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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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도산서당

2. 농운정사

4. 진도문

5. 상덕사

6. 전교당

7. 한존재와 동서재

8. 광명실

9. 장판각

본문내용

서적, 유묵 등등이다.
11. 洌井과 淨友塘
도산서당 남쪽에 조그만 우물이 있다. 물이 맑고 물맛이 좋아 음료수로 쓰기에 적합하므로 퇴계선생은 이 우물을 洌井이라고 불렀다.
선생의 四言詩에 <書堂之南, 石井甘洌>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 표현된 우물이 바로 洌井이다.
그리고 퇴계선생은 도산서당 앞에 조그만 연못을 파놓고, 이 연못의 이름을 淨友塘이라고 불렀다.
선생이 지은 陶山記에 나오는 <淨友塘>이 바로 이 연못을 지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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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蒙泉과 節友社
정우당 동쪽 산 기슭에 조그만 샘물이 있다. 퇴계선생은 이 샘물 이름을 <蒙泉>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周易에 <산 위에서 솟아나는 샘을 蒙이라고 부른다>는 글귀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고 퇴계는 蒙泉 위의 산 기슭에 조그만 花壇을 만들어 놓고 그 곳에 매화와 대나무, 소나무, 국화 등 각종 꽃과 상록수를 가꾸기를 좋아 했는데 이 화단 이름을 節友社라고 불렀다. 절우사에 관한 유래도 陶山記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
13. 谷口巖과 石澗臺
옛날 낙동강 기슭을 따라 도산서당으로 들어가는 길목(洞口) 좌우편 산 기슭이 자연의 山門처럼 되어 있었으므로 퇴계선생은 이 산문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을 谷口巖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곡구암>이라는 이름은 옛날 漢나라의 隱士인 鄭子眞의 <耕於谷口>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곡구암에서 큰 길을 따라 3백미터 쯤 떨어진 곳에 큰 石臺가 있는데 퇴계선생은 이것을 石澗臺라고 명명하였다.
이 석간대에는 퇴계선생이 멀리서 온 제자 龜巖 李禎과 작별할 때 이곳에서 唐詩 한 구절을 읊은 일이 있었기에, 지금도 암벽에는 <君去春山誰共遊, 鳥啼花落水空流>(그대 가니 누구와 더불어 이 봄을 노닐고, 새울고 꽃은 떨어져 물만 홀로 흐르네)로 시작되는 그 시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안동댐이 건설된 후 출입구가 바뀌어지면서 외진 유적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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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天淵臺와 雲影臺
서당 입구 谷口巖을 중심으로 양편 산 기슭이 강에 임해 절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퇴계선생은 그 중복을 다듬어 臺를 만들어 놓고, 동쪽대를 天淵臺, 서쪽대를 雲影臺라고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천연대라는 이름은 중용에 나오는 <鳶飛戾天 魚躍于淵>(수리는 하늘에 날고 고기는 못에서 뛴다)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고, <운영대> 역시 中庸의 <天光雲影共徘徊>(햇빛과 구름이 그림자와 함께 배회한다)는 글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15. 濯纓潭과 盤陀石
옛날 낙동강 상류 黃池에서 흘러내리던 강물이 陶山書堂이 있는 산 언덕 밑에 이르러 커다란 沼(호수)를 이루어 한결 운치를 돋구었으며 퇴계선생은 그 소를 濯纓潭이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濯纓>이라는 두 글자는 屈原이 지은 漁夫辭에 나오는 <滄浪之水 淸兮濯纓>(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탁영담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물속에 잠겨있어 강물이 불어 날 때면 모습을 감추었다가 물이 줄어들면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그 바위를 盤陀石이라 불렀다.
퇴계선생은 일찍이 이 반타석을 두고 시를 지은 바도 있다. 그러나 안동댐이 완성되면서 濯纓潭과 盤陀石은 수중에 매몰되어 이제는 그 모습을 영원히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6. 試士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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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댐이 완성되고 나서 도산서원 앞 옛 강변은 호수가 되어 버렸다.
그 호수 한 복판에 조그만 섬이 있고 그 섬 위에는 작은 碑閣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試士壇이라 부른다.
이 비각은 정조 임금 때인 1792년 퇴계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閣臣(李晩秀)을 보내 이곳에서 실시한 과거시험, 즉 陶山別科 시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례적으로 실시된 도산별과는 당시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와 경향 각지의 禮俗을 크게 변모시켰는데, 영남 일대만은 유생들의 저항으로 그 영향을 전연 받지 않았으므로 정조 임금은 그것을 <先正之德化> 덕택이라고 믿고 도산서원에 제문을 친히 지어 보내고, 아울러 영남 일대의 선비들의 사기를 돋구어 주기 위해 퇴계선생의 유적지인 이곳에서 도산별과를 보게 하는 특전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때의 성전을 기념하기 위해 단을 만들고 비를 세웠는데, 당초에는 서원 건너편 강 언덕에 세워졌던 것을 안동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옛 그 자리에 섬을 만들어 다시 重修하게 된 것이다.
시사단에 새겨진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이고 정치가이던 樊巖 蔡濟恭선생이 지었는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陶水洋洋 其上也壇 壇有階級
水有淵源 登壇臨水 觸類而律
先生之化 聖主之德>
(도산물은 양양하게 흐르는데, 그 위에 단이로다. 단에는 계급이 있고, 물에는 근원이 있나니, 단에 올라 물어 임해 뿌리를 따라 뜻을 펴노니, 모두가 선생의 덕화요 임금의 은혜로다.)
17. 寒棲菴
門人錄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寒棲菴은 陶山書堂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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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은 지금의 宗宅 건너 동편 산 기슭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주로 그곳에서 독서와 정양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건물을 寒棲菴이라고 불렀으며 한서암에는 공부하는 방인 靜習堂과 幽貞門이라는 출입문이 있었다.
퇴계선생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이곳에서 기거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출입이 빈번했던 유서깊은 곳이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건물이 모두 破落하여 지금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서암 인근에 위치하던 퇴계 宗宅은 선생 서거 후 세차례나 신축하고 증축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본래의 종택 뜰에는 光影塘이라는 연못이 있었으며 연못 한가운데에는 彈琴石이라 불리우는 바위가 있었는데 탄금석은 아직도 옛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
18. 退溪先生 墓所
퇴계선생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토계동 芝山 남쪽 산봉우리 위에 위치한다.
문인록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선생의 遺戒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은 정부 방침에 의하여 오늘날의 국장인 禮葬으로 치루어졌으나 성현의 묘소로서는 초라한 편이다.
이는 선생의 遺戒에 따라 神道碑나 儀物 등을 일체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묘비만을 세워두었기 때문이다.
묘비의 뒷면에는 선생의 自銘과 門人 奇高峯이 지은 墓碣文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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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30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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