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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들 ― 국교회 폐지, 토지 개혁, 대학 교육 ― 은 보수당의 저항 뿐 아니라 휘그, 급진주의자, 아일랜드 가톨릭의 이반을 초래했다. 물론 그는 아일랜드를 평온케 하려는 글래드스턴의 집념 어린 노력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의 도덕적 신념의 의의를 인정한다. 그러나 스미스는 글래드스턴의 정치적 해법의 한계를 토지 문제에 대한 판단과 잘못 결부시키고 있다. 그는 글래드스턴의 2차 토지법이 거의 무익하였고, 글래드스턴 자신도 국가 간섭을 통해 3F를 확립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솔즈베리-밸포어 보수당 정부의 토지 개혁이야말로 오랫동안 아일랜드 민중의 불만의 원천이었던 토지 소유욕을 충족시켰다고 평가한다. 이 주장의 논리적 귀결은 글래드스턴의 정치적 해법인 자치는 토지 문제의 해결 이후에 왔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 문제의 해결 이후 아일랜드인의 경제적 불만이 해소되자, 민족주의가 나아갈 길은 자치 이외에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말할 것도 없이 토지 문제와 자치라는 현상을 구분해서 본 결과이다. 그러나, 설사 그 이전은 아니더라도, 이미 파넬 시대에 토지 문제와 자치는 긴밀히 결합했고, 파넬이 이끈 민족당에 대한 아일랜드 인민의 지지는 이 양자의 결합의 힘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토지 소유와 농민의 정치적 보수성의 연관이라는 잘 알려진 가설에 따르자면, 보수당의 토지 개혁은 '후의로써 자치를 죽이려는' 지극히 보수적인 발상의 결과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1886년 자치법안에 대한 논의에서 글래드스턴이 자치법안과 동시에 제출한 토지법안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1차내각 시기에 글래드스턴은 차지인의 권리를 인정한 '얼스터 관행'을 아일랜드 전역에 확대하였고, 2차내각에서는 이른바 3F를 입법했다. 스미스는 글래드스턴이 토지의 매각과 구입을 반대하고 최대한 3F까지만을 인정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1886년 토지법안은 명백히 토지 매각을 상정하였다. 이 법안의 존재는 글래드스턴이 자치와 토지 문제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글래드스턴의 토지관의 변화를 간과하고 시종일관 한계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3개의 자치법안에 대한 평가 문제가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1912년의 자치법안이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아일랜드는 1893년 2차 자치법안의 패배 이후 '사회혁명'을 겪음으로써 토지를 매각한 지주의 세력이 약화하고 지방에서의 정치 권력은 아일랜드 민족당의 수중에 넘어 갔다. 영국에서는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관심이 퇴조하였다. 더 중요하게는 1911년 의회법을 제정하여 상원의 거부권을 제약함으로써 자치법안 통과의 헌정적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이를 1886년이나 1893년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은 과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하원을 통과한 2차 자치법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스미스는 이러한 가능성 판단은 얼스터를 간과한 것이라고 단서를 달면서, 1912-14년의 얼스터의 저항은 이전 시기의 어떤 저항도 능가하였음을 환기시킨다. 1930년 국왕 조지 5세는 맥도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 "글래드스턴의 자치법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지금 제국은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고통을 안기고 우리를 갈기갈기 찢은 아일랜드 자유국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스미스의 주장대로 얼스터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그처럼 관건이었고, 1912-14년의 저항의 강도는 1886/93년의 저항의 강도보다 훨씬 더 컸다면, 오히려 (비록 1886년은 아닐지라도) 1893년에 자치법안이 통과되었더라면 훨씬 더 나았던게 아닐까? 스미스는 글래드스턴 시대의 아일랜드 정책의 무익함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기에 글래드스턴의 자치법안의 통과 가능성 뿐 아니라 바람직함도 유보하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글래드스턴의 자치법안을 패배시킨 영국 보수당의 위기감에 있었기에, 비난의 대상을 보수당으로 지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자치 문제와 자유당의 연관성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1886년 자치법안의 패배로 자유당은 분열하였고, 이후 보수당이 거의 20년간 집권하였다. 1886년 이후 자유당은 동기야 무엇이든 글래드스턴과 뗄 수 없게 된 아일랜드 자치 문제에서 글래드스턴을 지지하는 의원들로 채워졌다. 말하자면 자치 문제는 자유당의 이념이 된 것이다. 1912년 자치법안의 제안의 배경으로 다시금 아일랜드 민족당이 정권의 향배를 결정할 힘을 얻었고, 따라서 집권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유당은 자치를 거론해야만 하였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정치를 역학 관계에서만 보는 것이다. 열광적이었든 아니면 마지못했든 간에 자유당이 자치를 거론하는 것은 글래드스턴 이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나아가 스미스는 아일랜드 문제를 입헌적 민족주의의 틀 안에 정착시킨 글래드스턴 시대의 유산에 대해서도 더 긍정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파넬 시대부터 1910년대까지의 민족당뿐 아니라, 민족당을 정치적으로 거세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점유한 공화주의(신 페인 당)도 주류는 입헌적 민족주의의 지지 세력이었다.
1894년 정계를 은퇴한 글래드스턴을 이어 자유당을 이끌었던 로즈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일랜드 문제는 한번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번도 정치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북아일랜드에서는 적대적인 두 정치 세력 사이에 공동 정권의 수립이라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더욱이 19세기에 아일랜드 자치를 거부한 합방주의자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인 남·북 아일랜드의 경제적 격차는 최근의 아일랜드 공화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덧붙여, 스미스가 높이 평가하는 19세기의 전 아일랜드 통일 운동의 경험의 의의를 되새긴다면, 우리는 아일랜드의 분할이 장차 해소될 가능성도 점칠 수 있다. 그 때에 이르면 800년에 걸친 아일랜드 문제는 정치에서 역사로 넘어갈 것이고, 역사가는 새로운 전망을 갖고서 영국-아일랜드 관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수정하는 또 다른 '수정주의'의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토지 소유와 농민의 정치적 보수성의 연관이라는 잘 알려진 가설에 따르자면, 보수당의 토지 개혁은 '후의로써 자치를 죽이려는' 지극히 보수적인 발상의 결과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1886년 자치법안에 대한 논의에서 글래드스턴이 자치법안과 동시에 제출한 토지법안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1차내각 시기에 글래드스턴은 차지인의 권리를 인정한 '얼스터 관행'을 아일랜드 전역에 확대하였고, 2차내각에서는 이른바 3F를 입법했다. 스미스는 글래드스턴이 토지의 매각과 구입을 반대하고 최대한 3F까지만을 인정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1886년 토지법안은 명백히 토지 매각을 상정하였다. 이 법안의 존재는 글래드스턴이 자치와 토지 문제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글래드스턴의 토지관의 변화를 간과하고 시종일관 한계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3개의 자치법안에 대한 평가 문제가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1912년의 자치법안이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아일랜드는 1893년 2차 자치법안의 패배 이후 '사회혁명'을 겪음으로써 토지를 매각한 지주의 세력이 약화하고 지방에서의 정치 권력은 아일랜드 민족당의 수중에 넘어 갔다. 영국에서는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관심이 퇴조하였다. 더 중요하게는 1911년 의회법을 제정하여 상원의 거부권을 제약함으로써 자치법안 통과의 헌정적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이를 1886년이나 1893년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은 과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하원을 통과한 2차 자치법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스미스는 이러한 가능성 판단은 얼스터를 간과한 것이라고 단서를 달면서, 1912-14년의 얼스터의 저항은 이전 시기의 어떤 저항도 능가하였음을 환기시킨다. 1930년 국왕 조지 5세는 맥도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 "글래드스턴의 자치법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지금 제국은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고통을 안기고 우리를 갈기갈기 찢은 아일랜드 자유국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스미스의 주장대로 얼스터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그처럼 관건이었고, 1912-14년의 저항의 강도는 1886/93년의 저항의 강도보다 훨씬 더 컸다면, 오히려 (비록 1886년은 아닐지라도) 1893년에 자치법안이 통과되었더라면 훨씬 더 나았던게 아닐까? 스미스는 글래드스턴 시대의 아일랜드 정책의 무익함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기에 글래드스턴의 자치법안의 통과 가능성 뿐 아니라 바람직함도 유보하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글래드스턴의 자치법안을 패배시킨 영국 보수당의 위기감에 있었기에, 비난의 대상을 보수당으로 지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자치 문제와 자유당의 연관성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1886년 자치법안의 패배로 자유당은 분열하였고, 이후 보수당이 거의 20년간 집권하였다. 1886년 이후 자유당은 동기야 무엇이든 글래드스턴과 뗄 수 없게 된 아일랜드 자치 문제에서 글래드스턴을 지지하는 의원들로 채워졌다. 말하자면 자치 문제는 자유당의 이념이 된 것이다. 1912년 자치법안의 제안의 배경으로 다시금 아일랜드 민족당이 정권의 향배를 결정할 힘을 얻었고, 따라서 집권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유당은 자치를 거론해야만 하였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정치를 역학 관계에서만 보는 것이다. 열광적이었든 아니면 마지못했든 간에 자유당이 자치를 거론하는 것은 글래드스턴 이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나아가 스미스는 아일랜드 문제를 입헌적 민족주의의 틀 안에 정착시킨 글래드스턴 시대의 유산에 대해서도 더 긍정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파넬 시대부터 1910년대까지의 민족당뿐 아니라, 민족당을 정치적으로 거세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점유한 공화주의(신 페인 당)도 주류는 입헌적 민족주의의 지지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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