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퇴계의 사상과 행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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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 -이퇴계 연구회 설립의 취지

Ⅱ. 이퇴계의 생애와 사상
1. 약전
2. 사람됨과 생활태도
3. 시문·서법
4. 퇴계학의 성격과 역사적 지위

Ⅲ. 저서

Ⅳ. 일본 유학의 발전과 이퇴계

Ⅴ. 좌등직방파의 이퇴계 존신

Ⅵ. 이퇴계의 철학적 수양론과 일본 유학

본문내용

의 사상을 통하여 明治의 교육방침의 확립에까지 간접적이나마 연관을 가졌다. 元田永孚는 明治천황 20세 때 侍講으로서 천황의 절대적으로 큰 신임을 받아 歐化주의 全盛의 明治 초년에 日本의 교육방침을 시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 원전이 일찍이 「程朱의 학은 朝鮮의 李退溪에 전하고, 退野선생이 退溪所撰의 『朱子書節要』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다. 이제 내가 退野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今上天皇에 바쳤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明治 12년에 明治천황은 元田에게 명하여 「敎學大旨」를 필록케 하여 「교학의 要는 仁義忠孝를 밝히고 그 위에 知識才藝를 다하는 것이 전통의 가르침이다」라고 하고 또 「도덕의 학은 孔子를 주로 하여 사람마다 성실품행을 존중하고 그런 위에 각 과의 학을 힘쓴다면 道德才藝 本末全備하여 우리 나라 독립의 정신에 있어 宇內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교육은 어디까지나 도덕 修身을 기본으로 하여야 할 것이 설명되어 있다. 이것이 뒤의 敎育勅語의 연원이 된 것으로 明治 초년의 西歐流의 공리주의, 실천주의적인 교육방침을 일변케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 明治 19년, 東京대학에 行幸하였을 때에도 서구의 학술을 강구할 뿐 수신을 오로지 하는 和漢의 고전을 강구하지 않으면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政事治安의 道」를 알아 「들어와 相이 될 만한 인재를 육성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元田은 이것을 「聖諭記」로서 기록하였다. 和漢의 고전을 修身을 주로 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서구의 학술과 구별한 점에 주의하여야만 하며, 거기에 학문의 목표를 어디까지나 도의 眞知實踐에 두는 道學파의 주장과 일맥의 관련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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稻葉默齋의 李退溪觀
그런데 이상과 같은 明治 天皇, 元田永孚의 제언은 歐化主義 全盛의 明治 초년에는 획기적인 제언이었으나, 지금 이것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의견으로 특히 진기한 의견은 아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아 李退溪의 학설에 대해 생각해 보면 李退溪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고 있을 뿐으로 특별히 珍稀한 說이 있는 것은 아니다. 稻葉默齋는 李退溪를 明代의 『讀書錄』의 저자 薛文淸과 비교하여 「李退溪에는 각별히 눈에 새로운,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것과 같은 언설도 없고 平實明白한 것을 平實明白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그 가운데 자연히 묘미가 있고 친절한 바가 있다. 이 점이 薛文淸보다 위대한 곳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고인은 「평생 마음이 이 道」라고도 「庸言을 말하고 庸行을 행한다」라고도 하고 있다. 李退溪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또 默齋는, 「李退溪는 한 평생 성인을 목표로 수양하고 쓰러질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말하자면 걸어가면서 쓰러진 것과 같은 사람으로 孔門의 顔淵과 같다. 그러므로 모범이 된다.」라고도 하고 있다. 그리하여 「孔子를 배우려고 하면 朱子를 배우라, 朱子를 배우려고 하면 李退溪를 안내자로 하라, 그리하여서만이 道의 把持處가 생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 稻葉迂齋이 개설한 朱書節要課會라고 하는 讀書會 겸 修養會를 계속하여 열었다. 그 課會의 규약이 오늘에 전하고 있는데 이 회는 매일 早朝에 일어나 李退溪의 『朱子書節要』를 한 장, 혹은 한 절을 읽고 특히 매월 1일과 15일에는 예복을 입고서 節要의 서문과 발문을 완미하고, 월 1회 날을 정해서 회합하여 의문점을 토론한다든가, 또는 서로의 과실을 서로 講하는 약속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회합이 千葉縣의 成東, 東金의 地區에 昭和의 십 수년까지 계속되어 행하여졌다. 또 冬至日에는 「李退溪의 뒤로 아직 이 도를 負荷하고자 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라는 일구가 들어 있는 佐藤直方의 冬至文를 읽는 회합이 그럭저럭이기는 하나 현재에도 아직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李退溪의 마음이 佐藤直方, 稻葉默齋을 통하여 日本에 살아 있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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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李退溪의 철학적 修養學은 어디까지나 근본을 배양하는 것을 목표삼는 것으로 孔子나 朱子의 마음과 행동을 배워 자기를 반성수양하는 실천학이다. 朱子의 여러 가지 학설을 이론만으로 배워 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山崎闇齋는 「이론만에 정신이 팔리면 도는 평생 보이지 않는다.」라고 갈파하고, 李退溪의 『朱子行狀註』나 『朱子書節要』를 통하여 朱子의 마음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배울 것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한, 그러나 따뜻한 본래성과 그 깊이에 있는 천지의 생생발랄한 생명력을 독실하게 믿어 인간을 순화해서 어떠한 곤란이나 유혹에도 지지 않는 확고한 道義心을 확립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闇齋는 그 기반에 서서 나아가 朱子의 正名主義를 발전시켜 日本의 명분을 바로잡아야 할 것을 주장하여 특히 日本의 國體에 맞추어 尊王論을 주창하였다. 闇齋派의 주장이 맥맥히 후세에 전하여 明治維新의 사상적 一大 원류가 되었던 것은 철저하게 근본을 배양하는 道學을 이어 받고 게다가 道學을 日本화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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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재건은 도덕의 재건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또 「이 道가 일어나면 이 나라가 일어나고, 이 道가 쇠하면 이 나라가 쇠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도덕의 재건도, 이 도의 진흥도 결국 각자가 특히 지도자가 수양을 힘써 스스로에 도덕을 재건하여 이 도를 차차 주위의 사람들에게 미루어 넓히는 것 말고는 다른 적당한 방법이 없다. 이것이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이다. 퇴계의 「言行通述」에 李退溪의 心事를 기술하여 「근본을 배양하고 사림을 扶植하는 것을 當今의 急務로 삼는다.」라고 하고 있는데 사림 즉 당시의 지식인, 엘리트의 다툼을 鎭定하고 도의심을 확립할 것을 先務로 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재건을 위해서도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孔子의 도를 밝히고 근본의 배양을 역설한 李退溪의 마음을 더 한층 정밀하게 연구하고, 수양법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이것을 세계에 밝힐 필요를 통감하는 바이다. 시간 관계상 설명이 불충분하였으나 상세한 것은 나의 저서 논문에서 보완하여 주신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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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0페이지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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