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禪師로서의 惟政
Ⅲ. 당시 국내 선사상의 흐름
Ⅳ. 惟政의 禪觀
Ⅴ. 맺는 말
Ⅱ. 禪師로서의 惟政
Ⅲ. 당시 국내 선사상의 흐름
Ⅳ. 惟政의 禪觀
Ⅴ. 맺는 말
본문내용
利鈍 隨機得入).’
) 위의 책, p.650 中
利根과 上知의 사람은 입으로 외우지 않고 自性彌陀를 생각하고 둔하고 용렬한 根機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으로, 唯心淨土와 西方淨土를 모두 인정하되 自性彌陀 唯心淨土를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참선과 염불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心法要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참선이 곧 염불이고, 염불이 곧 참선이다.
本性은 方便을 떠나 밝고도 밝으며, 고요하고도 고요할 뿐이로다.
) 休靜,「心法要抄」『韓佛』第7冊, p.651中
‘參禪卽念佛 念佛卽參禪
本性離方便 昭昭寂寂然’
惟政의 淨土思想에 대한 견해는「圓俊長老 法華後跋」에 잘 나타나 있다.
근기를 돌이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自力이요 또 하나는 他力이다. 自力이란 一念으로 근기를 돌이켜 문득 본래의 깨달음과 같아지는 것을 말함이요, 他力이란 慈父에게 귀의하여 十念의 念佛로써 공을 이루는 것이다. 西方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이 극락이며 大聖이 계시니 그 이름이 無量光이라 한다. 그 분은 항하사 모래알 같은 보살과 미진수의 성문에 둘러싸여, 48종의 서원과 8만4천의 상호와 광명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니, 일념으로부터 칠념에 이르는 동안에 玉毫로써 그들을 맞아 인도한다.
)『四溟集』, 위의 책, p. 62上
‘機有二種 一自力 二他力 自力爲一念回機 便同本覺者也 西方有國曰極樂 有大聖曰無量光 河沙菩薩 塵數聲聞圍繞 而四十八願八萬四千隨身相好光明 攝取衆生 一念至於七念 皆蒙玉毫接引’
上根機의 중생은 自力의 수행을 하는 것이니 이는 참선을 통하여 문득 본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요, 中·下根機의 중생은 他力의 수행을 하는 것이니 이는 염불로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延壽禪師가 『萬善同歸集』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다.
구품경문에 스스로 오르내리는 차례가 밝혀져 있거니와 上下를 該攝하면 두 마음에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定心이니 정을 닦아 觀을 익혀서 上品에 왕생하는 것이요, 다음은 專心이니 다만 名號를 염하고 衆善으로 도와 회향하고 발원하면 반드시 末品을 이룰 수 있다.
) 延壽 述,『萬善同歸集』『大正藏』第48卷, p.968下
‘九品經文自有昇降 上下該攝不出二心 一定心如修定習觀上品往生 二專心但念名號衆善 資熏廻向發願 得成末品’
惟政이 서방극락정토를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天俊薦師疎」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새로 원적에 드신 대선사께서는 … 蓮花가 핀 아름다운 못가를 거닐면서 성현들과 함께 노시옵소서. …그러하옵고 四恩과 三有와 法界의 모든 영혼들도 큰 願海 속에서 遊泳하게 하여 일곱겹 나무 아래를 거닐면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圓門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玉毫를 우러러 대하여 이 薦疎를 읽는 바이옵니다.
)「天俊薦師疎」『四溟集』위의 책, p.63上
‘伏願新圓寂大禪師…逍遙蓮花寶池 聖賢同流…然願回恩三有法界群靈 遊泳大願海中 無一人不生淨土 經行七重樹下 與諸聖同入圓門 仰對玉毫 披讀薦疎’
天俊이 입적한 스승을 천도하면서 그 疎를 지어줄 것을 청하자 이에 그 소를 지은 것인데 서방극락세계의 蓮花池와 七重行樹에 노닌다는 것은 곧『阿彌陀經』에 나타난 서방극락정토를 말하는 것이다.
선사들의 淨土觀은 대체로 唯心淨土이지만 延壽와 知訥, 惠勤, 休靜, 惟政등은 唯心淨土와 더불어 西方淨土를 인정하고 있으며, 단지 根機에 따라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禪師들은 근본적으로 自性彌陀 唯心淨土의 淨土觀을 가지고 있으며, 하근기 대중들을 교화하거나 亡者를 遷度할 때에는 西方極樂淨土를 설하였다. 延壽선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몸소 稱名念佛行을 하였던 선사도 있었으나, 惟政을 비롯한 국내 禪師들은 직접 稱名念佛한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Ⅴ. 맺는 말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惟政은 당시 臨濟禪 중심의 국내 조계종 전통에 따라 수행하였으며, 당시의 불교는 臨濟宗의 看話禪 선풍에 法眼宗 延壽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曹洞宗의 사상마저 받아들여 通佛敎的인 성격을 형성한 知訥의 曹溪宗風이었다.
臨濟禪을 추종하면서도『華嚴經』·『法華經』을 비롯한 교학을 배우고 念佛을 하는 이러한 조계종의 전통은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고려말 懶翁 惠勤이 중창한 檜巖寺의 가람배치를 보면‘普光殿·說法殿·金剛殿·羅漢殿·大藏殿·祖師殿·觀音殿·彌陀殿’등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李穡,「天寶山檜巖寺修造記」『高麗名賢集』(서울:대동문화연구원, 1973) p.809上∼下
이러한 堂宇들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의 불교계가‘禪·敎·淨土’사상이 함께 수행되고 신앙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의 이와 같은 불교의 전통은 그대로 조선조에까지 이어졌으며 각종의식에 있어서도 현존『釋門儀範』에 의하면 통합적이며 원융적인 曹溪宗風이 의식을 통해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까지 叢林이라 하여 禪院·講院·律院·念佛院을 갖추어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출가당시부터 당시의 고승이었던 信默화상으로부터『傳燈錄』을 배웠으며, 敎科와 禪科중 禪科에 급제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처음부터 禪師로서의 길을 나아가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2세에 禪宗의 주지로 천거되었다는 사실 등에서 우리는 禪師로서의 惟政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休靜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正法을 수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敎學僧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捨敎入禪을 실행한 禪師이었으며 休靜의 嗣法弟子였던 것이다.
그의 선사상을 살펴보면 臨濟 義玄과 永明 延壽의 영향을 받은 普照 知訥, 懶翁 慧勤, 淸虛 休靜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즉 이는 許端甫가「石藏碑」에서 밝힌‘지금에 와서 牧牛子[知訥]와 江月軒[惠勤]의 道脈을 이은 이가 우리 스님을 두고 그 누구이겠는가(今世續牧牛江月之道脈者 捨吾師其誰).’
)「石藏碑」, 앞의 책, p.827
라는 기록과 그 碑銘에‘永明과 江月이 오직 원융하며 그 끝을 이어 비추는 이 서산이 으뜸이다.(永明江月獨圓 嗣其末照 西山最先).’
) 위의 책, p.827
라고 기록한 것은 당시 국내 불교사상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아진다.
) 위의 책, p.650 中
利根과 上知의 사람은 입으로 외우지 않고 自性彌陀를 생각하고 둔하고 용렬한 根機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으로, 唯心淨土와 西方淨土를 모두 인정하되 自性彌陀 唯心淨土를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참선과 염불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心法要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참선이 곧 염불이고, 염불이 곧 참선이다.
本性은 方便을 떠나 밝고도 밝으며, 고요하고도 고요할 뿐이로다.
) 休靜,「心法要抄」『韓佛』第7冊, p.651中
‘參禪卽念佛 念佛卽參禪
本性離方便 昭昭寂寂然’
惟政의 淨土思想에 대한 견해는「圓俊長老 法華後跋」에 잘 나타나 있다.
근기를 돌이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自力이요 또 하나는 他力이다. 自力이란 一念으로 근기를 돌이켜 문득 본래의 깨달음과 같아지는 것을 말함이요, 他力이란 慈父에게 귀의하여 十念의 念佛로써 공을 이루는 것이다. 西方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이 극락이며 大聖이 계시니 그 이름이 無量光이라 한다. 그 분은 항하사 모래알 같은 보살과 미진수의 성문에 둘러싸여, 48종의 서원과 8만4천의 상호와 광명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니, 일념으로부터 칠념에 이르는 동안에 玉毫로써 그들을 맞아 인도한다.
)『四溟集』, 위의 책, p. 62上
‘機有二種 一自力 二他力 自力爲一念回機 便同本覺者也 西方有國曰極樂 有大聖曰無量光 河沙菩薩 塵數聲聞圍繞 而四十八願八萬四千隨身相好光明 攝取衆生 一念至於七念 皆蒙玉毫接引’
上根機의 중생은 自力의 수행을 하는 것이니 이는 참선을 통하여 문득 본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요, 中·下根機의 중생은 他力의 수행을 하는 것이니 이는 염불로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延壽禪師가 『萬善同歸集』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다.
구품경문에 스스로 오르내리는 차례가 밝혀져 있거니와 上下를 該攝하면 두 마음에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定心이니 정을 닦아 觀을 익혀서 上品에 왕생하는 것이요, 다음은 專心이니 다만 名號를 염하고 衆善으로 도와 회향하고 발원하면 반드시 末品을 이룰 수 있다.
) 延壽 述,『萬善同歸集』『大正藏』第48卷, p.968下
‘九品經文自有昇降 上下該攝不出二心 一定心如修定習觀上品往生 二專心但念名號衆善 資熏廻向發願 得成末品’
惟政이 서방극락정토를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天俊薦師疎」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새로 원적에 드신 대선사께서는 … 蓮花가 핀 아름다운 못가를 거닐면서 성현들과 함께 노시옵소서. …그러하옵고 四恩과 三有와 法界의 모든 영혼들도 큰 願海 속에서 遊泳하게 하여 일곱겹 나무 아래를 거닐면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圓門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玉毫를 우러러 대하여 이 薦疎를 읽는 바이옵니다.
)「天俊薦師疎」『四溟集』위의 책, p.63上
‘伏願新圓寂大禪師…逍遙蓮花寶池 聖賢同流…然願回恩三有法界群靈 遊泳大願海中 無一人不生淨土 經行七重樹下 與諸聖同入圓門 仰對玉毫 披讀薦疎’
天俊이 입적한 스승을 천도하면서 그 疎를 지어줄 것을 청하자 이에 그 소를 지은 것인데 서방극락세계의 蓮花池와 七重行樹에 노닌다는 것은 곧『阿彌陀經』에 나타난 서방극락정토를 말하는 것이다.
선사들의 淨土觀은 대체로 唯心淨土이지만 延壽와 知訥, 惠勤, 休靜, 惟政등은 唯心淨土와 더불어 西方淨土를 인정하고 있으며, 단지 根機에 따라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禪師들은 근본적으로 自性彌陀 唯心淨土의 淨土觀을 가지고 있으며, 하근기 대중들을 교화하거나 亡者를 遷度할 때에는 西方極樂淨土를 설하였다. 延壽선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몸소 稱名念佛行을 하였던 선사도 있었으나, 惟政을 비롯한 국내 禪師들은 직접 稱名念佛한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Ⅴ. 맺는 말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惟政은 당시 臨濟禪 중심의 국내 조계종 전통에 따라 수행하였으며, 당시의 불교는 臨濟宗의 看話禪 선풍에 法眼宗 延壽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曹洞宗의 사상마저 받아들여 通佛敎的인 성격을 형성한 知訥의 曹溪宗風이었다.
臨濟禪을 추종하면서도『華嚴經』·『法華經』을 비롯한 교학을 배우고 念佛을 하는 이러한 조계종의 전통은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고려말 懶翁 惠勤이 중창한 檜巖寺의 가람배치를 보면‘普光殿·說法殿·金剛殿·羅漢殿·大藏殿·祖師殿·觀音殿·彌陀殿’등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李穡,「天寶山檜巖寺修造記」『高麗名賢集』(서울:대동문화연구원, 1973) p.809上∼下
이러한 堂宇들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의 불교계가‘禪·敎·淨土’사상이 함께 수행되고 신앙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의 이와 같은 불교의 전통은 그대로 조선조에까지 이어졌으며 각종의식에 있어서도 현존『釋門儀範』에 의하면 통합적이며 원융적인 曹溪宗風이 의식을 통해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까지 叢林이라 하여 禪院·講院·律院·念佛院을 갖추어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출가당시부터 당시의 고승이었던 信默화상으로부터『傳燈錄』을 배웠으며, 敎科와 禪科중 禪科에 급제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처음부터 禪師로서의 길을 나아가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2세에 禪宗의 주지로 천거되었다는 사실 등에서 우리는 禪師로서의 惟政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休靜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正法을 수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敎學僧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捨敎入禪을 실행한 禪師이었으며 休靜의 嗣法弟子였던 것이다.
그의 선사상을 살펴보면 臨濟 義玄과 永明 延壽의 영향을 받은 普照 知訥, 懶翁 慧勤, 淸虛 休靜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즉 이는 許端甫가「石藏碑」에서 밝힌‘지금에 와서 牧牛子[知訥]와 江月軒[惠勤]의 道脈을 이은 이가 우리 스님을 두고 그 누구이겠는가(今世續牧牛江月之道脈者 捨吾師其誰).’
)「石藏碑」, 앞의 책, p.827
라는 기록과 그 碑銘에‘永明과 江月이 오직 원융하며 그 끝을 이어 비추는 이 서산이 으뜸이다.(永明江月獨圓 嗣其末照 西山最先).’
) 위의 책, p.827
라고 기록한 것은 당시 국내 불교사상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