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말
2. 불교와 고대 인도사회의 여성관
1) 고대 인도사회의 전통적 여성관
2) 여성의 출가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장
3. 불교계의 여성 인식과 그 의미
1) 부파 및 초기 대승불교의 반여성적 사상
2) 대승불교의 친여성적 사상
4. 맺음말
*한글97
2. 불교와 고대 인도사회의 여성관
1) 고대 인도사회의 전통적 여성관
2) 여성의 출가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장
3. 불교계의 여성 인식과 그 의미
1) 부파 및 초기 대승불교의 반여성적 사상
2) 대승불교의 친여성적 사상
4. 맺음말
*한글97
본문내용
불론(女性卽身成佛論)을 불교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법화경》 〈법사품〉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멸도한 이후에 남 몰래 한 사람을 위해 《법화경》의 한 구절이라도 설하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바로 여래의 사도요, 여래가 보내어 여래의 일을 한 사람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설법자를 선남자 선여인으로 보고 있다. 《법화경》에서는 설법자를 법사(法師)라 부르기도 하고 보살(菩薩)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이것은 여성이 교단 내에서 남성의 보조자가 아니라 법을 설하는 주체자이자 실천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팔리 증지부에는 한역 아함경과는 달리 ‘선남자 선여인’이란 호칭을 쓰지 않고 ‘선여인 선남자’라며 여성을 먼저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대승교단 안에 여성이 실제로 상당히 많았으며 남성 못지 않게 활발히 활동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후에 대승불교 교단이 인도 사회에 정착하자 여성성불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직접적으로 여성성불을 주장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여성즉신성불론이다. 여성의 몸 그대로 성불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이 사상의 핵심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성 인식을 가장 잘 계승한 불교의 완벽한 여성론이라 할 수 있다. 《유마경》과 《승만경》 같은 중기 대승경전에는 여성의 몸으로 직접 성불하는 천녀와 승만부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마경》에서 천녀는 수행의 가르침을 주어야 할 성문승 사리불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남녀의 차별은 없으며 실로 공한 것이라는 심오한 이치를 말한다.
이렇게 사리불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수행정진하여 성불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승만경》에도 승만부인이 대승보살도의 구현에 의해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나타난다. 여기서 승만부인은 당래에 수기를 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대신해 법을 설하는 설법자이다.
후에 《승만경》은 이러한 면모 때문에 여래장사상의 근간이 되면서 계층과 성에 구애되지 않는 모든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대승불교는 대승경전에 보이는 여성즉신성불론을 통하여 부처님의 친여성적 인식 태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계층과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새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며 창의적인 친여성 문화를 주도해 갔던 것이다.
4. 맺음말
고대 인도사회는 혼혈과 문화적 융화 속에서 친여성적인 토착 문화와 반여성적인 아리안 문화가 공존하다가 우주의 본질을 여성성으로 보는 토착민들의 세계관이나 문화적 성향, 그리고 아리안들의 현세적 가치관이 혼합하여 친여성적인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교가 출현하기 직전의 인도사회는 아리안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제식만능주의와 바라문의 사회적 부상으로 사회구조가 계급화하면서 반여성적 인식 태도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계급제 사회로 변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성의 불교입문과 그에 대한 부처님의 허락은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는 혁명적 사건에 비견될 만한 일이었다.
부처님의 친여성적 인식 태도에서 그가 여성을 남성과 같은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있으며, 근원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해탈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이나 제제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문제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수행방식과 사회적 편견 때문에 여성의 출가자를 신중히 고려했던 부처님의 태도는 후에 불교계에 여성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인식을 낳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하나가 부파불교나 초기 대승불교 교단 일부에 존재했던 여성불성불론이고 다른 하나가 대승교단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온 여성성불론이었다. 초기불교계에 없었던 여성불성불론이 불교계에 나타났던 것은 인도 정국과 교단 내의 변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불교를 옹호하던 마우리아 왕조가 붕괴하고 바라문교를 신봉하는 슝가 왕조가 인도 정국에 등장하였다. 이어 바라문 부흥운동이 일자 남자의 생애를 네 주기로 나누고 《마누법전》과 같은 법전에 의해 사회적 의무와 제례규범을 지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법전은 출가자와 일반대중들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까지 바라문 문화가 급속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전에서 규정하는 생의 네 주기는 남성 위주의 행위규범으로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보조자나 종속적 존재일 뿐이며 제사를 모시고 남아를 낳는 행위 외에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은 전대의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구속이 강화된 것이며 반여성적인 문화가 인도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의 영향으로 불교계의 여성인식도 변화를 겪어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는 여인오장설과 여래32상호설 등이 율장 혹은 《법화경》이나 《대지도론》 등에 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주체는 모두 성문승 사리불처럼 부처님 이외의 사람들이었으며 부처님의 친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불교계에 남성 우위의 문화를 형성하게 한 것만은 분명하였다. 당시 실세였던 부파교단의 반여성적 인식 태도를 쉽게 해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 교단의 반발을 무마하고 부처님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여성성불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대승불교계에 등장한 것이 여성변성성불론이었다. 이 과도기적인 사상은 기존 교단과 갈등을 빚지 않고도 대승불교흥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여성을 수행 생활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인식이 차츰 불교계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자 여성즉신성불론이란 여성성불론을 《유마경》과 《승만경》 등에서 전면에 내세우면서 불교사상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인오장설과 여래 32상호설에서 거론되던 여성불성불론은 여성변성성불론이란 과도기적 형태를 지나 여성즉신성불론이란 형태로 사상적 완결을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성성불론은 불교계 내외의 여성 인식 변화와 삶의 방식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사회계층간의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불교의 실현에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멸도한 이후에 남 몰래 한 사람을 위해 《법화경》의 한 구절이라도 설하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바로 여래의 사도요, 여래가 보내어 여래의 일을 한 사람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설법자를 선남자 선여인으로 보고 있다. 《법화경》에서는 설법자를 법사(法師)라 부르기도 하고 보살(菩薩)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이것은 여성이 교단 내에서 남성의 보조자가 아니라 법을 설하는 주체자이자 실천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팔리 증지부에는 한역 아함경과는 달리 ‘선남자 선여인’이란 호칭을 쓰지 않고 ‘선여인 선남자’라며 여성을 먼저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대승교단 안에 여성이 실제로 상당히 많았으며 남성 못지 않게 활발히 활동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후에 대승불교 교단이 인도 사회에 정착하자 여성성불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직접적으로 여성성불을 주장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여성즉신성불론이다. 여성의 몸 그대로 성불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이 사상의 핵심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성 인식을 가장 잘 계승한 불교의 완벽한 여성론이라 할 수 있다. 《유마경》과 《승만경》 같은 중기 대승경전에는 여성의 몸으로 직접 성불하는 천녀와 승만부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마경》에서 천녀는 수행의 가르침을 주어야 할 성문승 사리불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남녀의 차별은 없으며 실로 공한 것이라는 심오한 이치를 말한다.
이렇게 사리불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수행정진하여 성불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승만경》에도 승만부인이 대승보살도의 구현에 의해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나타난다. 여기서 승만부인은 당래에 수기를 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대신해 법을 설하는 설법자이다.
후에 《승만경》은 이러한 면모 때문에 여래장사상의 근간이 되면서 계층과 성에 구애되지 않는 모든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대승불교는 대승경전에 보이는 여성즉신성불론을 통하여 부처님의 친여성적 인식 태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계층과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새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며 창의적인 친여성 문화를 주도해 갔던 것이다.
4. 맺음말
고대 인도사회는 혼혈과 문화적 융화 속에서 친여성적인 토착 문화와 반여성적인 아리안 문화가 공존하다가 우주의 본질을 여성성으로 보는 토착민들의 세계관이나 문화적 성향, 그리고 아리안들의 현세적 가치관이 혼합하여 친여성적인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교가 출현하기 직전의 인도사회는 아리안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제식만능주의와 바라문의 사회적 부상으로 사회구조가 계급화하면서 반여성적 인식 태도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계급제 사회로 변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성의 불교입문과 그에 대한 부처님의 허락은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는 혁명적 사건에 비견될 만한 일이었다.
부처님의 친여성적 인식 태도에서 그가 여성을 남성과 같은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있으며, 근원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해탈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이나 제제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문제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수행방식과 사회적 편견 때문에 여성의 출가자를 신중히 고려했던 부처님의 태도는 후에 불교계에 여성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인식을 낳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하나가 부파불교나 초기 대승불교 교단 일부에 존재했던 여성불성불론이고 다른 하나가 대승교단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온 여성성불론이었다. 초기불교계에 없었던 여성불성불론이 불교계에 나타났던 것은 인도 정국과 교단 내의 변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불교를 옹호하던 마우리아 왕조가 붕괴하고 바라문교를 신봉하는 슝가 왕조가 인도 정국에 등장하였다. 이어 바라문 부흥운동이 일자 남자의 생애를 네 주기로 나누고 《마누법전》과 같은 법전에 의해 사회적 의무와 제례규범을 지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법전은 출가자와 일반대중들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까지 바라문 문화가 급속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전에서 규정하는 생의 네 주기는 남성 위주의 행위규범으로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보조자나 종속적 존재일 뿐이며 제사를 모시고 남아를 낳는 행위 외에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은 전대의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구속이 강화된 것이며 반여성적인 문화가 인도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의 영향으로 불교계의 여성인식도 변화를 겪어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는 여인오장설과 여래32상호설 등이 율장 혹은 《법화경》이나 《대지도론》 등에 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주체는 모두 성문승 사리불처럼 부처님 이외의 사람들이었으며 부처님의 친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불교계에 남성 우위의 문화를 형성하게 한 것만은 분명하였다. 당시 실세였던 부파교단의 반여성적 인식 태도를 쉽게 해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 교단의 반발을 무마하고 부처님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여성성불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대승불교계에 등장한 것이 여성변성성불론이었다. 이 과도기적인 사상은 기존 교단과 갈등을 빚지 않고도 대승불교흥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여성을 수행 생활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인식이 차츰 불교계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자 여성즉신성불론이란 여성성불론을 《유마경》과 《승만경》 등에서 전면에 내세우면서 불교사상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인오장설과 여래 32상호설에서 거론되던 여성불성불론은 여성변성성불론이란 과도기적 형태를 지나 여성즉신성불론이란 형태로 사상적 완결을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성성불론은 불교계 내외의 여성 인식 변화와 삶의 방식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사회계층간의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불교의 실현에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