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논
Ⅱ. 본 논
1. 도엽묵재에 다음 말이 있다
2. 촌사옥수의 이퇴계서초
Ⅲ. 좌등직방의 이퇴계 존신에 관하여
Ⅳ. 결 논
Ⅱ. 본 논
1. 도엽묵재에 다음 말이 있다
2. 촌사옥수의 이퇴계서초
Ⅲ. 좌등직방의 이퇴계 존신에 관하여
Ⅳ. 결 논
본문내용
지 않는다. 여여숙도 程門이 되어서 볼 만한 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朱子에서는 黃勉齋, 蔡九峰이 확실이 동좌이다. 그 밖에 문턱에 와 앉았던 사람으로는 吳伯豊 같은 이가 한 두 사람 있었다고 할까(吳心大, 字伯豊, 戊申己酉問答을 기록함. 朱子가 그의 守居治事皆方有를 칭찬하고 있다. 문집53 「答劉季昌書曰…吳伯豊死, 吾道不幸, 遽失此人. 餘子紛紛 有毛髮利害」).
薛文淸은 眞儒로는 보이나, 볼 만한 데가 빠져 있는 것은 어쩐 셈인
가. 그 밖에는 한 사람도 그 주변에 바라볼 만한 사람이 없다.
··· ···· ··· ···· ··
조선의 李退溪는 확실히 동좌이다. 程門의 상좌에 위치할는지도 모른다. 堯舜 이래의 동좌를 헤아려 봐도 정말 겨우 몇 사람 뿐이다.
(10) 中庸의 無聲無臭를 해설하고, 그 理를 아는 사람은 李退溪이다 고 함.
-529-
藏錄續拾遺제3, 永井行達所錄에,
그런데 無聲無臭(중용장구 33『上天之載無聲無臭』)의 箇所를 잘 터득한 사람은, 朱門에서도 黃勉齋, 蔡九峰의 두 사람이다. 그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조선의 李退溪는 확실히 터득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薛文淸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떨는지 염려스럽다. 성인이란 딴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달린 사람이다.(생각컨대 理氣妙合을 말한다.) 이 경지를 잘 터득하는 사람조차 없는데, 이 경지에 이르러 태극과 하나로 된다는 것은 정말 참 어려운 일이다.
(11)『自省錄』을 읽은 直方의 감상. 李退溪는 진정 도를 자득한 사람.
藏錄續拾遺 제4, 酒井修敎記錄(上總道學의 기초를 닦은 사람. 享保 12년 成東大橋를 수리하기 위하여 郡牧의 主簿인 修敎는 이 지역에 왔다. 好學의 청년을 발굴하여, 稻葉迂齋의 문인인 修敎는, 和田儀丹, 鈴木養察의 두 명을 迂齋의 문인에 儒學시켰다. 후에 迂齋의 아들 默齋가 上總의 땅에 들어 오게 된 연유로도 된다.)에,
聖學의 蓄은 맹자의 몰후 漢唐간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宋朝에 이르러 周程張朱의 四子가 그 온축을 계발했다. 이를테면, 漢唐의 儒者는 酢(초)와 醬油(간장)라는 이름은 알고 있어도, 짠 것인지 단 것인지 그 까닭도 알지 못한다. 宋朝에 이르러 四子가 맛을 혀로 잘 핥아 깨닫고, 酢는 시다고 하고 醬油는 짜다고 했으나, 죄다 핥아 깨닫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蔡九峰, 黃勉齋 등이 핥아 깨닫고 한 말이 있다. 薛文淸이 독서록을 음미하여 각성한 바 있는 듯 쓰여져 있으나,
일원(일원이라 쓴다. 더욱이이니 한결같이이니의 뜻으로서 밑에 부정
··· ···· ·· ··
어가 온다.) 음미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李退溪가 지은 自省
·· ·· ··· ··· ·· ··· ···
錄을 보니, 이것은 맛보고 씹어 깨달은 것이다. 그 밖에는 좋으니 짜니 시니 하고 말을 해도, 귀로만 듣고 알았을 뿐이고 실제로 씹어서 먹어 보고 깨달은 것은 없다. 이 맛은 핥아 깨달아도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自得의 學이 아닌 증거)
이제, 학자는 四子의 말을 먼저 귀로 들어 깨닫고, 더욱 진입하면 거기에서 맛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中古의 현인이 핥아 봤느니 않았느니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말 통속적인 말로써 흥미진진한 비유를 써서, 道學의 묘를 설파한 점, 과연 直方이 아니면 볼 수 없는 言說이다.
-530-
(12) 直方이 편집한 「王學辯集」에 맨 먼저 李退溪의 글을 기재하고 있는 일.
直方이 편집한 「王學辯集」은, 왕양명이 논박한 李退溪, 林鳶峰, 山崎闇齋, 佐藤直方, 三宅尙齋 등의 논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의 直方의 序는, 直方선생 일대의 문학이라고 默齋는 평하고 있다. 이 책은 맨 먼저 李退溪文集傳習錄論辯曰하고 그 문장을 게재하고 있으나, 이제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다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소개만 하고 그친다.
(13) 朱子탄생시 紫氣云云에 관하여.
藏錄續拾遺 제1에,
朱子행장에 朱子 탄생시, 낡은 우물에서 紫雲이 오르고 있었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일을 李退溪가 쓴 것은 좋지 못하다. 기묘한 이야기이다. 성현이 태어날 때 이 기묘한 일이 있다면 어느 성현이 태어날 때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딴 성현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때마침 紫雲이 올라 왔을게다고 해두는 것이 좋다.
퇴계 이황 「朱子行狀輯註」를 검토해 보면,
-531-
一統志 源有韋齋井, 相傳, 先生生時井口有紫氣.
고 있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로서, 그만큼 존숭하는 李退溪에 대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죄다 드러내고 덮어 주지 않는다. 여기에 또한 直方 一流의 설법을 볼 수 있다.
Ⅳ. 結 論
直方 및 그 門流에 있어서 李退溪에 대한 존신이 어떠하였던가는 이상으로써 다해진 것은 아니나, 그 존신이 깊었다는 것은 밝혀졌으리라고 생각된다. 「答南時甫」 書中의 어구에 관한 直方의 이해, 특히 心氣 상에 있어서의 順境, 逆境의 설은 내면으로부터 보다 깊숙이 李退溪의 생각에 당도했는 것으로 생각한다. 直方은 진정 李退溪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 說述한 것 가운데 존신을 이야기해 주는 설을 하나 둘 摘出하여 결어로 삼는다.
默齋曰…小也의 朱子(默齋壎 錄).
直方曰…李退溪의 학문은 薛文淸보다 앞서 있다(直方先生學話). 李退溪 東夷之産, 而悅中國之道, 尊孔孟 宗程朱, 而其學諸之所造, 大非元明諸儒之 矣(註論筆記). 山崎闇齋에 관해서는, 我邦儒學正派之道儒唱也(註論筆記)라 말한다. 直方 또 가로되, 李退溪之後, 欲負荷此道者吾未聞其人焉(冬至文), 조선의 李退溪는 확실히 동좌이며 程門의 상좌에 위치할는지도 모른다(中庸書說). 중용의 無聲無臭의 箇所를 깨달은 사람이다. 李退溪는 확실히 깨달았다고 보인다(永井行達所錄). 李退溪가 쓴 自省錄을 보니 이것은 맛보고 씹어서 깨달은 것이다(酒井修敎).
저 「冬至文」은, 直方門流에 있어서는, 道學의 宗旨로서 또 그 비결로서 매년 동지일에는 이것을 강론함으로써, 학맥을 근엄하게 하여 금일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冬至文 속에, 「李退溪之後, 欲負荷此道者, 吾未聞其人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존신의 지극한 것이라고, 필자 스스로 깊이 감명을 받고 있는 바이다. 이로써 결어로 삼는다.
-532-
(김 기 태 譯)
朱子에서는 黃勉齋, 蔡九峰이 확실이 동좌이다. 그 밖에 문턱에 와 앉았던 사람으로는 吳伯豊 같은 이가 한 두 사람 있었다고 할까(吳心大, 字伯豊, 戊申己酉問答을 기록함. 朱子가 그의 守居治事皆方有를 칭찬하고 있다. 문집53 「答劉季昌書曰…吳伯豊死, 吾道不幸, 遽失此人. 餘子紛紛 有毛髮利害」).
薛文淸은 眞儒로는 보이나, 볼 만한 데가 빠져 있는 것은 어쩐 셈인
가. 그 밖에는 한 사람도 그 주변에 바라볼 만한 사람이 없다.
··· ···· ··· ···· ··
조선의 李退溪는 확실히 동좌이다. 程門의 상좌에 위치할는지도 모른다. 堯舜 이래의 동좌를 헤아려 봐도 정말 겨우 몇 사람 뿐이다.
(10) 中庸의 無聲無臭를 해설하고, 그 理를 아는 사람은 李退溪이다 고 함.
-529-
藏錄續拾遺제3, 永井行達所錄에,
그런데 無聲無臭(중용장구 33『上天之載無聲無臭』)의 箇所를 잘 터득한 사람은, 朱門에서도 黃勉齋, 蔡九峰의 두 사람이다. 그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조선의 李退溪는 확실히 터득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薛文淸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떨는지 염려스럽다. 성인이란 딴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달린 사람이다.(생각컨대 理氣妙合을 말한다.) 이 경지를 잘 터득하는 사람조차 없는데, 이 경지에 이르러 태극과 하나로 된다는 것은 정말 참 어려운 일이다.
(11)『自省錄』을 읽은 直方의 감상. 李退溪는 진정 도를 자득한 사람.
藏錄續拾遺 제4, 酒井修敎記錄(上總道學의 기초를 닦은 사람. 享保 12년 成東大橋를 수리하기 위하여 郡牧의 主簿인 修敎는 이 지역에 왔다. 好學의 청년을 발굴하여, 稻葉迂齋의 문인인 修敎는, 和田儀丹, 鈴木養察의 두 명을 迂齋의 문인에 儒學시켰다. 후에 迂齋의 아들 默齋가 上總의 땅에 들어 오게 된 연유로도 된다.)에,
聖學의 蓄은 맹자의 몰후 漢唐간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宋朝에 이르러 周程張朱의 四子가 그 온축을 계발했다. 이를테면, 漢唐의 儒者는 酢(초)와 醬油(간장)라는 이름은 알고 있어도, 짠 것인지 단 것인지 그 까닭도 알지 못한다. 宋朝에 이르러 四子가 맛을 혀로 잘 핥아 깨닫고, 酢는 시다고 하고 醬油는 짜다고 했으나, 죄다 핥아 깨닫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蔡九峰, 黃勉齋 등이 핥아 깨닫고 한 말이 있다. 薛文淸이 독서록을 음미하여 각성한 바 있는 듯 쓰여져 있으나,
일원(일원이라 쓴다. 더욱이이니 한결같이이니의 뜻으로서 밑에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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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온다.) 음미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李退溪가 지은 自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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錄을 보니, 이것은 맛보고 씹어 깨달은 것이다. 그 밖에는 좋으니 짜니 시니 하고 말을 해도, 귀로만 듣고 알았을 뿐이고 실제로 씹어서 먹어 보고 깨달은 것은 없다. 이 맛은 핥아 깨달아도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自得의 學이 아닌 증거)
이제, 학자는 四子의 말을 먼저 귀로 들어 깨닫고, 더욱 진입하면 거기에서 맛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中古의 현인이 핥아 봤느니 않았느니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말 통속적인 말로써 흥미진진한 비유를 써서, 道學의 묘를 설파한 점, 과연 直方이 아니면 볼 수 없는 言說이다.
-530-
(12) 直方이 편집한 「王學辯集」에 맨 먼저 李退溪의 글을 기재하고 있는 일.
直方이 편집한 「王學辯集」은, 왕양명이 논박한 李退溪, 林鳶峰, 山崎闇齋, 佐藤直方, 三宅尙齋 등의 논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의 直方의 序는, 直方선생 일대의 문학이라고 默齋는 평하고 있다. 이 책은 맨 먼저 李退溪文集傳習錄論辯曰하고 그 문장을 게재하고 있으나, 이제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다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소개만 하고 그친다.
(13) 朱子탄생시 紫氣云云에 관하여.
藏錄續拾遺 제1에,
朱子행장에 朱子 탄생시, 낡은 우물에서 紫雲이 오르고 있었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일을 李退溪가 쓴 것은 좋지 못하다. 기묘한 이야기이다. 성현이 태어날 때 이 기묘한 일이 있다면 어느 성현이 태어날 때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딴 성현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때마침 紫雲이 올라 왔을게다고 해두는 것이 좋다.
퇴계 이황 「朱子行狀輯註」를 검토해 보면,
-531-
一統志 源有韋齋井, 相傳, 先生生時井口有紫氣.
고 있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로서, 그만큼 존숭하는 李退溪에 대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죄다 드러내고 덮어 주지 않는다. 여기에 또한 直方 一流의 설법을 볼 수 있다.
Ⅳ. 結 論
直方 및 그 門流에 있어서 李退溪에 대한 존신이 어떠하였던가는 이상으로써 다해진 것은 아니나, 그 존신이 깊었다는 것은 밝혀졌으리라고 생각된다. 「答南時甫」 書中의 어구에 관한 直方의 이해, 특히 心氣 상에 있어서의 順境, 逆境의 설은 내면으로부터 보다 깊숙이 李退溪의 생각에 당도했는 것으로 생각한다. 直方은 진정 李退溪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 說述한 것 가운데 존신을 이야기해 주는 설을 하나 둘 摘出하여 결어로 삼는다.
默齋曰…小也의 朱子(默齋壎 錄).
直方曰…李退溪의 학문은 薛文淸보다 앞서 있다(直方先生學話). 李退溪 東夷之産, 而悅中國之道, 尊孔孟 宗程朱, 而其學諸之所造, 大非元明諸儒之 矣(註論筆記). 山崎闇齋에 관해서는, 我邦儒學正派之道儒唱也(註論筆記)라 말한다. 直方 또 가로되, 李退溪之後, 欲負荷此道者吾未聞其人焉(冬至文), 조선의 李退溪는 확실히 동좌이며 程門의 상좌에 위치할는지도 모른다(中庸書說). 중용의 無聲無臭의 箇所를 깨달은 사람이다. 李退溪는 확실히 깨달았다고 보인다(永井行達所錄). 李退溪가 쓴 自省錄을 보니 이것은 맛보고 씹어서 깨달은 것이다(酒井修敎).
저 「冬至文」은, 直方門流에 있어서는, 道學의 宗旨로서 또 그 비결로서 매년 동지일에는 이것을 강론함으로써, 학맥을 근엄하게 하여 금일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冬至文 속에, 「李退溪之後, 欲負荷此道者, 吾未聞其人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존신의 지극한 것이라고, 필자 스스로 깊이 감명을 받고 있는 바이다. 이로써 결어로 삼는다.
-532-
(김 기 태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