석 장군비
3. 충효당(忠孝堂) 재령이씨 영해파의 종택
4. 화수루(花樹樓)와 까치구멍집
5. 괴시(槐市)마을

본문내용

집을 말한다.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낸 둥근 구멍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구멍이 있는 집을 까치구멍집이라 부른다. 까치구멍집이라는 말은 주로 경상북도지방에서 쓰는 말인데,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이런 유형의 집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형태의 집은 태백산맥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특히 안동·영양·청송·영덕·울진·봉화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일종의 겹집 모양으로 ㅁ자형의 집이 축약된 듯한 폐쇄형 가옥이다. 즉, 대문만 닫으면 외적의 침입이나 맹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혀도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이다.
<박분섭 까치구멍집 / 안동민속경관지>
까치구멍집의 평면은 겹집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입면에서도 가구(架構)나 천장의 처리, 까치구멍의 설치 등 독특한 성격을 구현하고 있다. 평면은 겹집의 특색에 따라 田자형으로 배치하면서도 변화를 주었다. 즉, 두 줄의 방 다음에 같은 넓이 정도의 마루를 깔고 다시 방 두 칸을 잇대는 구성을 하여 거실과 같은 공간을 하나 더 꾸몄다. 또, 겹집에서는 전자형의 방이 있고, 이어 정주가 있으며 부엌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까치구멍집에서는 정방형의 넓이를 아홉 구역으로 나눈 井자형처럼 구획되어 각각의 기능을 지니도록 된 것이 특징이다.
5. 괴시(槐市)마을
5-1. 개관
영덕의 북쪽인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북으로 1㎞를 가면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탄생지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고색창연한 영양 남씨 집성촌인 괴시전통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목은 선생(1328~1396년)이 문장으로서 원(元)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오는 길에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이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귀국 후 괴시(槐市)라고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에 함창 김씨(咸昌金氏, 목은 선생의 외가이며, 선생의 외조모는 영양 남씨)가 처음 입주(入住)한 이래, 조선 명종(明宗,1545-1567)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金氏), 영해 신씨(寧海申氏), 신안 주씨(新安 朱氏)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仁祖) 8년(1630년)부터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처음 정착하였다. 그 후 타성(他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문벌(門閥)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은 동해안의 3대 평야인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地形)에 맞추어 대부분의 고택들이 서남향(西南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마을을 가로지르는 기와 토담 골목길을 중심으로 2~3백여년 된 \'口\'字形 구조의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어, 영남(嶺南) 반촌(班村)에서도 보기 드문 공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괴시전통마을은 조선후기 영남지역 사대부들의 주택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傳承)되고 있다. 또한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 : 경북 민속자료 제75호)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와 전통고가 30여 호가 남아 있어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전통 민속마을이다. 해마다 학자들과 학생,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며, 격년제로 마을에서는 \"목은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괴시파종택 >
5-2.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 : 경북 민속자료 제75호)
영양남씨 괴시파 종가로 17세기 말에 남붕익(南鵬翼)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1916년경에 전체적인 부재(部材)와 기와를 교체한 바가 있고, 1984년에도 일부 낡은 부재를 교체하는 등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사당은 약 80년 전에 지은 것이다.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으로 ‘ㅁ’자형의 안채 오른쪽 앞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려 사랑채가 돌출해 있는데 흔하지 않는 모습이다. 사랑채는 사랑마루, 사랑윗방, 사랑방,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윗방은 재청방(齋廳房)으로 부른다. 안채는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 및 도장이 있으며, 우측에 상방과 작은 부엌이 있는데 상방은 원래 마루 반 칸이 있던 것을 1984년 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또 도장방과 상방 상부에는 각각 유산고를 설치하여 수장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내부에 약간의 개조가 있으나 조선 후기의 주택구조가 잘 보전되어있는 건물이다.
종택을 지은 남붕익은 1641년 8월 22일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기상이 있고 온화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하는 사람으로 모부인을 섬길 때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음식을 제공하며 언제라도 그 뜻을 적합하게 하려고 하였다. 형제간에 지낼 때 굶거나 실컷 먹거나 걱정이나 즐거움이나 언제라도 함께 나누고 친족 간에는 언제라도 정성스럽게 하여 사람들이 감복하는 것이 많았다.
그는 숭정 1672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1674년에 참봉공의 상을 당하였다. 1679년 4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5월에는 서학교수(西學敎授)가 되었고 6월에는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禮曹住郞 兼 春秋館記事館)이 되었다. 1680년에 영산현감(靈山縣監)이 되어 자리에 임하여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여 조금도 누가 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오래된 폐단을 고쳐서 한 지역이 모두 편안하게 되도록 하였다.
영양남씨 괴시문중은 두원공의 장남 붕익(鵬翼, 1641~1687)공이 현종 13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영산 현령을 지낸 이후 마을은 문한(文翰)으로 이어져 영남 유림에서도 뛰어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문집, 저술, 일기, 유고, 서화 등과 판목(版木)들이 전하고 있으며, 근대에는 기미년(1919) 영해 318 독립만세의거를 주동한 남계병(南啓炳 : 신돌석 의병 후원, 협창학교 설립, 항일사상 고취, 만주망명 독립군모집, 건국훈장 애족장), 남진두(南鎭斗), 남효직(南孝直), 남응하(南應夏) 등이 구국과 항일운동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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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8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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