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학년) (1) 고구려가 산성을 축조한 이유와 고구려 산성의 군사적 방어 기능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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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학년) (1) 고구려가 산성을 축조한 이유와 고구려 산성의 군사적 방어 기능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고구려가 산성을 축조한 이유와 고구려 산성의 군사적 방어 기능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1) 고구려가 산성을 축조한 이유
(1) 방어체계
(2) 연락체계
(3) 공간활용
(4) 교통로
(5) 관방체계
2) 고구려 산성의 군사적 방어 기능

2.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구성과 문화교류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1)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구성
(1) 삼사
(2) 정사
(3) 종사관
(4) 통사
(5) 훈도
(6) 군관
(7) 의원, 영원(화원), 마상재인
2) 조선통신사의 문화교유

3.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삶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4. 이순신의 두 차례 백의종군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1) 첫 번째 백의종군
2) 2차 백의종군

5. 최부가 기록한 『표해록』의 간행과 내용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1) 최부가 기록한 『표해록』의 간행
2) 부가 기록한 『표해록』의 내용

참고문헌

본문내용

88년 윤 1월 3일 최부와 그 일행 43명은 배로 제주도 별도포에서 출발, 고향인 나주로 향하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한다. 바다에서 표류한지14일만에 1월 16일 태주부 임해현의 牛頭外洋에 표착한다. 최부 일행은 중국에 체류한 136일 동안 각 지역을 경유하며 귀로에 올랐는데, 거리로는 8,800여리나 된다. 최부의 『표해록』은 총 3권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권의 내용을 간략하게정리하면, 제1권은 금남이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현지에 부임하게 된 경위를 약술한 다음,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종 19년 윤정원 초3일 출발하였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중국 浙東지역에 상륙하여, 2월 4일소흥부에 이르러 왜구의 혐의를 완전히 벗을 때까지를 기록한 내용이다. 제2권은 2월 5일 절강성의 수도 항주에서 출발하여 3월25일 天津衛를 지날 때까지의 내용이다. 제3권은 그들이 북경 옥하관에 도착하여 약25일 동안 체재하면서 황제를 알현하고, 북경을 떠나 요동반도를 거쳐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의주에 도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서 근무하던 최부는 무신년 1월 3일에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는 서둘러 고향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무리 중 일부는 날씨가 좋지 못하니 떠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어버이를 여윈 최부는 이를 가벼이 듣고는 弘治 원년(성종 윤정월 초3일 서둘러 출항하였다. 하지만 풍랑을 만나 파도에 휩쓸리다 표류 9일째가 되던 날 한 섬에 도착하였다. 그 곳은 寧波府지방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해적들은 최부 일행의 물건을 모두 빼앗았다. 일행은 목숨만 부지하고 바다로 내몰려 정처 없이 떠밀려가다 윤 1월16일 臨海縣에 도착하였다. 6척의 배가 최부의 배를 포위하고 후추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일행은 육지로 달아났다.
이곳 해안일대는 왜구에 대한 피해가 심한 곳이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온갖 수모와 학대를 당하는 와중 왜구출몰 신고를 받고 온 명나라 관군과 부딪쳤다. 최부는 필담으로 자신이 조선관원이며 표류를 당한 것이라 설명하여 즉결처분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압송당한 후 신원확인을 위해 桃渚所에서 심문이 이루어졌다. 최부의 탁월한 문장력과 지식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마패, 공문서, 방목(과거시험 합격증)등의 물건이 증거로 인정되어 윤 1월 22일, 왜구의 혐의를 벗게 되고 북경으로의 이송이 이루어졌다. 도저소를 출발하여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하고 3월 28일 북경에도착하여 황제로부터 상을 하사 받는다. 이 후 송환길에 올라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 6월 14일 한양에 도착한다. 최부는 조선인의 내왕이 없었던 강남지방으로 표착해서 육로로 조선에 들어왔다. 따라서 그는 강남지방을 직접 목격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던 것이다.『표해록』은 명대 弘治(1488~1505)초의 지방의 행정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사회상 등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저택으로 말하자면, 강남은 기와를 덮고 벽돌을 깔았으며, 섬돌은 모두 연석(다음은 돌)을 사용하고, 또는 더러 돌 기둥을 세운 것도 있었는데, 모두 굉장히 화려했습니다. 강북은 작은 초가집이 거의 그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표해록』권3, 무신년 6월 견문잡록. >”
“복식으로 말하자면, 강남사람들은 모두 넓고 큰 검은 속옷과 바지를 입었는데 능라, 명주, 필단으로 옷을 지은 것이 많았습니다. …(중략)… 강북의 복식도 대개 강남과 같았으나 다만 짧고 좁은 흰 옷 입기를 좋아하고 가난하여 해진 옷을 입은 이가 열에 서너 명은 되었다. <표해록』권3, 위의 날짜. >”
위의 인용 기록들은 최부의 눈에 비친 강남과 강북의 차이로 책 마지막에자세히 기록해 놓았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표해록』은 명대를 이해하는 데대단히 유용한 자료이다. 당대에도 『표해록』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이를 전파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최부의 『표해록』이 쓰여진 후 당대 지식인들에게 읽혀진 것으로 보인다. 宣祖7년(1574)허봉이 明나라 神宗의 생일축하연을 다녀오면서 작성한 『朝天記』에 보면 허봉이 중국으로 가기 전 최부의『표해록』을 챙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英祖 때의 인물인 張漢喆이 쓴 『표해록』26일자의 기록을 보면그가 최부의 표해록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미지의 곳 이였던 중국 강남지방에 대한 호기심을 최부의『표해록』을 통해해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입문하기 전 길잡이로서 이 책을 읽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는 외국에서도 인정되어 소개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일찍이 명화6년(1769)에 학자인 淸田君錦이 최부의 표해록을 일문으로 번역하여 『당토행정기』로 개명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관에 따라 이 책을 평가, 소개하였다. 또한 일본의 사학자이며 京都大學 인문과학연구소 소장인 牧田諦亮교수가1959년에 발표한『策彦入明記의 연구(상 ·하)』에 최부 표해록을 수록하여 중국 상황을 기록한 동시대의 2부의 고서를 함께 묶어 놓아 검증과 대조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뒤이어 1964년에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학자인 존 메스킬이 최부의 표해록을 영역하고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삼았다. 이로써 표해록이 서양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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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형, 2022, 「고구려 후기 요동지역 고구려성의 위계와 방어체계」,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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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장명.『이순신 백의종군』. 서울: 행복한 나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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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9.22
  • 저작시기20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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