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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제 목 :
□ 총 페이지수 : 90
□ 목 차:
한국건축사의 이해
제 1장. 한국 건축사 서설
제 2장. 한국 전통건축의 특성과 전통의 계승
제 3장. 한국 건축사의 개설
제 4장. 한국 전통건축의 구성요소
제 5장. 한국의 주거건축
제 6장. 한국의 불사건축
제 7장. 한국의 탑파건축
제 8장. 한국의 유교건축
제 9장. 한국의 성곽건축
제10장. 한국의 누정건축
제11장. 풍수지리설의 개념
제12장. 전남지방건축의 특성
제13장. 고건축 조사방법
□ 총 페이지수 : 90
□ 목 차:
한국건축사의 이해
제 1장. 한국 건축사 서설
제 2장. 한국 전통건축의 특성과 전통의 계승
제 3장. 한국 건축사의 개설
제 4장. 한국 전통건축의 구성요소
제 5장. 한국의 주거건축
제 6장. 한국의 불사건축
제 7장. 한국의 탑파건축
제 8장. 한국의 유교건축
제 9장. 한국의 성곽건축
제10장. 한국의 누정건축
제11장. 풍수지리설의 개념
제12장. 전남지방건축의 특성
제13장. 고건축 조사방법
본문내용
형을 살펴 볼 수 있
는 사례가 극히 적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장성의 필암서원은 역
사성이 있는 도학서원으로 건축적으로 풍부한 공간구성과 함께 10여동
의 전각을 갖춘 이 지역 최고의 서원이다. 이 서원은 완전히 평탄한
지역에 입지한 서원으로 영남의 도산.도동.옥산.병산서 원 등과는 공
간적 조성 측면에서 구별이 된다. 한편 이 서원에서 한가지 주목 되는
사실은 강학구역내의 "전당후재"형식이다. 즉, 동재와 서재가 제향구
역쪽 에 위치하고 있어 이 지역 향교건축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 이는 비록 사학과 관학이라는 차이점은 있으나 같은 유교건축이라
는 측면에서 향교건축과 맥을 같이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이 지
역 유림들의 건축에 대한 공통성 의 문제로 일단 이해 할 수 있다. 영
남의 병산.도산.남계.도동.옥산.서악서원 등은 역시 그 지역 향교건축
의 조영규범과 같은 "전재후당"형을 취하고 있다. 17-18세기에 주로
문중 중심으로 건립된 이 지역의 수 많은 서원.사우는 주 로 20세기에
들어 옛터 내지 새로운 자리에 복원된 유적들로 전시대의 건축물 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러한 유적은 별도의 기준과 시각으로 정리되
어야 할 것이다. 연구과정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실증적 자료의 부
족으로 유교나 사회사적 변동에 따른 조영규범의 변화를 추이해 볼 수
가 없는 점이였다. 가령 사액서원 과 비사액서원 간에, 또는 남인계
서원과 서인-노론계 서원간의 차이점 등이 그 것이엇다. 복원 유적에
대하여는 그간 필자의 조사 결과로는 어떠한 구별도 찾아 볼 수 없었
다.
(3) 재각
호남지역의 재실건축은 우선 건물구성이 단순하고 (강당,문간채,고직
사 등) 배치 유형도 강당 정면에 문간채가 들어서는 "一자형" 구조이
다. 이상과 같은 건축유형은 예를들어 경북지방의 절대적 조영규범이
라 할 수 있는 "가자형"구 조와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호남지역에서
는 일반 가옥 유형은 재실건축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재실은 조선
후기에서도 서원의 남설기인 17-18세기에 가장 많이 건립된 유적 으로
이시기의 씨족마을 확대, 사족가문의 결속 등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도
관 련이 깊다고 하겠다. 앞에서 건축사례로 들은 해남의 영모당과 추
원당은 당시 해남 윤씨 문중 특유의 개별성이 돋보이는 유적이며, 장
흥 장천재, 담양 죽림
재, 영암 집영재 등은 본래 출발이 정사나 서당으로 조영되어 후에 재실이 된
유적들이다.
註>
1) 羅州향교 기문, {향교중수기} (1839 년)
2) 綾州향교 기문, {향교주수기} (1872 년)
3) 珍島향교 기문, {교궁중수기} (1898 년)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 대백과사전 12권, p10
5) 이해준,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국민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p19,
6) 문헌비고, 서원가고, 호남읍지, 전고대방, 열읍원우 사적 등 객관적으로
검증이 될 수 있는 관찬적인 성격의 자료중에서 어느 한곳이라도 등재된 전남
지역의 서원.사우 수임.
* 사마재 설치(조선 후기. 1829년 재건) * 호남지역 향교중 85%정도가
이 유형(전학후묘)으로 조영 서원은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16세기가
효시이며 건립의 초창기라 할수 있 는 명종대에 만도 20여개소의 서원
건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선조대를 거쳐 17세기에도 계속적인
증가일로에 있다가 숙종 년간에는 그 건립이 최고조 에 달해 무려 전
국에 340개소의 서원건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사우
는 설립목적이나 기능, 명칭상에서 서원과 그 성격이 크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데 서원이 養育人才와 斯文振興에 목적을 두고 藏
修講學의 기능을 담당하였음에 반하여 사우의 경우는 이러한 교육적
기 능보다는 報本崇賢의 祀賢에 더욱 큰 비중이 있었다. 그러나 17세
기 후반기 이후부터 院 祠는 모두 양반이 사회적 기능을 유지 보강하
려는 같은 목표를 가 진 것이었으므로 점차 그 엄격한 구별이 무너져
갔다.
한편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문중적인 서원의 성격이 비교적 잘
드러 나는 지역이라는 점이다. 즉 전라지역의 향촌사회는 조선후기 노
론정권이나 남인세력의 거점확보를 위한 공략과 경쟁이 치열했던 곳이
면서, 嶺南 畿湖地域 의 도학적인 학맥중심의 연결과 달리 충절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문중기반의 지 속이 돋보여지는 곳이다. 조선후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지위를 유 지한 전남지역의 유력성씨들은
자진들의 사족적 특성을 대체로 <世祖의 王位簒 奪-己卯士禍-倭亂,胡
亂,忠節>로 연계시켜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각 성씨 들은 대개
그들의 조선전기 入鄕治祖를 조선개국이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 하
는 입장의 절의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己卯士禍期에 성립한 사림학맥
에서 왜 란과 호란기에 충절인물을 다수 배출하였음을 내세운다. 그리
고 이들에 대한 국가의 포장정책이 숙종-정조대에 집중되면서, 또 붕
당정치기에 서인-노론계 세력의 집요한 잠식으로 이 지역의 문중세력
들은 문중의 이해를 선점하고자 경 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조선후기 농업생산력 발전과 관련하여 새로운 경제세력의 성장이
예견 되고, 그들에 의한[門中書院]건립활동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 선후기의 농업생산력 발전과 함께 영산강과 탐진강, 섬
진강 등을 연한 扇狀개 활지가 많은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사족들의 경지 확대를 통한 경제 력 증대가 용이했던 지역이었다는 점
이다. 즉 농지의 평야 저지대확산은 새로 운 농지를 중심으로 생활권
을 형성하는 신흥세력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 이고, 이 과정에
서 조선 전기 이래 사족가문들이 지녔던 사회경제적 지위가 도 전받거
나 전도될 여지가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새롭게 성장하는
신 흥세력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타 가문과의 우위권 경쟁을
전개하는 과 정에서 자체 문중조직의 기반강화 내지 정치권력과의 연
계가 필요했고, 전남지 방의 특징적인 [門中書院]의 건립경향은 바로
그러한 필요를 반영하면서 유용 하게 활용되었던 결과로 보여지는 것
이다.5)
다음으로 표3은 院 祠에 主享으로 모신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院 祠
건립 의 인적환경
는 사례가 극히 적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장성의 필암서원은 역
사성이 있는 도학서원으로 건축적으로 풍부한 공간구성과 함께 10여동
의 전각을 갖춘 이 지역 최고의 서원이다. 이 서원은 완전히 평탄한
지역에 입지한 서원으로 영남의 도산.도동.옥산.병산서 원 등과는 공
간적 조성 측면에서 구별이 된다. 한편 이 서원에서 한가지 주목 되는
사실은 강학구역내의 "전당후재"형식이다. 즉, 동재와 서재가 제향구
역쪽 에 위치하고 있어 이 지역 향교건축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 이는 비록 사학과 관학이라는 차이점은 있으나 같은 유교건축이라
는 측면에서 향교건축과 맥을 같이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이 지
역 유림들의 건축에 대한 공통성 의 문제로 일단 이해 할 수 있다. 영
남의 병산.도산.남계.도동.옥산.서악서원 등은 역시 그 지역 향교건축
의 조영규범과 같은 "전재후당"형을 취하고 있다. 17-18세기에 주로
문중 중심으로 건립된 이 지역의 수 많은 서원.사우는 주 로 20세기에
들어 옛터 내지 새로운 자리에 복원된 유적들로 전시대의 건축물 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러한 유적은 별도의 기준과 시각으로 정리되
어야 할 것이다. 연구과정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실증적 자료의 부
족으로 유교나 사회사적 변동에 따른 조영규범의 변화를 추이해 볼 수
가 없는 점이였다. 가령 사액서원 과 비사액서원 간에, 또는 남인계
서원과 서인-노론계 서원간의 차이점 등이 그 것이엇다. 복원 유적에
대하여는 그간 필자의 조사 결과로는 어떠한 구별도 찾아 볼 수 없었
다.
(3) 재각
호남지역의 재실건축은 우선 건물구성이 단순하고 (강당,문간채,고직
사 등) 배치 유형도 강당 정면에 문간채가 들어서는 "一자형" 구조이
다. 이상과 같은 건축유형은 예를들어 경북지방의 절대적 조영규범이
라 할 수 있는 "가자형"구 조와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호남지역에서
는 일반 가옥 유형은 재실건축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재실은 조선
후기에서도 서원의 남설기인 17-18세기에 가장 많이 건립된 유적 으로
이시기의 씨족마을 확대, 사족가문의 결속 등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도
관 련이 깊다고 하겠다. 앞에서 건축사례로 들은 해남의 영모당과 추
원당은 당시 해남 윤씨 문중 특유의 개별성이 돋보이는 유적이며, 장
흥 장천재, 담양 죽림
재, 영암 집영재 등은 본래 출발이 정사나 서당으로 조영되어 후에 재실이 된
유적들이다.
註>
1) 羅州향교 기문, {향교중수기} (1839 년)
2) 綾州향교 기문, {향교주수기} (1872 년)
3) 珍島향교 기문, {교궁중수기} (1898 년)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 대백과사전 12권, p10
5) 이해준,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국민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p19,
6) 문헌비고, 서원가고, 호남읍지, 전고대방, 열읍원우 사적 등 객관적으로
검증이 될 수 있는 관찬적인 성격의 자료중에서 어느 한곳이라도 등재된 전남
지역의 서원.사우 수임.
* 사마재 설치(조선 후기. 1829년 재건) * 호남지역 향교중 85%정도가
이 유형(전학후묘)으로 조영 서원은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16세기가
효시이며 건립의 초창기라 할수 있 는 명종대에 만도 20여개소의 서원
건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선조대를 거쳐 17세기에도 계속적인
증가일로에 있다가 숙종 년간에는 그 건립이 최고조 에 달해 무려 전
국에 340개소의 서원건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사우
는 설립목적이나 기능, 명칭상에서 서원과 그 성격이 크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데 서원이 養育人才와 斯文振興에 목적을 두고 藏
修講學의 기능을 담당하였음에 반하여 사우의 경우는 이러한 교육적
기 능보다는 報本崇賢의 祀賢에 더욱 큰 비중이 있었다. 그러나 17세
기 후반기 이후부터 院 祠는 모두 양반이 사회적 기능을 유지 보강하
려는 같은 목표를 가 진 것이었으므로 점차 그 엄격한 구별이 무너져
갔다.
한편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문중적인 서원의 성격이 비교적 잘
드러 나는 지역이라는 점이다. 즉 전라지역의 향촌사회는 조선후기 노
론정권이나 남인세력의 거점확보를 위한 공략과 경쟁이 치열했던 곳이
면서, 嶺南 畿湖地域 의 도학적인 학맥중심의 연결과 달리 충절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문중기반의 지 속이 돋보여지는 곳이다. 조선후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지위를 유 지한 전남지역의 유력성씨들은
자진들의 사족적 특성을 대체로 <世祖의 王位簒 奪-己卯士禍-倭亂,胡
亂,忠節>로 연계시켜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각 성씨 들은 대개
그들의 조선전기 入鄕治祖를 조선개국이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 하
는 입장의 절의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己卯士禍期에 성립한 사림학맥
에서 왜 란과 호란기에 충절인물을 다수 배출하였음을 내세운다. 그리
고 이들에 대한 국가의 포장정책이 숙종-정조대에 집중되면서, 또 붕
당정치기에 서인-노론계 세력의 집요한 잠식으로 이 지역의 문중세력
들은 문중의 이해를 선점하고자 경 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조선후기 농업생산력 발전과 관련하여 새로운 경제세력의 성장이
예견 되고, 그들에 의한[門中書院]건립활동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 선후기의 농업생산력 발전과 함께 영산강과 탐진강, 섬
진강 등을 연한 扇狀개 활지가 많은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사족들의 경지 확대를 통한 경제 력 증대가 용이했던 지역이었다는 점
이다. 즉 농지의 평야 저지대확산은 새로 운 농지를 중심으로 생활권
을 형성하는 신흥세력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 이고, 이 과정에
서 조선 전기 이래 사족가문들이 지녔던 사회경제적 지위가 도 전받거
나 전도될 여지가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새롭게 성장하는
신 흥세력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타 가문과의 우위권 경쟁을
전개하는 과 정에서 자체 문중조직의 기반강화 내지 정치권력과의 연
계가 필요했고, 전남지 방의 특징적인 [門中書院]의 건립경향은 바로
그러한 필요를 반영하면서 유용 하게 활용되었던 결과로 보여지는 것
이다.5)
다음으로 표3은 院 祠에 主享으로 모신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院 祠
건립 의 인적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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