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의 산지-옥산서원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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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교문화의 산지-옥산서원을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1)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서원의 형성
(2) 서원의 유래
(3) 서원의 시초
(4) 서원의 역사
(5) 서원의 역할
①공부하는 곳(사립대학)
②선현을 모시는 곳(사당)
③향촌사회의 도서관
(6) 서원의 폐단
2-1.玉山書院(옥산서원)
(1) 역락문(亦樂門)
(2) 변루(진입공간)
(3) 동서 양재(암수재·민구재)
(4) 구인당(강학공간)
(5) 체인묘(제향 공간)

3.결론-답사를 다녀와서

4.참고문헌

5.부록(신문기사, 기타자료)

본문내용

와 생태가 함께하는 마을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세심마을 이우근 이장 인터뷰 -
어느 마을이고 그린투어가 잘 되는 곳에는 뛰어난 마을지도자가 있게 마련이다. 옥산1리에는 8년전부터 경주시내 최연소 이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말총머리 이우근씨(44)가 주인공이다.
이씨는 대학 졸업후 몇 년간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1990년 고향 옥산리로 돌아와 마을 가꾸기를 시작했다. 외지인이 편하게 방문할 수 있게 하려면 주차장이 있어야 한다며 마을 자체적으로 주차장을 설치했고 비닐하우스 주변에 산나리를 식재해 도시민들의 눈길을 잡도록 했다. 강한 리더십과 친화력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산을 알리는 일, 미나리 공동재배로 주민들의 소득을 끌어올리는 일에 앞장섰다.
이렇게 해서 귀향 14년째인 지금 그는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됐다.
기자가 하룻밤 묵은 '영미네' 민박집의 홍옥화씨(59)도 이 마을의 '유명인사'다. 1998년 대구에서 귀향한 홍씨는 옥산리 최고의 손맛을 자랑하는 요리의 마법사다. 실제 기자의 식탁에 오른 완두콩밥, 된장찌개, 호박잎쌈, 풋고추, 남방잎 등은 참 맛깔스러웠다. 영미네는 방이 2개이며 1박 1인 1만원이고 식사는 5,000원이다.
〈유상오 전문위원〉
기사 2)
안강에서 호미곶까지
[뉴스메이커 2004-03-26 10:42]
영-호남을 넘나들어 길을 다니면서 양남(兩南)의 자연적 차이를 생각해볼 때가 있다. 영남의 산세가 굳세고 남성적인 반면, 호남의 자연은 어딘지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마도 빛이 아닌가 싶다. 동쪽에 위치한 영남은 그만큼 빛을 일찍, 오래 받고 자연 역시 생기발랄하니, 시체말로 이야기하면 '아침형'이다. 상대적으로 '저녁형'인 호남은 깊고 그윽한 맛이 있다. 가치판단을 떠나서 이러한 자연환경의 차이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에도 깊이 영향을 끼친다. 영남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반면, 호남은 예술적 기질이 농후하다. 자연을 대하는 법 역시 차이가 있어, 호남이 자연을 관조하려는 성향이 짙은 데 비해, 영남은 자연조차 경영하려고 든다. 소쇄원을 비롯한 호남의 정자문화와, 서원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유림문화가 그러한 차이를 잘 드러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호미곶으로 가는 길에 잠시 영남문화의 특색을 어김없이 엿볼 수 있는 안강에 들러야만 한다.
옥산서원과 양동마을
비록 경주에 속해 있다지만,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은 경주와는 또다른 별격의 답사지다. 어딜 가나 온통 신라뿐인 경주와는 달리 이곳 안강 지역은 조선 시대의 유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것도 규모 방대하고 위풍당당하게.
보길도가 고산의 낙원인 것처럼, 안강은 영락없이 회재 이언적의 소관이다. 조선조 철학적 논쟁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조한보와 논쟁을 벌여 학문적 성가를 드높이고, 퇴계로부터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세웠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던 이언적은 중앙 무대에서 입신과 좌절을 거듭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향리인 안강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절치부심, 재기를 노렸다. 지금의 옥산서원 뒤편 독락당과 계정, 정혜사지가 그 회한과 재충전의 현장이다.
영남 사림의 거두 회재의 삶이 어떠했든, 사후에 그를 배향한 옥산서원에 드는 길은 오롯이 학문에 대한 깊은 생각 에 잠겨 거닐 수 있는 사색의 길이다. 옥산서원에 들려면 자계천의 반석 위로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발밑으로 흐르는 실개천을 애써 외면하며 조심스레 다리를 건너보라. 무릇 학문에 이르는 길은 이처럼 긴장과 집중으로 비롯하는 것일지니.
역락문을 지나 서원 본채에 들어서면 점입가경이다. 병산서원의 자연을 향해 열린 구조와는 달리 무변루를 비롯한 옥산서원의 주요 건물들은 바깥 경관을 완곡히 차단한 채 중정(中庭)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서 있다. 이 또한 단절과 감시로 학습 효율을 높이려는 의도가 배어 있는 것은 아닐는지.
무변루의 편액 한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과 맑음이여, 태허를 노니는구나.
옥산서원을 돌아나와 도덕산 쪽으로 좀더 들어가면 회재가 낙향 시절을 보냈다는 독락당과 계정이 있다. 또한 그의 지기가 중국에서 가져다주어 심었다는 주엽나무가 천연기념물로 보존돼 있고, 집 뒤편으로는 그가 종교와 신분을 뛰어넘어 스님들과 교류했다는 정혜사지가 있다. 해당화와 동백이 아름다웠다는 정혜사는 1834년의 화재로 폐사되어, 지금은 눈맛 시원한 13층석탑 1기만 홀연히 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회재의 고향 양동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아직까지 옛경관이 남아 있는 이 땅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이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할거해온 집성촌으로, 월성 손씨 집안에서는 우재 손중돈을 배출했고, 여강 이씨 집안에서는 회재 이언적이 나왔다. 두 집안은 혼인으로 서로 친척관계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자기 '가문의 영광'을 위해 알게 모르게 갈등과 경쟁을 계속한다. 심지어 삼현(三賢)이 나올 길지라는 월성 손씨 종택 서백당을 두고도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우재가 태어난 이후, 외손인 회재가 이곳에서 탯줄을 끊는 바람에 한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손씨 문중에서는 시집간 딸들이 친정에 몸을 풀러 와도 해산만은 기어이 다른 집에서 시킨다는 것이니, 전통과 관습으로 꽉 짜인 듯한 이 마을을 돌면서 영욕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TIP학문과 전통의 딱딱함이 조금 지루하실지 모를 분들께 드리는 객쩍은 여담 하나. 옥산서원의 정문 격인 역락문(亦樂門)을 지나치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역락문이란 이름은 [논어]의 첫머리 '학이(學而)' 편에 나오는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아-먼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이다. 부박하던 학동 시절 짓궂게도 우리는 '붕' 자 대신 '방' 자를, '역' 자 대신 '알' 자를 끼워 외우고 다녔던 것이다. 덕분에 이 구절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지만... 공자여, 회재여, 나의 불경을 용서하시라.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편집회사 투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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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14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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