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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조선조의 교육과 과거제도
1. 조선조의 교육제도
2. 조선의 교육사상
3. 조선의 과거제도
Ⅱ. 성균관(成均館)
1. 성균관의 역사
2. 성균관의 건축물
Ⅲ. 향교(鄕校)
1. 향교의 연혁
2. 향교의 입지와 배치
3. 향교의 재정
4. 향교의 교관과 교생
5. 향교의 교육과정
6. 근대교육제도와 향교
Ⅳ. 서원(書院) 개관
1. 서원의 성립과 전개
2. 서원의 교육활동
3. 서원의 구조
Ⅴ. 한국의 대표적 서원(書院)
1. 소수서원(紹修書院)
2. 도동서원(道東書院)
3. 옥산서원(玉山書院)
1. 조선조의 교육제도
2. 조선의 교육사상
3. 조선의 과거제도
Ⅱ. 성균관(成均館)
1. 성균관의 역사
2. 성균관의 건축물
Ⅲ. 향교(鄕校)
1. 향교의 연혁
2. 향교의 입지와 배치
3. 향교의 재정
4. 향교의 교관과 교생
5. 향교의 교육과정
6. 근대교육제도와 향교
Ⅳ. 서원(書院) 개관
1. 서원의 성립과 전개
2. 서원의 교육활동
3. 서원의 구조
Ⅴ. 한국의 대표적 서원(書院)
1. 소수서원(紹修書院)
2. 도동서원(道東書院)
3. 옥산서원(玉山書院)
본문내용
기록이 있어서 18세기에는 이미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사 부분은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각 건물의 명칭도 명확치 않다. 서원건물의 수리기록에 의하면 가장 남쪽의 5칸 창고는 대고(大庫), 마당 가운데 3칸의 건물은 포사(舍), ㄱ자형 긴 건물은 고청(庫廳), 그리고 동쪽의 당당한 3칸의 건물은 서원청(書院廳)으로 추정된다.
대고는 명칭 그대로 큰 창고이며 판벽으로 이루어졌다. 옥산서원의 재산규모를 가늠케 하는 건물이다. 포사는 벽체를 반쯤 막은 개방형 건물로 서원의 큰 행사가 있을 때 대형 부엌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고청은 서원의 관리인과 노비들이 기거하고 잡동사니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원청의 이름은 명확치 않으나 건물의 격식이나 형태로 보아 서원의 유사(총무)가 기거하면서 사무실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3-5. 옥산서원의 의의
김봉렬의 「은둔을 위한 미로-독락당과 옥산서원」 중에서
- 자연과 절연된 인위적 장소
옥산서원은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너무나 좋은 환경에 자리 잡은 탓일까. 옥산서원 안에서는 바깥의 경승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청각적으로도 단절될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닫혀 있다.
옥산서원의 역락문을 들어서는 순간 자연에서 느낀 감동의 여운은 급격히 사라지고 완벽하게 인위적인 공간으로 전환되고 만다. 내부의 중심 장소인 강당 마당에서는 사방을 꽉 둘러싼 건물들 사이의 팽팽함만이 감돌뿐이며, 어느 한 구석 긴장감을 이완시켜 주는 곳은 없다.……
강당마당은 비슷한 길이의 구인당과 무변루 사이의 양진재와 해립재가 끼워진 형식으로 구성된 정방형 공간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모퉁이 부분이 서로 겹쳐져서 마당의 모퉁이는 닫혀져 버렸고, 다음 공간으로의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퉁이를 닫기 위해 무변루는 7칸, 동서 양재는 5칸으로 길이를 늘렸다.
일반적으로 누각들은 벽면을 개방하여 외부의 경관을 내부로 끌어 들이는 경관적 프레임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옥산서원의 무변루는 바깥벽을 모두 막아서 외부로의 확장을 차단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마당은 구심적이고 내부지향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무변루는 5칸의 몸체에다 양끝 한 칸씩의 누마루를 부가한 형식이며, 가운데 5칸은 마당 쪽으로 개방하고 양끝 누마루는 외부로 향해 개방했다. 한 동의 건물에서 서로 다른 두 성격의 공간이 결합된 형식이다. 바깥에서는 7칸, 안에서는 5칸으로 인식되는 묘한 건물이며, 옥산서원의 기본적인 건축개념을 읽을 수 있는 건물이다.
단절적인 공간구성의 개념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역락문을 들어서면서 나타나는 무변루의 폐쇄성, 강당부와 사당부의 단절, 비각과 장경각의 독립적인 영역성, 심지어는 관리사 부분까지도 영역의 단절성은 계속된다.
- 규범성과 위계
옥산서원이 세워진 16세기는 서원건축의 역사로 보면 비교적 초기에 해당한다. 초기적 서원들은 구성축에 따라 대칭적으로 구성되기 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고 유기적으로 구성됨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옥산서원은 철저하게 중심구성축을 따라 배열되고 대칭적이다. 흔히 나타나는 건물 사이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건물들이 직각과 평행으로 만나고 있다. 아마도 이단을 철저하게 억압한 선구자 이언적의 정통주의·원리주의를 따른 것일까?
옥산서원의 터닦기는 크게 두 단으로 이루어진다. 아랫단은 강당영역과 관리사 영역이 남북으로 놓이고, 윗단에는 사당영역이 중심을 이루면서 좌우로 장경각과 비각을 배열했다. 관리사 뒤의 윗단에는 나중에 신축된 문집판각이 위치한다. 아랫단이 생활영역이라면, 윗단은 상징과 보물의 영역이다.
관리사 영역의 구성 역시 예사롭지 않다. 우선 관리사의 규모가 매우 크다. ㄱ자로 구성된 고청은 총 15칸이나 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당 가운데 놓여진 포사이다. 반쯤 개방된 벽체를 가진 이 건물은 행사시 음식 마련과 야외 식당으로 쓰이던 곳이다. 중심적 위치와는 상반되게 부재들은 엉성하다. 여기에 포사가 없었더라면 장방형의 넓은 마당이었을 텐데 포사를 배치함으로써 마당은 정방형으로 바뀌고, 서원청의 전속 마당이 된다. 동시에 뒤쪽에 있는 노비들 숙소를 가리는 이중적 효과를 거둔다.
- 옥산파의 건축어휘
옥산파의 건축어휘는 완결적이고 독립적인 부분공간을 형성하며 그들은 서로 비연속적이다. 완벽한 정방형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옥산서원의 강당마당은 건물에 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주인이다. 또 주위의 다른 공간들과는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자기 완결적 외부공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면적 요소인 담장이 발달하게 되고, 건물의 벽을 평면으로 활용하게 된다. 옥산서원 구인당의 정면을 보자. 마당쪽을 향한 정면임에도 불구하고 일절 개구부를 두지 않았다. 양끝 방의 벽은 창문도 없이 하나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에도 아궁이나 계단석을 두지 않아 평면적인 기단면을 이룬다. 무변루의 구성 역시 마찬 가지다. 강당의 정면에 창이 없으면 유생들이 기거하는 양재를 감독할 수 없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교류도 약해진다. 기능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정면을 닫힌 평면으로 세운 의도는 더욱 개념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의 담과 벽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많은 출입문을 필요로 하게 되지만 넓은 출입문들은 담과 벽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이율배반에 빠진다. 문의 개수는 많지만 크기를 줄이고 입구성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 옥산서원 서재 뒷담에서 폭포쪽으로 나가는 문이나, 비각에서 세심대로 나가는 문의 폭은 90cm 정도이며,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없는 위치에 비밀스럽게 설치했다. 가장 기능적이어야 할 관리사와 서원 사이의 출입문도 몇 번의 굴절을 통해야 지나갈 수 있다.
외부에 대해 폐쇄적인 경계, 단편적인 부분공간의 구성, 담과 벽의 발달, 출입문의 은폐와 축소 등은 궁극적으로 요소요소에 미로들을 만든다. 독락당의 미로는 물론 은거생활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공공시설인 옥산서원은 원래 의미의 은거생활을 하는 곳이 아니다. 옥산서원의 은둔이란 지극히 건축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연 환경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서, 공간구성의 수법으로서 은둔의 개념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대고는 명칭 그대로 큰 창고이며 판벽으로 이루어졌다. 옥산서원의 재산규모를 가늠케 하는 건물이다. 포사는 벽체를 반쯤 막은 개방형 건물로 서원의 큰 행사가 있을 때 대형 부엌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고청은 서원의 관리인과 노비들이 기거하고 잡동사니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원청의 이름은 명확치 않으나 건물의 격식이나 형태로 보아 서원의 유사(총무)가 기거하면서 사무실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3-5. 옥산서원의 의의
김봉렬의 「은둔을 위한 미로-독락당과 옥산서원」 중에서
- 자연과 절연된 인위적 장소
옥산서원은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너무나 좋은 환경에 자리 잡은 탓일까. 옥산서원 안에서는 바깥의 경승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청각적으로도 단절될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닫혀 있다.
옥산서원의 역락문을 들어서는 순간 자연에서 느낀 감동의 여운은 급격히 사라지고 완벽하게 인위적인 공간으로 전환되고 만다. 내부의 중심 장소인 강당 마당에서는 사방을 꽉 둘러싼 건물들 사이의 팽팽함만이 감돌뿐이며, 어느 한 구석 긴장감을 이완시켜 주는 곳은 없다.……
강당마당은 비슷한 길이의 구인당과 무변루 사이의 양진재와 해립재가 끼워진 형식으로 구성된 정방형 공간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모퉁이 부분이 서로 겹쳐져서 마당의 모퉁이는 닫혀져 버렸고, 다음 공간으로의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퉁이를 닫기 위해 무변루는 7칸, 동서 양재는 5칸으로 길이를 늘렸다.
일반적으로 누각들은 벽면을 개방하여 외부의 경관을 내부로 끌어 들이는 경관적 프레임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옥산서원의 무변루는 바깥벽을 모두 막아서 외부로의 확장을 차단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마당은 구심적이고 내부지향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무변루는 5칸의 몸체에다 양끝 한 칸씩의 누마루를 부가한 형식이며, 가운데 5칸은 마당 쪽으로 개방하고 양끝 누마루는 외부로 향해 개방했다. 한 동의 건물에서 서로 다른 두 성격의 공간이 결합된 형식이다. 바깥에서는 7칸, 안에서는 5칸으로 인식되는 묘한 건물이며, 옥산서원의 기본적인 건축개념을 읽을 수 있는 건물이다.
단절적인 공간구성의 개념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역락문을 들어서면서 나타나는 무변루의 폐쇄성, 강당부와 사당부의 단절, 비각과 장경각의 독립적인 영역성, 심지어는 관리사 부분까지도 영역의 단절성은 계속된다.
- 규범성과 위계
옥산서원이 세워진 16세기는 서원건축의 역사로 보면 비교적 초기에 해당한다. 초기적 서원들은 구성축에 따라 대칭적으로 구성되기 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고 유기적으로 구성됨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옥산서원은 철저하게 중심구성축을 따라 배열되고 대칭적이다. 흔히 나타나는 건물 사이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건물들이 직각과 평행으로 만나고 있다. 아마도 이단을 철저하게 억압한 선구자 이언적의 정통주의·원리주의를 따른 것일까?
옥산서원의 터닦기는 크게 두 단으로 이루어진다. 아랫단은 강당영역과 관리사 영역이 남북으로 놓이고, 윗단에는 사당영역이 중심을 이루면서 좌우로 장경각과 비각을 배열했다. 관리사 뒤의 윗단에는 나중에 신축된 문집판각이 위치한다. 아랫단이 생활영역이라면, 윗단은 상징과 보물의 영역이다.
관리사 영역의 구성 역시 예사롭지 않다. 우선 관리사의 규모가 매우 크다. ㄱ자로 구성된 고청은 총 15칸이나 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당 가운데 놓여진 포사이다. 반쯤 개방된 벽체를 가진 이 건물은 행사시 음식 마련과 야외 식당으로 쓰이던 곳이다. 중심적 위치와는 상반되게 부재들은 엉성하다. 여기에 포사가 없었더라면 장방형의 넓은 마당이었을 텐데 포사를 배치함으로써 마당은 정방형으로 바뀌고, 서원청의 전속 마당이 된다. 동시에 뒤쪽에 있는 노비들 숙소를 가리는 이중적 효과를 거둔다.
- 옥산파의 건축어휘
옥산파의 건축어휘는 완결적이고 독립적인 부분공간을 형성하며 그들은 서로 비연속적이다. 완벽한 정방형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옥산서원의 강당마당은 건물에 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주인이다. 또 주위의 다른 공간들과는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자기 완결적 외부공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면적 요소인 담장이 발달하게 되고, 건물의 벽을 평면으로 활용하게 된다. 옥산서원 구인당의 정면을 보자. 마당쪽을 향한 정면임에도 불구하고 일절 개구부를 두지 않았다. 양끝 방의 벽은 창문도 없이 하나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에도 아궁이나 계단석을 두지 않아 평면적인 기단면을 이룬다. 무변루의 구성 역시 마찬 가지다. 강당의 정면에 창이 없으면 유생들이 기거하는 양재를 감독할 수 없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교류도 약해진다. 기능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정면을 닫힌 평면으로 세운 의도는 더욱 개념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의 담과 벽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많은 출입문을 필요로 하게 되지만 넓은 출입문들은 담과 벽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이율배반에 빠진다. 문의 개수는 많지만 크기를 줄이고 입구성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 옥산서원 서재 뒷담에서 폭포쪽으로 나가는 문이나, 비각에서 세심대로 나가는 문의 폭은 90cm 정도이며,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없는 위치에 비밀스럽게 설치했다. 가장 기능적이어야 할 관리사와 서원 사이의 출입문도 몇 번의 굴절을 통해야 지나갈 수 있다.
외부에 대해 폐쇄적인 경계, 단편적인 부분공간의 구성, 담과 벽의 발달, 출입문의 은폐와 축소 등은 궁극적으로 요소요소에 미로들을 만든다. 독락당의 미로는 물론 은거생활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공공시설인 옥산서원은 원래 의미의 은거생활을 하는 곳이 아니다. 옥산서원의 은둔이란 지극히 건축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연 환경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서, 공간구성의 수법으로서 은둔의 개념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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