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전쟁과 외교
⑴ 제 1 기
⑵ 제 2 기
⑶ 제 3 기
⑷ 제 4 기
⑸ 제 5 기
3. 맺음말
2. 전쟁과 외교
⑴ 제 1 기
⑵ 제 2 기
⑶ 제 3 기
⑷ 제 4 기
⑸ 제 5 기
3. 맺음말
본문내용
것이나, 이에 관련된 사실을 전하는 백제측의 「百濟
本記」나 왜측의 『日本書紀』는 번거로울 정도로 각각의 국명을 나열하고 있다.
이들의 기술이 東部의 가야제국과 西部의 가야제국을 구별하고 있음은 물론,
「繼體紀」는 東部의 가야제국을 金官.背伐.安多.委陀(多多羅.須那羅.和多.費
智)로, 「欽明紀」는 東部의 가야제국을 南加羅.啄己呑.卓淳으로, 西部의 가야
제국을 安羅.加羅.卒麻.散半奚.多羅.斯二岐.子他 등으로 각각 구분.기술하고
있다.
더구나 이와 같은 가야제국의 나열이 단순히 가야의 국명을 나열하였던 것이
아니고, 가야제국이 신라나 백제를 대상으로 전개하였던 전쟁과 외교의 기술
에서 보인다고 하는 것은 강력한 盟主의 존재가 상정될 만한 加耶聯盟體'가
아니라 해당의 시기에 각기 다른 목적에서 이합집산을 되풀이 하였던 가야제
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欽明 23年 正月條에는 新羅가 任那官家를 打滅하였다.<一本에는 21年에 任
那가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총칭하여 任那라고 하며, 별도로는 加羅國.安羅國
.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으로 합하여 十國이
된다>'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는 가야제국이 동시에 멸망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여러 단계에 거쳐 신라에 의하여 통합되었던 가야제국
을 여기에 묶어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조에 백제의 성왕이 가야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탁순(卓淳)등이 화(禍)를 당한 것은 신라가 강해서 만은 아니다. 탁기탄(啄己呑)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위치하여 매년 공격을 받았는데도 임나(任那)가 구원하지 못하여 망한 것이며, 남가라(南加羅)는 신라에 대비하지 않고 도리어 의탁하였던 고로 망하였으며, 탁순(卓淳)은 상하가 분열되어 안으로 부터 신라에 귀속된 것이다
) 『日本書紀』 欽明 2年 4月條.
(전략)恐致卓淳等禍, 非新羅自强故, 所能爲也. 其啄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爾狹小, 不能卒備, 不
知所託, 由是見亡. 其卓淳, 上下携貳, 主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日本書紀』 欽明 5年 3月條에도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전략)夫啄國之滅, 匪由他也, 啄國之函跛旱岐, 貳心加羅國, 以內應新羅, 加
羅自外合戰, 由是滅焉, 若使函跛旱岐, 不爲內應, 啄國雖少, 未必亡也. 至於
卓淳, 亦復然之, 假使卓淳國王, 不爲內應新羅招寇, 豈至滅乎. 歷觀諸國敗亡
之禍, 皆由內應貳心人者.(후략)
라고 하였으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관국(金官國, 駕洛國), 안라(安羅, 阿羅加耶), 대가야(大加耶)는 각각 신라에 의하여 각개적으로 통합되었으며, 이들의 나라가 신라에 병합되는 과정에서 상호 구원을 하거나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바는 없다.
한편 신라의 가야제국에 대한 통합은 무력에만 의존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외교적 수단을 통하여 가야 각국의 내분을 조장하기도 하고,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대응하여 가야제국을 보호하여 주는 듯한 외교전략을 통하여 자발적인 투항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 金官國(南加羅)의 투항이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며, 남부가야제국의 멸망시기
에 있어서 신라가 외교적으로 회유를 하였던 사실은 『日本書紀』에 산견된다.
欽明 2年 7月에 (백제왕은) 安羅日本府인 河內直이 신라와 내통하고 있음을
심히 책망하였고, 欽明 5年 2月에 (백제왕)이 듣건데 신라는 매년 봄 가을로
군사를 모아 安羅와 荷山을 공략하고 加羅를 공략하기도 하였다. (중략) 的臣
등(吉備弟君臣 河內直)이 신라에 왕래하였다. (중략) 他國의 옷(新羅의 官服)
을 입고 매일 같이 신라 땅에 들어가 공사로 왕래하였다'라고 하여 신라가 가
야통합을 위하여 무력적 압력과 외교적 회유를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田中俊明<大加耶聯盟の興亡と 任那'>(吉川弘文館,1992) 260~262 쪽에
의하면 대가야가 친신라파(于勒)와 친백제파로 내분되었던 것이 멸망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于勒은 대가야의 멸망에 앞서 신라에 투항하였던
바, 이에 대한 신라의 회유를 추측하여 볼 수 있을 듯하다.
반면에 신라와 가야제국의 외교기사에 보이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5세기 중엽 가라국(加羅國)의 남제(南齊)에 대한 외교형식은 獻'으로 표기되는 사대관계(事大關係)였으나, 신라 역시 중국에 대하여는 동일한 외교형식을 취하였다.
둘째, 고구려.백제.신라 사이의 외교기사에 獻'의 용례는 전혀 보이지 않으나, 貊國.于山國이 신라에 대해 獻'의 외교형식을 취하였음에 비하여, 가야제국의 대신라 외교기사에 獻'의 용례는 단 한 건도 보이지 않는다. 가야제국의 신라에 대한 통상적인 외교형식이 이들과 같은 사대관계는 아니었으며, 삼국간의 외교형시과 동일한 것이었다.
셋째, 가야제국이 신라에 대하여 白雉' 등의 토산물을 보내었던 사실에 대해 신라측은 獻'이 아닌 送'의 형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이 신라가 보낸 토산물에 대하여 獻' 또는 貢'으로 표기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넷째, 送'의 용례는 백제와 신라, 또는 신라와 왜 사이에 토산물의 수수(授受)를 중심으로 행하여졌던 외교형식을 나타낸다. 백제와 신라, 또는 신라와 왜의 통상적인 외교형식이 대등한 관계였다고 한다면, 가야제국과 신라 사이에 보이는 送'의 외교형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請罪.請救.請和.請婚' 등과 같이 표현되었던 가야제국과 신라간의 외교형식은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백제, 신라와 왜의 사이에서도 각각 확인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삼국사기』가 가야제국과 신라간의 외교형식을 어떻게 인식하였던가에 대한 고찰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가야제국과 신라간의 외교를 이렇게 인식하였던 배경으로 편찬 이전까지 존재하였던 「구삼국사(舊三國史)」나 「해동고기(海東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 등과 같은 고기류(古記類)들을 참고로 하였음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가야제국의 외교기사를 편찬자들에 의한 창작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외교형식에 대한 기술들도 신라와 가야제국의 외교실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本記」나 왜측의 『日本書紀』는 번거로울 정도로 각각의 국명을 나열하고 있다.
이들의 기술이 東部의 가야제국과 西部의 가야제국을 구별하고 있음은 물론,
「繼體紀」는 東部의 가야제국을 金官.背伐.安多.委陀(多多羅.須那羅.和多.費
智)로, 「欽明紀」는 東部의 가야제국을 南加羅.啄己呑.卓淳으로, 西部의 가야
제국을 安羅.加羅.卒麻.散半奚.多羅.斯二岐.子他 등으로 각각 구분.기술하고
있다.
더구나 이와 같은 가야제국의 나열이 단순히 가야의 국명을 나열하였던 것이
아니고, 가야제국이 신라나 백제를 대상으로 전개하였던 전쟁과 외교의 기술
에서 보인다고 하는 것은 강력한 盟主의 존재가 상정될 만한 加耶聯盟體'가
아니라 해당의 시기에 각기 다른 목적에서 이합집산을 되풀이 하였던 가야제
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欽明 23年 正月條에는 新羅가 任那官家를 打滅하였다.<一本에는 21年에 任
那가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총칭하여 任那라고 하며, 별도로는 加羅國.安羅國
.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으로 합하여 十國이
된다>'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는 가야제국이 동시에 멸망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여러 단계에 거쳐 신라에 의하여 통합되었던 가야제국
을 여기에 묶어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조에 백제의 성왕이 가야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탁순(卓淳)등이 화(禍)를 당한 것은 신라가 강해서 만은 아니다. 탁기탄(啄己呑)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위치하여 매년 공격을 받았는데도 임나(任那)가 구원하지 못하여 망한 것이며, 남가라(南加羅)는 신라에 대비하지 않고 도리어 의탁하였던 고로 망하였으며, 탁순(卓淳)은 상하가 분열되어 안으로 부터 신라에 귀속된 것이다
) 『日本書紀』 欽明 2年 4月條.
(전략)恐致卓淳等禍, 非新羅自强故, 所能爲也. 其啄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爾狹小, 不能卒備, 不
知所託, 由是見亡. 其卓淳, 上下携貳, 主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日本書紀』 欽明 5年 3月條에도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전략)夫啄國之滅, 匪由他也, 啄國之函跛旱岐, 貳心加羅國, 以內應新羅, 加
羅自外合戰, 由是滅焉, 若使函跛旱岐, 不爲內應, 啄國雖少, 未必亡也. 至於
卓淳, 亦復然之, 假使卓淳國王, 不爲內應新羅招寇, 豈至滅乎. 歷觀諸國敗亡
之禍, 皆由內應貳心人者.(후략)
라고 하였으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관국(金官國, 駕洛國), 안라(安羅, 阿羅加耶), 대가야(大加耶)는 각각 신라에 의하여 각개적으로 통합되었으며, 이들의 나라가 신라에 병합되는 과정에서 상호 구원을 하거나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바는 없다.
한편 신라의 가야제국에 대한 통합은 무력에만 의존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외교적 수단을 통하여 가야 각국의 내분을 조장하기도 하고,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대응하여 가야제국을 보호하여 주는 듯한 외교전략을 통하여 자발적인 투항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 金官國(南加羅)의 투항이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며, 남부가야제국의 멸망시기
에 있어서 신라가 외교적으로 회유를 하였던 사실은 『日本書紀』에 산견된다.
欽明 2年 7月에 (백제왕은) 安羅日本府인 河內直이 신라와 내통하고 있음을
심히 책망하였고, 欽明 5年 2月에 (백제왕)이 듣건데 신라는 매년 봄 가을로
군사를 모아 安羅와 荷山을 공략하고 加羅를 공략하기도 하였다. (중략) 的臣
등(吉備弟君臣 河內直)이 신라에 왕래하였다. (중략) 他國의 옷(新羅의 官服)
을 입고 매일 같이 신라 땅에 들어가 공사로 왕래하였다'라고 하여 신라가 가
야통합을 위하여 무력적 압력과 외교적 회유를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田中俊明<大加耶聯盟の興亡と 任那'>(吉川弘文館,1992) 260~262 쪽에
의하면 대가야가 친신라파(于勒)와 친백제파로 내분되었던 것이 멸망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于勒은 대가야의 멸망에 앞서 신라에 투항하였던
바, 이에 대한 신라의 회유를 추측하여 볼 수 있을 듯하다.
반면에 신라와 가야제국의 외교기사에 보이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5세기 중엽 가라국(加羅國)의 남제(南齊)에 대한 외교형식은 獻'으로 표기되는 사대관계(事大關係)였으나, 신라 역시 중국에 대하여는 동일한 외교형식을 취하였다.
둘째, 고구려.백제.신라 사이의 외교기사에 獻'의 용례는 전혀 보이지 않으나, 貊國.于山國이 신라에 대해 獻'의 외교형식을 취하였음에 비하여, 가야제국의 대신라 외교기사에 獻'의 용례는 단 한 건도 보이지 않는다. 가야제국의 신라에 대한 통상적인 외교형식이 이들과 같은 사대관계는 아니었으며, 삼국간의 외교형시과 동일한 것이었다.
셋째, 가야제국이 신라에 대하여 白雉' 등의 토산물을 보내었던 사실에 대해 신라측은 獻'이 아닌 送'의 형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이 신라가 보낸 토산물에 대하여 獻' 또는 貢'으로 표기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넷째, 送'의 용례는 백제와 신라, 또는 신라와 왜 사이에 토산물의 수수(授受)를 중심으로 행하여졌던 외교형식을 나타낸다. 백제와 신라, 또는 신라와 왜의 통상적인 외교형식이 대등한 관계였다고 한다면, 가야제국과 신라 사이에 보이는 送'의 외교형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請罪.請救.請和.請婚' 등과 같이 표현되었던 가야제국과 신라간의 외교형식은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백제, 신라와 왜의 사이에서도 각각 확인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삼국사기』가 가야제국과 신라간의 외교형식을 어떻게 인식하였던가에 대한 고찰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가야제국과 신라간의 외교를 이렇게 인식하였던 배경으로 편찬 이전까지 존재하였던 「구삼국사(舊三國史)」나 「해동고기(海東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 등과 같은 고기류(古記類)들을 참고로 하였음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가야제국의 외교기사를 편찬자들에 의한 창작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외교형식에 대한 기술들도 신라와 가야제국의 외교실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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