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일성남즉사-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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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봄날 성 남쪽에서 본대로 읊조리다

2.잠에서 깨어나

3.춘 일

4.강 남 곡

5.취객에게 보내는 시

6.자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7. 한식

8.사청사우 -개었나 했더니 또 비가 오네-

9.소양정

10.철 령

11.독 좌

12.제천정

13.김시습의 <무 제>

14.팔월십오야

15.정도전

16.선사사에서

17.효망

18.권필

19.보천탄즉사

본문내용

이미 전사한지 오래인데 그 사실을 모른 아내는 겨울옷을 짓느라 깊은 밤 다듬이질을 하는 정경을 묘사하였다. 지은이의 감정이 절제된 채 객관적인 묘사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정을 드러낸 것보다 더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에 와닿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전화가 덜 미친 호남을 몇 차례 여행을 했다. 그 때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寶泉灘卽事
金 宗 直
桃花浪高幾尺許(도화랑고기척허) 복사꽃 뜬 냇물 얼마나 불었는고,
石沒頂不知處(한석몰정부지처) 솟은 바위 아주 묻혀 짐작 어려워.
兩兩 失舊磯(양냥노자실구기) 쌍쌍의 가마우지 옛 터전 잃어
啣魚却入菰蒲去(함어각입고포거) 물고기 입에 문 채 풀섶에 드네.
- 畢齋集 19卷-
교감
石(한석) : 石. 國朝詩刪·箕雅·大東詩選에는 '銀石'으로 되어있음.
1. 註
(1) 寶泉灘(보천탄) : 냇물의 이름, 경북 善山에 있음.
(2) 桃花浪高(도화랑고) : 복사꽃이 떠 있는, 물결이 높아.
(3) 幾尺許(기척허) : 몇 자쯤인가? 그 몇 척인가? 즉 (냇물이) 몇 척이나 불었는가?
(4) 石(한석) : 石. 中國 潤州 甘露寺에 있던 양(羊)모양의 돌로 그 위에서 孫權과 劉備가 함께 曺操를 도모하였다 함.
(5) 沒頂(몰정) : 꼭대기도 물에 잠겨.
(6) 不知處(부지처) :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겠다.
(7) 兩兩(양냥) : 둘씩. 두 마리의. 또는 새울음 소리를 묘사한 의성어로 볼 수도 있다.
(8) (노자) : 가마우지. 여러 시에서 題材로 등장함. 金時習의 「山行卽事」에서도 를 통하여 詩想을 전개함.
(9) 啣魚(함어) : 고기를 입에 물고
(10) 舊磯(구기) : 옛 터전. 磯에는 낚시터라는 뜻이 있으므로 石과 같은 의미이다.
(11) 却入(각입) : 돌아 들어가다.
(12) 菰蒲(고포) : 줄풀과 부들. 수초(水草).
2. 感想
김종직의 '寶泉灘卽事' 2수 중 첫째 수로 칠언 절구이다. 起句와 承句에서 상황의 변화를 부각시킨 후, 轉句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가마우지가 삶의 터전을 잃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結句에서 물고기를 입에 문 채 풀섶에 든다고 하여, 비록 옛 터전을 잃기는 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시류(時流)에 영합하지도 않는 인고(忍苦)의 곧은 삶의 정신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가마우지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대상이다.
자연에 대한 사색적인 묘사만으로는 시의 의미가 너무 약하게 마련이다. 그 자연을 통하여 인생을 말하고 세상살이를 진정하게 표현할 때, 그 시는 情이 살아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이 시는 단순한 자연의 사실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냇물이 많이 흐르지 않았을 때는 솟아 있던 바위가, 물이 물어나니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역사 속에 묻혀 버리는 수많은 사건들이 절로 상기된다. 이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의 변동은 평화를 방해하고 관습을 훼방한다. 정든 보금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변화 속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바꾸어 말하면 생존을 위한 치열한 활동은 차라리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인의 눈에 비친다. 가마우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역사를 인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곧은 정신을 본다. 이 시는 옛날을 회고하면서 현실을 조망하는 날카로운 시각을 느끼게 한다.
3. 金宗直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
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季渟)·효관(孝關). 호 점필재(米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교리(校理)·감찰(監察)·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米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4. 金宗直의 詩論
김종직의 시론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경술을 하는 선비는 문장을 못하고 문장을 하는 선비는 경술에 어둡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그렇지 않다. 문장이라는 것은 경술에서 나오는 것이니, 경술이 곧 문장의 근본이다. 초목에 비유하자면 뿌리 없이 어찌 가지와 잎사귀의 남은 빛이 있고 꽃과 열매의 성함이 있겠는가? 시경, 서경 등의 육예는 모두 경술이며, 시, 서나 육예의 글은 곧 그 문장이다. 진실로 능히 그 문장을 말미암아서 그 이치를 궁구하며 정밀하게 살펴나가고 넉넉히 젖어 들면, 이치와 문장이 나의 가슴에 융합되고 모여든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발현되어 언어와 사부를 하는 데서 저절로 공교함을 바라지 않고서도 공교해진다. 예부터 문장으로 시대에 이름이 나서 후세에 전해진 사람은 이와 같았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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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3.18
  • 저작시기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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