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고구려 시대에 산성이 수행했던 역할을 설명해주세요.
2. 1920~1930년대 와이탄 일대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설명해주세요.
3. 일제 강제 동원의 유형을 살펴보고, 오키나와로의 강제 동원 사례를 설명해주세요.
1) 일제 강제 동원의 유형
(1) 강제 징용
(2) 강제 징병
(3) 일본군 위안부
2) 오키나와로의 강제 동원 사례
4. 연해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의병투쟁과 항일 독립운동의 사례를 제시해주세요.
1) 의병투쟁
2) 항일 독립운동 사례
5. 조선시대 유배와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1) 조선시대 유배
2)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
참고문헌
2. 1920~1930년대 와이탄 일대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설명해주세요.
3. 일제 강제 동원의 유형을 살펴보고, 오키나와로의 강제 동원 사례를 설명해주세요.
1) 일제 강제 동원의 유형
(1) 강제 징용
(2) 강제 징병
(3) 일본군 위안부
2) 오키나와로의 강제 동원 사례
4. 연해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의병투쟁과 항일 독립운동의 사례를 제시해주세요.
1) 의병투쟁
2) 항일 독립운동 사례
5. 조선시대 유배와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1) 조선시대 유배
2)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
참고문헌
본문내용
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군은 산간 지역인 수청 지역에 산재해 있는 한인 부대들과 한인 마을을 공격하기 위해 마적을 활용했다. 일본군은 4월 참변 이후 내수청에서 철수하고 외수청에서만 주둔하고 있었는데, 중국계 마적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한인 마을을 공격하도록 선동했다. 당시 연해주 추풍과수청 지역에서 극렬하게 한인 마을을 공격한 마적은 告山派(코산파)였다. ‘4월 참변’ 직후 연해주 지역에서는 마적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치머우에서 활동했던 강호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연해도에 남아서 발악하는 왜놈 간섭부 참모부에서는 중국 홍의적 코산이라는 놈을 괴수로하고 적고 큰 부대들을 각 조선 농촌에 보내서 집에 불을 놓고 재산을 강탈하는 등 만행을 함으로써 조·중 양국 인민들을 기괴하게 갈등지으며 우리 빨치산들 근거지를 없애려고 반항하였다”라고 설명했다. 연해주 지역의 한인사회는 한인 무장부대들의 인적·물적지원의 토대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무장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활동이었다. 김규면이 연해주 지역을 “간접으론 조선독립운동의 후비지대이고, 직접으론 붉은 빨치산 활동 지대”라고 설명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5. 조선시대 유배와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1) 조선시대 유배
조선은 창건 이후 체제안정을 위해 형률을 정비하게 되는데 그 큰 원칙은 大明律 에 의거하여 死刑, 먼 곳에 보내 격리시키는 流刑, 감금하여 노역케 하는 徒刑, 굵은 매 50대 이상을 치는 杖刑, 가는 매 50대 이하를 치는 笞刑 등 5형을 결정하였다. 이 가운데 유배를 보내는 유형은 중죄를 범한 자에게 사형까지는 과하지 않고 원격지로 보내어 종신 귀환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배는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국사범들에게 해당되었으며 사형완화법으로 주로 이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의 원근거리가 책정되었고 형기는 원칙적으로 무기종신이었다. 유배인은 사형에서 減一等된 죄인으로써 그들의 성분은 대개가 정치범이었다. 그들은 사면령이 내리든가 정치정세의 변동이 일어나던가 하지 않으면 일생 귀향할 수 없었다. 經國大典 에서 밝히고 있는 流刑은 사람이 범죄를 범한 경우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제도이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적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죄인을 처벌하기 위하여 운용되었다.
유형의 종류는 거리, 죄의 경중과 집행방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거리에 따른 종류를 살펴보면 경국대전 에서는 세 등급으로 나누어, 2천리, 2천 5백리, 3천리의 거리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이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거리에 차등을 준 제도라 할 수 있다. 이후 조선후기 增補文獻備考 에서는 보다 자세한 형태로 구분하고 있는데, 2천리, 2천 5백리, 3천리의 분류 이외에 遷徒, 充軍, 定配, 爲奴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전기에는 거리에 의한 구분만을 하고 있는데 비해 조선후기에는 다양화된 구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죄의 경중과 집행방법에 따라 付處, 安置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처는 하급관리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自願付處, 本鄕付處 등의 형태들이 있는데,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을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유배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치는 왕족이나 고관, 현직에 있는 자에 한하여 적용하는 것으로 부처에 비해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유배지에서 또 한 장소에 국한하여 거주를 제한한 것이다. 안치에는 本鄕安置, 自願安置, 圍離安置 등의 방법이 있다. 이 중 가장 가혹한 위리안치는 한 장소를 정하여 가시로 집을 폐쇄하여 죄인을 가두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초기에는 거리를 기준으로 유배지를 선정한 것이라면 후기에는 거리 뿐만 아니라 죄의 경중이나 집행방법에 의해서도 종류를 달리하고 있다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 국토의 사정을 보더라도 국토가 좁기 때문에 거리를 기준으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로 한 지역을 정하여 유배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2)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
조선시대 유배의 대부분은 지식인의 정치적 수난 고리인 黨爭이 그 원인이었다. 조선의 유배는 그 발생이 주로 정치적 생존경쟁인 당쟁으로부터 기인했으며, 당쟁을 통해 정권 장악에 성공한 자들이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했던 산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배와 조선 지식인의 정치적 수난과는 대응관계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유배는 통상 갑산이나 북청 또는 영흥, 초산, 강계 등의 원배로 그쳤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변경이나 내륙으로의 유배 대신, 島配가 격증하였고, 특히 제주도를 비롯한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1급의 유배지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섬에는 당대의 유명한선비들이 대거 유배되는데 그 수에 있어서 제주도는 단연 압도적이다. 원래 조선의 유배는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國事犯들에게 해당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사형완화법으로 이용되었다. 사형완화라고 해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유배인들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절망, 고독, 빈궁을 맛보게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충격을 만나게 됨은 물론 언제라도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실감한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참고문헌
송찬섭 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박경식, 조선인강제연행의 기록, 고즈윈, 2008.
중앙문화재연구원, 2014,『신라고고학개론下』, 진인진.
정혜경,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Ⅰ:일본편, 선인, 2006.
정원철, 2011, 「고구려 남도 북도와 고구려 산성의 축성」, 『동국사학』 50,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양시은, 2014, 「고구려 성의 방어체계 변천양상 연구」, 『韓國上古史學報』 84, 韓國上古史學會.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4345권, 국사편찬위원회, 2001.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지식산업사, 2004.
홍영기,『한말 후기의병』(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치머우에서 활동했던 강호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연해도에 남아서 발악하는 왜놈 간섭부 참모부에서는 중국 홍의적 코산이라는 놈을 괴수로하고 적고 큰 부대들을 각 조선 농촌에 보내서 집에 불을 놓고 재산을 강탈하는 등 만행을 함으로써 조·중 양국 인민들을 기괴하게 갈등지으며 우리 빨치산들 근거지를 없애려고 반항하였다”라고 설명했다. 연해주 지역의 한인사회는 한인 무장부대들의 인적·물적지원의 토대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무장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활동이었다. 김규면이 연해주 지역을 “간접으론 조선독립운동의 후비지대이고, 직접으론 붉은 빨치산 활동 지대”라고 설명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5. 조선시대 유배와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1) 조선시대 유배
조선은 창건 이후 체제안정을 위해 형률을 정비하게 되는데 그 큰 원칙은 大明律 에 의거하여 死刑, 먼 곳에 보내 격리시키는 流刑, 감금하여 노역케 하는 徒刑, 굵은 매 50대 이상을 치는 杖刑, 가는 매 50대 이하를 치는 笞刑 등 5형을 결정하였다. 이 가운데 유배를 보내는 유형은 중죄를 범한 자에게 사형까지는 과하지 않고 원격지로 보내어 종신 귀환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배는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국사범들에게 해당되었으며 사형완화법으로 주로 이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의 원근거리가 책정되었고 형기는 원칙적으로 무기종신이었다. 유배인은 사형에서 減一等된 죄인으로써 그들의 성분은 대개가 정치범이었다. 그들은 사면령이 내리든가 정치정세의 변동이 일어나던가 하지 않으면 일생 귀향할 수 없었다. 經國大典 에서 밝히고 있는 流刑은 사람이 범죄를 범한 경우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제도이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적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죄인을 처벌하기 위하여 운용되었다.
유형의 종류는 거리, 죄의 경중과 집행방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거리에 따른 종류를 살펴보면 경국대전 에서는 세 등급으로 나누어, 2천리, 2천 5백리, 3천리의 거리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이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거리에 차등을 준 제도라 할 수 있다. 이후 조선후기 增補文獻備考 에서는 보다 자세한 형태로 구분하고 있는데, 2천리, 2천 5백리, 3천리의 분류 이외에 遷徒, 充軍, 定配, 爲奴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전기에는 거리에 의한 구분만을 하고 있는데 비해 조선후기에는 다양화된 구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죄의 경중과 집행방법에 따라 付處, 安置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처는 하급관리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自願付處, 本鄕付處 등의 형태들이 있는데,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을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유배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치는 왕족이나 고관, 현직에 있는 자에 한하여 적용하는 것으로 부처에 비해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유배지에서 또 한 장소에 국한하여 거주를 제한한 것이다. 안치에는 本鄕安置, 自願安置, 圍離安置 등의 방법이 있다. 이 중 가장 가혹한 위리안치는 한 장소를 정하여 가시로 집을 폐쇄하여 죄인을 가두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초기에는 거리를 기준으로 유배지를 선정한 것이라면 후기에는 거리 뿐만 아니라 죄의 경중이나 집행방법에 의해서도 종류를 달리하고 있다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 국토의 사정을 보더라도 국토가 좁기 때문에 거리를 기준으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로 한 지역을 정하여 유배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2) 유배인을 발생시킨 정치적 배경
조선시대 유배의 대부분은 지식인의 정치적 수난 고리인 黨爭이 그 원인이었다. 조선의 유배는 그 발생이 주로 정치적 생존경쟁인 당쟁으로부터 기인했으며, 당쟁을 통해 정권 장악에 성공한 자들이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했던 산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배와 조선 지식인의 정치적 수난과는 대응관계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유배는 통상 갑산이나 북청 또는 영흥, 초산, 강계 등의 원배로 그쳤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변경이나 내륙으로의 유배 대신, 島配가 격증하였고, 특히 제주도를 비롯한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1급의 유배지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섬에는 당대의 유명한선비들이 대거 유배되는데 그 수에 있어서 제주도는 단연 압도적이다. 원래 조선의 유배는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國事犯들에게 해당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사형완화법으로 이용되었다. 사형완화라고 해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유배인들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절망, 고독, 빈궁을 맛보게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충격을 만나게 됨은 물론 언제라도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실감한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참고문헌
송찬섭 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박경식, 조선인강제연행의 기록, 고즈윈, 2008.
중앙문화재연구원, 2014,『신라고고학개론下』, 진인진.
정혜경,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Ⅰ:일본편, 선인, 2006.
정원철, 2011, 「고구려 남도 북도와 고구려 산성의 축성」, 『동국사학』 50,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양시은, 2014, 「고구려 성의 방어체계 변천양상 연구」, 『韓國上古史學報』 84, 韓國上古史學會.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4345권, 국사편찬위원회, 2001.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지식산업사, 2004.
홍영기,『한말 후기의병』(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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