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솔직히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A. 들어가면서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B. 글의 한가운데서 : 초월(超越)의 하나님에서 포월(砲越)의 하나님으로
1. 원치 않는 혁명(Reluctant Revolution)
2. 유신론의 종말(The End of Theism?)
3. 우리 존재의 기반(The Ground of our being)
4. 남을 위한 인간(The man for others)
5. 세속적인 거룩함(worldly holiness)
6. 새로운 윤리(The new morality)
7. 틀을 개조하는 일(The recasting the mould)

C. 글을 마치면서

본문내용

참된 교회이다. 교회는 그들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남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순수하게 평신도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안수받은 목사제도를 없이하는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평신도를 안수 받은 성직자와 대립시키는 것자체가 성직주의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평신도는 이 세상에 있는 신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 Ibid. p.167.
로빈슨은 교회의 구조가 국가의 침범에 대항해서 종교의 권익을 수호하는 대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공동체 생활의 자질과 힘을 통해서 비밀의 훈련을 가지고 활발하고도 위험한 오늘의 세속적 활동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신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그를 따르게 할 수 있도록 할때 교회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로빈슨은 철저히 솔직해지고자 했다. 이미 죽어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쉬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와 예배는 형식적이 된다.
c. 글을 마치면서 : 오 늘 도 우 리 와 함 께 하 시 는 하 나 님,
그 사 랑 하 심 을 감 사 하 며 . . .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 주시고 너의 작음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만 바라볼찌라.' 복음 성가 중에 이런 제목의 곡이 있다. 이 찬양은 적어도 이 세상으로 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서 홀로 군주의 모습으로 계시는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 개념은 여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를 사랑의 아들로 부르시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아버지로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움에 거할 때에 밝은 빛을 비쳐 주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누구든지 그 어떤 고민으로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 지라고- 신음 할지라도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신 것이다.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히'의 글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틸리히의 근거로서의 신학'과 본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그리고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신학'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유신론의 종말을 전통적으로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이 세상으로 부터 영향받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만 하는 신의 이미지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틸리히에 근거하면서 기독교는 초자연주의적어야 하나?' 그리고 불트만에 근거하면서 기독교는 신화적이어야 하나?' 그리고 본회퍼에 근거 하면서 기독교는 종교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답은 한마디로 NO이다.
로빈슨은 궁극적으로 신을 만나는 것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신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남을 위한 삶을 통해서 만난다고 했다. 즉, 그것은 본회퍼에게 있어서는 타인을 위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만 참된 신앙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기도 또한 이런 선상에서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고의 틀을 개조하기를 원한다. 초월적 유신론을 넘어서 인류를 위한 참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을 고백하면서 틀을 개조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있는 초월적 유신론에 대한 사고를 이제는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버림이 결코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백했던 야훼 하나님이나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점은 어떻게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성과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응답의 모습으로 우리 인간의 자율성이 조화를 이루는 가가 중요하다.
신 앞에서의 정직하려는 몸부림, 모든 세상의 물음과 질문들은 인과론적 내지 이성으로 풀려고 하는 것이 하나의 이 세계를 진지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살아가려고 하는자에게 폭력이라고 한다면 말되지 않은 것을 말되게 만들려고 하는것 또한 하나의 폭력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들을 신앙이라는 명목하에 떵어버릴 수만은 없다. 덮는다고 해서 그것이 풀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군주적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다만 문제의 해답은 적어도 신앞에서 정직하려고 하는 우리의 몸부림으로 그 답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신에게 솔직히'를 읽고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도'부분에서 이미 지적을 했지만 그가 제기하는 기도의 부분이 다분이 Naive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물음을 제기를 하기를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본회퍼를 인용하면서 이 질문에 본회퍼는 기도의 시간을 따로내야 한다는 따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사유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주로 이세상과 떨어져 있는 순간, 생활의 틈을 내서하는것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한다. 로빈슨은 기독교의 기도, 성육신에 비추어 본 기도라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해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려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한다.
물론 이 논의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라는 것이 그 문제를(현실) 떠나서 하는 기도는 의미가 없겠지만 바쁜 생활의 틈이라는 것이 자기만의 시간,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만의 기도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갈멜산에서 기도하는 그런 의미의 기도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를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되고 그리고 더욱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그리고 나의 실존 앞에서 정직해야겠다는 다짐을 새삼해 본다.

키워드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2.09.26
  • 저작시기2002.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437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