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사 기독교 사상이 서양철학에 미친 영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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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교부철학
2. 스콜라 철학

내용미리보기
중세철학은 기독교의 신앙과 계시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 철학이다.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체로 하여 성립하였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다.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 즉 구약성서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적 종교인데, 이 율법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 율법은 유대인의 풍속과 습관 위에 .....

본문내용

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신의 존재도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주위에 있는 사물들이 다(多)요, 우연이요, 혼합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요, 필연적이요, 형이상학적으로 단순한 궁극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창조, 영혼의 불멸같은 것 또한 논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리의 논증에 대해서 비판적인 그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했다. 즉 그는 양자의 일치 내지 상보관계를 강조하지 않고 철학은 이론적인 것이고 신학은 실천적인 것으로 각기 분야를 달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양자를 분리시킨 그는 철학자가 자연적인 것이라고 시인하는 것을 신학자는 죄악적인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고까지 했다.
이렇듯 스코투스가 지식과 신앙, 철학과 신학을 분리시키는 방향에로 흐르게 된 것은 그의 주의설이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활동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지 선악 간의 아무런 이유에도 의거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의 이성은 신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다만 신의 계시를 신앙심을 가지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게 된다. 스코투스 자신은 이 점을 명백히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이런 방향에로 귀착할 수 밖에 없고, 또 역사적 사실이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2.3 후기 스콜라 철학
14세기 이후의 후기 스콜라 철학의 특색은 유명론의 부흥, 신학과 철학의 분리, 그리고 이로 인한 스콜라 철학의 붕괴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철학자는 윌리암 오캄인데 그에 있어서 스콜라 철학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1] 윌리암 오캄
오캄은 영국 오캄지방에서 출생하여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약 2년간 그 대학 교수직에 있었다. 1322년 교황 요한 22세는, 프란치스꼬 교단에서 주장한 완전한 무소유의 상태가 구도자의 올바른 길이라는 주장을 이단이라고 선언했는데, 오캄은 그것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324년에는 당시 교황이 망명해 가 있던 프랑스 동남부에 있는 아비뇽에 소환되어 옥스포드를 떠났다. 1328년 피서로 도망하여 동년 6월에는 파문되었다. 1330년 이후 루드비히왕의 보호하에 뮌헨에 있는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흑사병으로 서거했다. 그의 철학은 주로 윤리학과 자연철학에 관한 것이었으나 교권에 대한 그의 공격 또한 유명하다. 뮌헨 수도원에서 그는 「황제여! 그대는 검으로써 나를 보직하고 나는 붓으로써 그대를 지키겠노라」고 유명한 말로써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둔스 스코투스의 개물을 중시하는 경향은, 한때 사실과는 달리, 그의 직접 제자였다고 생각되던 오캄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조되어 유명론은 다시 세력을 펴게 되었다. 그는 개물만이 유일한 실재요 보통은 개물에 앞서거나 또는 개물 속에 존재하지도 않고 다만 개념에 지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오캄은 우리의 지성은 개물에 공통된 성질 즉, 보편적인 것만을 알 수 있다는 추상적 지식론에 반대하고 우리는 대상으로서의 개물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여 직각적 지식을 추상적 지식과 대립시켰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인식의 대상은 개체이지 보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물의 직접적 지각은 아니고, 우리 의식에 떠오른 외물의 표상은 외물의 모사가 아니라 그 기호이며 따라서 개념은 기호의 기호로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외물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는 하나 외물 자체를 알 수는 없고, 다만 그 속성들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외물에 관한 지식보다는 우리 자신의 의한 내용에 관한 지식이 더욱 확실한 것이다. 외물을 직접적 지각을 통해서 아는 외적 지식이나 또 자신의 의식 내용을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아는 외적 지식이거나 모두가 경험에 입각한 것인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오캄의 이러한 지식론은 후에 영국에서 경험론이 일어나는데 주요한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감가의 대상인 개물은 그 자체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성질·상태를 따라서 그 존재를 직접 알 수 있으나, 감각의 대상 아닌 신은 어떤가? 이 세계의 원인으로서의 신을 알 수가 있다고 하나,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개체와 개체 사이에 일어나는데 갑의 원인이 을인 경우 우리는 을을 분석·검토함으로써 갑을 찾아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직각적 지식에 의해서 갑을 알고 있을 때, 갑과 을을 관계지어 갑은 을의 원인이라고 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고 또 삼위일체니 천지창조니 하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캄은 앞선 철학자들의 존재에 관한 증명들은 모두가 신은 존재할 것이다 하는 개연성에 지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신의 불가지적인 것인즉 신을 그 기초적인 지식으로 삼는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학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이 학문으로서 성립되지 못한다면 종교도 따라서 성립되지 못하는가? 이 문제에 대서 오캄은 지식과 신앙을 엄격히 구별하는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나타낸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자가 수긍할 수 없는 진리가 종교가에 대해서는 진리일 수가 있고, 종교가가 수긍할 수 없는 것이 철학자에게는 진리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성적 인식과 초이성적 게시에 의한 인식을 구별함으로써 나타났던 이중 진리에 관한 생각이 가장 선명하게 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서는 양자가 서로 상하의 관계에 있었으나 오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다른 분야로 분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캄도 양자가 서로 모순 대립되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지식과 신앙을 조화시켜 철학을 가지고 종교를 辨識하다가 도리어 종교문제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리하여 지식과 신앙·철학과 종교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또 이리하여 지식과 신앙의 조화를 꾀하던 스콜라 철학이 오캄에 이르렀다.
오캄에 의하면 종교와 철학이 전연 개별의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국가도 완전히 분리되어 교권이 정치사회 등 세속적인 문제에 간섭함은 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또한 국가는 개인이 자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루는 집단이라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민약설의 선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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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6.02
  • 저작시기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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