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굉도의 현실인식-산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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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언

2. 과중한 과세제도의 폐해

3. 불합리한 정치제도의 비판

4. 비판적 현실인식의 한계

5. 결어

본문내용

의 사상이 유가쪽으로 다시 방향전환을 하였다
) 李基勉은 <袁宏道의 現實論>, 212쪽에서 삼교합일적 가치관에서 유교적 가치관으로 다시 경도되었다고 하였다.
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 문장이 鄕試를 주관한 對策程文이고, 이 시기는 吏部에 있을 때 지은 <摘發巨奸疎> 등 정치현안이나 정치적 견해를 밝힌 문장이 있지만 이외에 佛家와 性命學에 대한 글도 많다.
) 和者樂之所有生 劉元定詩序 壽曾太史封公七十序 壽何孚可先生八十序 등.
특히 柳浪에서 6년간의 사색을 거친 후에는 더욱 禪이나 道家에 심취하였고, 이러한 사상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袁宏道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오현때와 초기 북경관직시기에는 병을 칭하여 휴가를 신청하였고, 1609년에 쓴 請點右侍郞疏 에서도 같은 이부의 楊時橋의 병환을 염려해 황제에게 휴가를 허락해달라고 신청하였지만, 같은 시기에 쓴 査參擅去諸臣疏 에서는 吏部는 조사권이 없으니 자기마음대로 歸鄕하려는 신하에 대해 조속히 조사해 달라는 疏를 올린 것을 볼 때, 袁宏道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사상이 유가로 전환하였다고 보기가 어렵고, 인간의 삶이나 정치에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설정해놓고 정계에 나가더라도 지극히 원론적인 관리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국 袁宏道는 확실한 정치적인 경향을 가지지 않았고, 당시 만명의 암흑적인 사회와 혼란한 관계에서 흐름에 내맡겨 세상의 흥망성쇠에 따르는 관원과는 다르고, 任情 放誕 縱欲했던 名士와도 다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서 산림으로 은퇴한 은사와도 다르며, 應世的 諧世的 玩世的·出世的이 아니라, 避世的이고 適意的이라는 주장
) 周明初, 晩明士人心態及文學個案 , 東方出版社, 264쪽.
에서 그의 정치적 사상적인 면모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식 또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5. 結語
袁宏道는 儒家敎育을 받고 관직생활을 통해 兼濟天下의 이치를 실천하고자 애썼던 문인이다. 그는 나라의 명을 받는 관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이에 따라 그가 담당했던 吳縣은 세금징수 실적이 좋은 모범지역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 "吳賦甲於天下." 袁中道, <行狀>.
그러나 이는 여느 지방관들처럼 포악한 방법에 의한 강제징수가 아니었다. 전술했듯이 백성의 어버이된 입장에서, 발로 뛰어다니며 그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에 가장 합당한 액수와 기한을 정하려 했던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원굉도는 백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지방관의 입장이기에 백성의 삶을 塗炭으로 내모는 課稅制度의 모순 또한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고, 이러한 문제점을 그의 산문작품 속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또한 오랜 세월동안 고착되어버린 황제와 환관의 전횡, 관리들을 옥죄는 갖가지 정치제도에 의해 할 말을 못하는 폐쇄적인 현실, 아울러 불합리한 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관료들의 고통 또한 그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원굉도가 비록 산수자연에 마음을 기탁하고, 참선과 수양을 통해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갖고자 노력한 인물이었으나, 자신이 발붙이고 서있는 현실에 대해 예리한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며, 現實과 理想 兩者를 조화시키려 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원굉도가 吳縣의 관직을 그만 둔 후 각지를 유람하고, 다시 고향에서 은거한 후 더욱 현실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그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官界의 생활이 싫어 유람과 은둔, 벼슬과 은퇴를 반복하였지만 그것이 현실에의 무관심이나 극히 이기적인 개인내면으로의 沈潛은 아니었다. 그는 과거제도에 관계된 부정을 척결하자는 글을 올리기도 하고
) <摘發巨奸疏> (1504)
, 언로가 차단되어 諫言을 하다가 피해를 당하는 상황에 많은 인재들이 조정을 떠나자 朝廷의 空洞化현상을 막자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 <策·第一問> (1513)
은둔과 유람을 추구했던 그의 사상과는 너무나 모순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혹자는 이를 오랜 은둔을 통해 현실을 개혁할 수 없는 데서 오는 「패배주의의 산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 袁宏道性靈說硏究 , 李基勉,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73쪽.
그러나 필자는 이를 백성의 어버이인 「牧民」으로서의 의무감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는 말단관직에 있으면서도 백성의 고통을 줄여주려 애썼고,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개량을 꾀했던 지방관이었기에, 亡國으로 치닫는 현실 앞에서 먼저 백성을 걱정했기 때문에 노년으로 갈수록 더욱 치열하게 현실개혁론을 개진했던 것이라 사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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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2.05
  • 저작시기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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