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윤리 - 죄와 벌의 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 신학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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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떨어지면서 생기는 자유

2. 비신화화와 윤리: 주의주의 형벌 개념

3. 과학의 주의주의 윤리에서 기독교 윤리로

본문내용

이것을 믿어야 하죠. 의혹을 품지 말고 믿으시오. 이 속에야말로 성자의 모든 희망과 신앙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시마 장로의 얘기는 근대의 주의주의가 모르는 차원이다. 그것은 죄와 속죄의 차원이다. 종교의 문제로 돌아가는 데, 원시 종교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헤겔은 인류가 죄의 집단이라는 것을 모른다. 헤겔은 불법 행위에서 형벌의 문제를 본다. 그것은 바깥에서 실현되는 의지의 자유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각자가 독립해 있고 그러한 독립 인격의 자유 실현을 막는 것이 불법행위요, 범죄다. 바깥에서 저지르는 불법이 없으면 범죄가 없다. 각자는 스스로 자기가 알아서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자기 자유를 실현하면 된다.
그러나 복음에서 볼 때 자유는 불법 행위 이전에 있는 죄의 치유에서 온다. 죄란 관계 단절이다. 관계 단절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단순한 인과 관계를 넘어서 생각해야 할 차원이다.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근본 폭력(fundamental violence)을 말했다. 인간 사회에는 그 밑바탕에 폭력이 있다는 것이다. 모방 욕구 때문이다. 법에서는 가리지 못하는 차원이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인간에게 타나토스 곧 공격 본능이 있음을 헤아렸다. 법에 잡히지 않는 폭력이 사람의 심리를 지배하고 있다. 본회퍼가 『기독교 윤리학』에서 말하는 것도 그것이다. 일반 윤리는 양심에서 출발하지만 기독교 윤리는 수치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치심이란 서로 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 단절의 신호다. 양심은 거기까지 헤아리지 못한다. 근대 형법은 그 점을 모른다.
내가 저지른 잘못(guilt)이 없어도 나는 죄인(sin)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은총으로 의롭게 여김 받음(justification by the Grace)이 그 얘기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고린도 전서 4:4). 앞에서 조시마 장로의 얘기도 그 얘기다. 죄짓지 않을 수 없다(non posse non peccare)는 어거스틴의 말도 그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 사회 안에 사는 한, 우리는 죄의 구조 속에 산다. 그것은 헤겔이 말하는 불법 행위 이전의 문제다. 저지르기 이전에 내 안에 들어 있는 죄의 문제다. 이 사회 속에 사는 한, 우리는 관계 단절 속에 산다. 헤겔이 말하는 인격도 결국 관계 단절을 전제로 한다. <나는 나, 너는 너>는 근대에서 해방의 역할을 했지만, 역시 그것은 거쳐야 할 단계는 되지만 인간을 온전하게 해방하는 구조는 아니다.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중립 상태가 헤겔이 말하는 추상법 상태인데, 그러한 헤겔의 자유의 프로그램은 너무 낙관적이다. 사람은 관계 단절 때문에 이미 분열해 있다. 자기와 자기가 분열되어 있다. 자기의 분열과 남에 대한 정죄는 같이 간다. 근대 형법은 정죄하는(judgement) 구도밖에 모른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은 그 여인이 요청하는 것으로 그 여인을 위해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할 때, 아무도 그 여인을 돌로 칠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거나 심판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 죄의 문제를 따지면 그렇다.
그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자기 실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서 온다. 죄의 깊이를 알고 회개할 때 오는 은총의 세계에서 정죄와 심판과 자기 실현을 넘어선 해방이 온다. 근대 형법 정신은 중요한 공헌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죄의 차원으로 치유되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과학적 인과 관계의 발전과 함께 인간 행위는 유한 책임에 바탕을 두었다. 내 행위의 직접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종교는 무한 책임을 말한다. 어떤 죄인의 범죄 행위는 나의 책임이다. 나는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책임이 있다. 연대 책임과 무한 책임이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신 신 앞에 선 인간의 고백에서만 가능하다. 죄와 벌의 인과 관계는 과학의 영향을 받은 주의주의를 넘어 희망 사항으로 열려 있다. 죄인이 사랑의 하나님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과 자유의 문제는, 떨어지는 자유를 넘어 다시 하나가 되는데서 생기는 자유가 된다. 그것은 회개에서 오는 자유 또는 용서받는데서 오는 자유다.
앞으로 인간의 자유와 구원의 문제는 거기에 달렸다. 인간 복제, 유전자 공학, 가상 공간, 안락사처럼 과학이 일으키는 윤리 문제들은 결국 인간론의 문제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문제로 간다. 그것은 철학과 신학의 문제다. 과학과 맞아떨어진 공리주의 윤리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신념과 믿음의 문제요, 저쪽에서 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문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소리든, 성서의 하느님의 소리든 말이다.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되 사람을 보고 인정하느냐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인정하느냐는 문제다. 근대의 인간의 존엄은 철저한 주의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인간의 도덕 능력을 보고 인간의 존엄을 믿었다. 그것은 과학이 가져온 인식론의 전환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비판』분석론은 서로 힘을 합쳐 인간을 위대하게 본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사람을 사랑하여 죽기까지 한 하나님을 보고 사람의 귀함을 말한다.
과학이 마련한 자유와 해방의 길이 있다. 그것은 인류의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과학은 떨어뜨리는 일을 했고, 엄밀한 기술언어와 연결되어 물질을 생산하고 윤리에서는 주의주의를 확립했다. 이제 다시 붙는 길로 가야 한다. 은유와 상징이 가져오는 맘의 풍요가 있어야 한다. 은유와 상징은 결국 종교 언어요, 악의 문제 앞에서 용서받는데서 오는 화해의 언어다. 과학은 그 길을 내다보고 안내하는 창구의 역할을 하면 된다. 알수록 신비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알수록 신비해진다. 자연 과학 지식이 과거와 달리 생명 현상이나 우주 현상을 보고 알수록 신비를 느끼는 것은, 죄와 벌의 문제에서 주의주의를 넘은 차원으로 갈 가능성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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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24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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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9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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