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없음
본문내용
상의 이해를 물리치고, 참으로 본령을 터득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本領은 仁義禮智의 性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로부터 성현이 사람에게 지시하신 性命의 理를 사람의 마음에 固有하고 있다고까지는 알고서도, 진실로 고유하고 있음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본심의 感發에 느끼어 참으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마음에 진실로 理會한 것이 본령의 理會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理會할 때에는, 세간의 窮理 得失 榮辱 등의 일체의 外欲을 실로 度外의 일로 생각하여 절대로 이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다. 이런 경지에서 舜何人, 我何人의 뜻이 脫然히 일어나 이 학문에 딱 들어맞고 日用事實의 위에 나아가 致知力行의 수행이 되는 것이다(遺稿, 944頁).
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退野도 마찬가지여서
「所謂爲己者, 欲得于己焉. 故於其初, 身外之事, 榮衰休戚毁譽得喪, 一切置之度外, 不容其心, 而當見其在己者爲何物. 旣知在己者爲何物, 則如飢食渴飮, 不可有絲毫爲人之意也. 如此而始可共學道矣.(孚齋存稿1, 喩友, 肥文叢, 600頁)」
라고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退野, 小楠이 退溪와 일체가 되어서 본령의 정립에 성실하게 탐구하고 있는 모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小楠의 실학은, 우선 먼저 진심을 會得하고 본령을 터득한다는 주체적 자각의 학문이었습니다. 따라서 小楠에 있어서는 학문이란 方寸의 수행이고, 그리고 그같은 방촌의 양심을 擴充하여 日用사물 위에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539-
「학문의 뜻(義)은 어떠한 것인가. 나의 마음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고인의 이른바 學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면, 완전히 나의 方寸(마음)의 수행이다. 양심을 확충하고 일용사물의 위에서 功을 쓰게 되면, 전부가 學이 아닌 것이 없다. 부자 형제 부부의 사이로부터 군주를 섬기고, 친구와 사귀고, 현자에 가까이 하고, 대중을 사랑하는 것이다. 百工技藝農商의 사람과 서로 말하고, 山河草木鳥獸에 이르기까지 그 일에 卽하여 그 理를 解하고, 그 위에 책을 읽어 고인의 事歷成法을 생각하고 義理의 무궁함을 알고 孜孜히 쉬지 않고 우리 마음을 날로 靈活하게 한다. 이것이 곧 학문이요, 修行이다. ……후세의 학자는 일용의 위에서 깨달음이 없이, 오직 책에만 나아가 理會한다. 이것은 고인의 배워야 할 것이 아니고, 이른바 고인의 노예라고 하는 자이다.(遺稿, 932쪽)」
그리하여 여기에는 朱子 大學或問에 있어서의 窮理의 중시가 보여집니다.
小楠에 있어서의 體認窮理의 學은, 學校問答書에서는 修己治人·學政一致·朋友講學·文武兼修로 되고, 나아가 仁義, 忠誠, 誠意에 근거한 文武一途論이 전개되고, 또 天地仁義의 大道에 근거한 夷虜應接 大意로 되어 大國의 恣意를 허용하지 않는 國防論을 서술하고, 陸兵問答書에서는 어떻게 서양의 銃砲術器械를 섭취해 나가느냐는 데에 변증법적인 사색도 보여, 일본 근대화의 선구적 역할을 한 양상이 보여집니다. 다만
「堯舜으로 하여금 當世에 살게 한다면 서양의 砲艦器械百工의 精과 기술의 功이 빨리 그 功用을 다하여 당세를 경론하고 공부를 넓혀 주실 것이, 서양이 미칠 바가 아니다. ……三代治道의 格物에 비해 宋儒의 格物은 그 뜻이 이르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一草一木 모두 理가 있으니 모름지기 이것을 格하여야 한다고 들리기는 하나, 이것도 초목이 生殖을 완수하여 민생의 用에 달하는 것과 같은 격물로는 생각되지 않고, 무엇에도 理를 궁구하여서의 격물로 들린다.(遺稿, 沼山閑話, 923쪽)」
에 보이듯이 窮理技術의 문제를 堯舜 3대에 연관시켜서, 혹은 서양의 민주주의를 찬미하여 「워싱턴」을 서양의 堯舜이라 하고, 宋儒의 窮理學을 「理를 연구하여서의 格物」이라 하고 있는 부분은, 제가 구명한 바의 朱子의 궁리학의 성격에서 따져 본다면, 아무래도 小楠의 인식 부족의 면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러나 아마도 서양의 충격이 대단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540-
小楠의 감화를 받은 元田永孚 선생은
「程朱의 學은 조선의 李退溪에게 전하고, 退野 선생이 그(李退溪) 所撰의 朱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가 있다. 나는 이제 退野의 學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에게 奉上하였다.(小楠傳上, 所引 元田永孚)」
라고 하여 程朱―退溪―退野으로 전하여지는 학통 아래서 明治의 교육방침을 정립하였습니다. 例의 敎育勅語는 인륜의 理法의 실현과 문명기술의 섭취를 설하여 세계 평화를 염원한 것으로서 결코 침략주의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상에 말한 바,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하는 理學心學을 마음의 고향으로 하여 연구를 진전시켜 나갈 것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江戶시대에 수용된 퇴계의 體認自得의 學은 우리 일본의 전통으로 되고 있습니다. 다만 太極論, 理氣論 같은 순수철학에 속하는 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아부길웅 선생 이외에는 별로 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일본에서는 충분히 해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일찍이 『朱子의 사상형성』을 완성한 나 자신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우선, 퇴계를 비롯하여 그 주변을 탐구하고, 퇴계의 사상은 어떻게 전개하였으며, 붕우 문인과는 어떻게 교류하였는지를 구명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계를 알기 위하여는 그 전후좌우의 對者를 알지 않으면 아니되고, 이같은 방법―즉 제가 朱子를 분석한 방법―을 사용하여 한국 성리학의 심오함을 理解體得해서 현대의 조류 속에 우리의 전통 사상을 유입시키는 역할을 다하고자 생각하는 바입니다. 퇴계의 「無極而太極」 「理發氣發」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제까지 思索體認하고 있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거의가 이제까지의 和刻本에 의하고 있었던 터여서 의문이 잔뜩 남아 있습니다. 저는 一老學徒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정주학에 있어서의 의리의 體認 실천과 학문 窮理의 情熱에 있어서는 朱, 李, 大, 橫, 元의 諸先生에 배워서, 쓰러진 뒤에 그친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541-
이것을 기회로 한국에 있어서의 諸賢의 敎示를 염원하여 마지 않습니다. 퇴계에 관계가 있는 七絶 두 수를 읊고 본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丙辰歲晩
得失窮通都付天 求眞致察豈難全
西齋歲盡鍾聲到 默坐澄心自酒然
丁巳訪韓
退翁心學夙東傳 往世儒先稱厥賢
欲訪振鈴鳴鐸地 飛鵬忽到溪陽天
「本領은 仁義禮智의 性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로부터 성현이 사람에게 지시하신 性命의 理를 사람의 마음에 固有하고 있다고까지는 알고서도, 진실로 고유하고 있음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본심의 感發에 느끼어 참으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마음에 진실로 理會한 것이 본령의 理會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理會할 때에는, 세간의 窮理 得失 榮辱 등의 일체의 外欲을 실로 度外의 일로 생각하여 절대로 이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다. 이런 경지에서 舜何人, 我何人의 뜻이 脫然히 일어나 이 학문에 딱 들어맞고 日用事實의 위에 나아가 致知力行의 수행이 되는 것이다(遺稿, 944頁).
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退野도 마찬가지여서
「所謂爲己者, 欲得于己焉. 故於其初, 身外之事, 榮衰休戚毁譽得喪, 一切置之度外, 不容其心, 而當見其在己者爲何物. 旣知在己者爲何物, 則如飢食渴飮, 不可有絲毫爲人之意也. 如此而始可共學道矣.(孚齋存稿1, 喩友, 肥文叢, 600頁)」
라고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退野, 小楠이 退溪와 일체가 되어서 본령의 정립에 성실하게 탐구하고 있는 모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小楠의 실학은, 우선 먼저 진심을 會得하고 본령을 터득한다는 주체적 자각의 학문이었습니다. 따라서 小楠에 있어서는 학문이란 方寸의 수행이고, 그리고 그같은 방촌의 양심을 擴充하여 日用사물 위에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539-
「학문의 뜻(義)은 어떠한 것인가. 나의 마음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고인의 이른바 學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면, 완전히 나의 方寸(마음)의 수행이다. 양심을 확충하고 일용사물의 위에서 功을 쓰게 되면, 전부가 學이 아닌 것이 없다. 부자 형제 부부의 사이로부터 군주를 섬기고, 친구와 사귀고, 현자에 가까이 하고, 대중을 사랑하는 것이다. 百工技藝農商의 사람과 서로 말하고, 山河草木鳥獸에 이르기까지 그 일에 卽하여 그 理를 解하고, 그 위에 책을 읽어 고인의 事歷成法을 생각하고 義理의 무궁함을 알고 孜孜히 쉬지 않고 우리 마음을 날로 靈活하게 한다. 이것이 곧 학문이요, 修行이다. ……후세의 학자는 일용의 위에서 깨달음이 없이, 오직 책에만 나아가 理會한다. 이것은 고인의 배워야 할 것이 아니고, 이른바 고인의 노예라고 하는 자이다.(遺稿, 932쪽)」
그리하여 여기에는 朱子 大學或問에 있어서의 窮理의 중시가 보여집니다.
小楠에 있어서의 體認窮理의 學은, 學校問答書에서는 修己治人·學政一致·朋友講學·文武兼修로 되고, 나아가 仁義, 忠誠, 誠意에 근거한 文武一途論이 전개되고, 또 天地仁義의 大道에 근거한 夷虜應接 大意로 되어 大國의 恣意를 허용하지 않는 國防論을 서술하고, 陸兵問答書에서는 어떻게 서양의 銃砲術器械를 섭취해 나가느냐는 데에 변증법적인 사색도 보여, 일본 근대화의 선구적 역할을 한 양상이 보여집니다. 다만
「堯舜으로 하여금 當世에 살게 한다면 서양의 砲艦器械百工의 精과 기술의 功이 빨리 그 功用을 다하여 당세를 경론하고 공부를 넓혀 주실 것이, 서양이 미칠 바가 아니다. ……三代治道의 格物에 비해 宋儒의 格物은 그 뜻이 이르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一草一木 모두 理가 있으니 모름지기 이것을 格하여야 한다고 들리기는 하나, 이것도 초목이 生殖을 완수하여 민생의 用에 달하는 것과 같은 격물로는 생각되지 않고, 무엇에도 理를 궁구하여서의 격물로 들린다.(遺稿, 沼山閑話, 923쪽)」
에 보이듯이 窮理技術의 문제를 堯舜 3대에 연관시켜서, 혹은 서양의 민주주의를 찬미하여 「워싱턴」을 서양의 堯舜이라 하고, 宋儒의 窮理學을 「理를 연구하여서의 格物」이라 하고 있는 부분은, 제가 구명한 바의 朱子의 궁리학의 성격에서 따져 본다면, 아무래도 小楠의 인식 부족의 면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러나 아마도 서양의 충격이 대단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540-
小楠의 감화를 받은 元田永孚 선생은
「程朱의 學은 조선의 李退溪에게 전하고, 退野 선생이 그(李退溪) 所撰의 朱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가 있다. 나는 이제 退野의 學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에게 奉上하였다.(小楠傳上, 所引 元田永孚)」
라고 하여 程朱―退溪―退野으로 전하여지는 학통 아래서 明治의 교육방침을 정립하였습니다. 例의 敎育勅語는 인륜의 理法의 실현과 문명기술의 섭취를 설하여 세계 평화를 염원한 것으로서 결코 침략주의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상에 말한 바,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하는 理學心學을 마음의 고향으로 하여 연구를 진전시켜 나갈 것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江戶시대에 수용된 퇴계의 體認自得의 學은 우리 일본의 전통으로 되고 있습니다. 다만 太極論, 理氣論 같은 순수철학에 속하는 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아부길웅 선생 이외에는 별로 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일본에서는 충분히 해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일찍이 『朱子의 사상형성』을 완성한 나 자신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우선, 퇴계를 비롯하여 그 주변을 탐구하고, 퇴계의 사상은 어떻게 전개하였으며, 붕우 문인과는 어떻게 교류하였는지를 구명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계를 알기 위하여는 그 전후좌우의 對者를 알지 않으면 아니되고, 이같은 방법―즉 제가 朱子를 분석한 방법―을 사용하여 한국 성리학의 심오함을 理解體得해서 현대의 조류 속에 우리의 전통 사상을 유입시키는 역할을 다하고자 생각하는 바입니다. 퇴계의 「無極而太極」 「理發氣發」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제까지 思索體認하고 있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거의가 이제까지의 和刻本에 의하고 있었던 터여서 의문이 잔뜩 남아 있습니다. 저는 一老學徒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정주학에 있어서의 의리의 體認 실천과 학문 窮理의 情熱에 있어서는 朱, 李, 大, 橫, 元의 諸先生에 배워서, 쓰러진 뒤에 그친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541-
이것을 기회로 한국에 있어서의 諸賢의 敎示를 염원하여 마지 않습니다. 퇴계에 관계가 있는 七絶 두 수를 읊고 본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丙辰歲晩
得失窮通都付天 求眞致察豈難全
西齋歲盡鍾聲到 默坐澄心自酒然
丁巳訪韓
退翁心學夙東傳 往世儒先稱厥賢
欲訪振鈴鳴鐸地 飛鵬忽到溪陽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