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과 남명학파 - 임금도 ‘꾸짖은’ 대쪽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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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남명 조식

2. 남명 일대기

3. 퇴계와 남명

4. 「단성소」사건

5. 처사로서의 현실참여

6. 남명의 제자들과 그 전통

7. 왜 이들 남명학파가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는가?

8. 조식, 임금도 ‘꾸짖은’ 대쪽 선비정신

본문내용

다지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의문의 해답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일단 가장 큰 이유로는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ㆍ호는 來庵ㆍ1535~1623년)이 인조반정에 의하여 숙청 당함으로써 스승인 조식과 남명학파 전체에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조식이 끝내 처사(處士)로서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소외되었고, 조식의 상소문 등이 왕가와 중앙의 부패한 조정과 훈척을 질타하는 데서 많은 정적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들의 스승이며 사숙인(私淑人)인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남명학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태도가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 유학자의 평가기준이 되는 문묘종사(文廟從祀ㆍ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함께 제사 지냄)가 인조반정 이후 모두 서인(西人)에게 치중되었다는 점도 조식의 존재가 후대에 알려지는 데 커다란 장해 요인이 되었다. 또 연구자들에게는『조식집』의 판본이 훼손되고 개정되는 등으로 인해 남명학의 본 면목 파악이 왜곡되었다. 그리고 관계된 후손과 이곳 출신 유학자들이나 후손들이 꿋꿋한 자긍심을 지키고 조식의 학문사상과 실천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조식, 임금도 ‘꾸짖은’ 대쪽 선비정신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 (한형조 등 지음·청계)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말하는가 (허권수 지음·한길사)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됩니다.”(1555년 단성현감 사직 상소문)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은 당시 사회의 위기 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한 비판적 지식인이다. 1567년 승정원에 올린 또다른 상소문에선 “진실로 한마디의 말이라도 들어서 만에 하나 임금님의 덕화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 구급이라는 두 글자로서, 나라를 부흥시키는 한 마디로 삼겠습니다”고 적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있는 절대군주앞에 일개 처사에 불과한 남명이 당당하게 발언할 수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남명이 살아간 시대는 사화의 시기였다. 50년간 지속된 사화로 말미암아 지방에서 학문적,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좌절을 맛봐야했다. 을사사화 이후 사화의 끝이 보이는 듯했으나 곧이은 척신정치의 횡행은 국가의 기강 문란과 왕실 친인척을 비롯한 권세가들의 정치 독점을 강화시켰다. 남명은 이런 현실에서 선비가 서야 할 길은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여겼다. 국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현실의 모습을 바로 지적해주는 것이 선비의 몫이라 판단했다.
남명은 당대에는 물론 조선후기까지 퇴계와 함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양대산맥으로 인식됐으나 어느때부터인가 퇴계의 명성에 가려 잊혀졌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이후 남명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 그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남명 탄신 500년을 맞아 곧 출간될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말하는가’(한길사)와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청계)는 ‘잊혀진 유학자’ 남명을 대중앞에 복원하는 작업이다. 허권수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소장이 쓴 ‘절망의 시대’는 남명의 생애와 사상, 학문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최초의 본격적인 평전. 서문에도 나타나듯 ‘학문 연구의 결과를 쉽게 풀어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사화의 반복과 척신정치라는 억압된 정치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원칙을 지켜나면서 현실에 적극 대응한 남명의 드라마틱한 삶이 비교적 쉽게 정리했다.
이종묵 한형조 박병련 정순우 등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4명이 쓴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청계)는 실천하는 지식인 남명의 면모를 생생하게 담고있다. 이종묵 교수는 남명은 시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실천적인 처사로서의 삶을 살아간 그대로의 모습을 강렬하게 시에 투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곡천(욕천)이라는 시에선 “그래도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처럼, 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한 표현을 썼으며, 이는 그만큼 자신을 다잡는 강한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했다. 조금이라도 허물이 생기면 할복을 각오하는 강한 개성과 실천 의지는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장이 배출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남명을 ‘칼을 찬 유학자’로 묘사한 한형조 교수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퇴계를 상인, 남명을 주의로 대비한 성호 이익의 해석을 빌려 사랑과 관용을 뜻하는 인이 문치를 말하는 선비에 어울린다면 의는 상벌에 엄격한 무인에 어울린다고 지적한 후, 남명을 펼치면 곧바로 닥쳐오는 것이 바로 ‘칼’의 이미지라고 풀이했다. 남명의 칼은 안으로는 수양과 극기를,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는 것. 칼로 상징되는 남명의 이미지는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가는 실천적인 유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박병련 교수는 남명은 유학의 다양한 명제와 가르침을 경의에 집약하고 이것을 실천성의 맥락에서 생명력있는 통합을 이루어 내고자 했다고 평가하여 남명 사상의 요체는 실천에 그 목표가 있음을 강조했다.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는 남명이라는 학자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적극적인 현실대응력으로 집약된다. 중앙 정치가 정쟁과 권력독점으로 인해 새로운 정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없을 때 남명은 그 대안으로 비판세력의 현실참여를 적극 주장했다.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 비판자의 안목을 키우고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면 그 대상이 국왕이라도 결단코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500여년이 지난 요즘, 언론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 남명처럼 서릿발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내는 지식인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남명의 칼을 지금 우리 시대에 다시 빌릴 수는 없을까.
(신병주·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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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8.11
  • 저작시기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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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0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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