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빨간 도깨비의 정체- 윤대녕의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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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니다. 그 곳은 아주 황량한 곳이다. 당신이 그림에 미쳐 있고 기자인 선배가 석굴에, 또 누구는 사진에, 골동품과 차(茶)에 미쳐 있듯이 나도 지금 무언가에 미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 중에 그런 질문을 받고 일목요연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럴수만 있다면 미칠 이유도 없겠지. 그러니 그런 말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옳다. 우리 모두가 얼마쯤은 나라는 빨간 도깨비에 미쳐 있다는 것을 너도 부인하지는 않겠지.
바로 '나'라는 빨간 도깨비에 미쳐 있는 상태, 곧 나는 누군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 외엔 남지 않은 상태이다. 그것이 바로 '나'가 짊어진 소금수레이다. 황무지의 언덕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의 모습을 보고 '나'는 애써 송갑영의 영상을 떠올리려 하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환영일 뿐이다. 이런 '나'는 사막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동성연애자거나 허무주의자들 내지는 지독한 자기 근친적 사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일거라는 이영주의 말 속에 포섭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영주의 말 속엔 이미 '나'에 대한 물음의 해답이 고스란히 스며 들어 있다.
"저는 사막을 제법 다녀 왔어요. 사막 끝에서 누가 손을 들어 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요. 저는 무모하게도 열심히 달려가요. 그럴수록 상대는 점점 멀어지지만요"
"하지만 사막 한 가운데 들어가면 늘 깨닫게 돼요. 역시 사막은 비어 있다는 것을요"
"내가 사라진 지점에서 사막은 풍요롭게 부풀어 올라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내가 사막과 같아질 때 말예요"
"어쨋든 주천(나와 이영주가 몸을 섞었던 곳)에서 저는 비로소 수레에서 놓여 났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라는 집착과 환상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했을 거에요"
사막이란 단지 사막에 불과하다. 다시 사막이란 대절망 대허무이다. '나'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인가. 그 해답은 나라는 집착과 환상을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며, 사막 속에서 내가 사라질 때, 또는 내가 사막과 같아질 때, 대절망과 대허무를 끌어 안을 때 그러한 물음은 사라진다. 이는 단순히 나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방기한 것이 아니다. 안락함과 편안함으로 다가서는 일상의 균열을 그 대가로 지불했기 때문이다.
3.
나에게도 멀리 있어 소중한 존재가 있다. 그 그리움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여, 그대는 앞으로도 한 천년동안, 그토록 내 곁에 멀리 있어다오. 밤마다 헛발질하며 달려갈 테니. ---소설집[은어낚시 통신] 작가의 말 중에서
어느 면에서 윤대녕의 작품은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이지 않는가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허무의 늪을 건너 피안의 살 만한 세상의 모형을 설계하는 것은 극히 차후의 문제이다. 모종의 운명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작가에게 오늘과 미래를 비춰줄 태양을 기다린다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이며 그 기다림의 조바심은 작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억압적 조건일 뿐이다. 영혼의 모험들이 끝내 허무로 치달아도, 그리고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는 것이어도. 기다림 보다는 더 값진 것이리라.

키워드

나라,   빨간,   도깨비,   정체,   윤대녕
  • 가격1,3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1.12.19
  • 저작시기200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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