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이론을 위한 해석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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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드로이젠의 역사 이야기 이론
2. 영미 분석 역사 이야기 이론에 있어서 역사 이야기 이론
2.1. 단토에게 있어서 이야기 문장
2.2. 밍크에게 있어서 이야기의 구성 행위
2.3. 화이트에게 있어서 줄거리 구성을 통한 설명
3. 리꾀르와 카에게 있어서 역사 이야기 이론
3.1. 리꾀르에게 있어서 역사 이야기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3.2. 카에게 있어서 시간, 이야기 그리고 역사
맺는말

본문내용

특히 그들의 역사, 문화 그리고 정신 구조와는 다른 한국의 역사를 그리고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이다. 물론 리꾀르의 구조 통일성은 그렇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 통일성이 상이한 이야기 대상 곧 사람, 민족, 공동체 등의 이야기 대상이 달라진다고 다르다면 이는 통일성이라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당연한 생각 때문이다. 즉 리꾀르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인간 경험의 시간적 특성 사이에 초문화적 필연성 (n cessit transculturelle) 법칙을 말했기 때문이다. 범주적 구조 통일성은 물론 리꾀르에게서는 내용의 차이를 통일시킨다.
그러나 데리다처럼 차이는 통일만큼 본질적이며, 오히려 차이는 통일보다 근원적으로 먼저이다. 또한 통일보다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비록 이 차이를 서구 철학이 통일성과 동일성 속으로 소환시켜버렸다 할지라도 이 차이를 다시금 끄집어내어 강조할 필요가 있다. 리꾀르가 말한 구조 통일성이 텍스트 세계와 독자의 세계와의 만남 속에 있다는 데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텍스트의 의미와 그 의미 구조의 통일성이 찾아진다고 하는 것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자신의 고유한 삶의 세계로 환원하고 그 환원된 자신의 삶의 세계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실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의문이다.
독자가 역사 텍스트를 분명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이야기된 역사 텍스트의 의미를 독자는 자신의 삶의 세계로 적용해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이 적용한다는 말은 역사 텍스트가 말하고자하는 그 의미를 그대로 독자는 자신의 삶의 세계에서 실현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이 실현한다는 소리는 역사 텍스트가 말한 그대로 독자가 자신의 삶을 변형한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더구나 리꾀르처럼 텍스트의 의미가 통일될 수 있는 구조의 통일성이 있고 그 구조 통일성에 의해 드러난 텍스트 의미는 독자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동일하게 실현되어져야 하는게 않는가? 왜냐하면 의미를 산출한 보편적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물론 리꾀르는 이것을 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이야기의 보편적 구조는 이야기하는 텍스트의 의미를 통일성있게 산출하기 위한 그리고 그 의미를 종합적으로 모으기 위한 규범이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인 독자의 텍스트 의미의 자신의 삶에서의 적용은 의미 산출을 위한 보편적 구조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고하는 사실이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리꾀르의 이야기의 보편 구조는 분명 의미 통합과 그 의미의 종합적 산출에 있다고하는 사실을 중시해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보편적 구조에 의해 산출된 텍스트 의미의 독자 삶에서의 실현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런 실현을 위해 보편적 구조는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 이러한 질문은 또다른 질문 때문에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즉 리꾀르에게 있어서 이야기 이론의 두번째 특징인 이야기는 역사적 인간의 시간성을 재구성한다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 시간성에 대한 질문이 다. 질문의 요지는 이야기가 가지는 시간 구조와 구체적 실 생활에서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시간은 처음과 가운데와 끝을 가진다. 인간에게서 처음을 탄생으로, 끝을 죽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야기된 역사 속의 시간과 지금 이야기하는 자의 시간은 분명 다르다. 더구나 이야기 속에서 재구성되는 시간처럼 독자의 시간이 즉 구체적 실제의 삶이 그렇게 재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시간 구조를 가지는 그 예를 리꾀르는 성서를 든다. 처음으로는 창조가 있고 가운데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가 있으며 끝으로는 종말이 있다. 성서라는 텍스트의 의미를 산출하는 것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성서의 의미를 독자는 자신의 삶에서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자의 삶의 변화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다 그런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성서 속에는 분명 리꾀르가 말한 그런 조건이 들어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 기록에서는 그런 조건이 없다. 리꾀르의 이야기의 역사에의 적용 타당성을 성서에서 그 예로 제시할 수 있으나, 그러나 한국의 역사에 이야기를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역사서가 한국에는 없다. 그렇다면 리꾀르의 이야기 이론의 타당성을 한국사에서는 제시할 수 없지 않겠는가?
물론 리꾀르에게서 이야기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나 칸트의 반성하는 판단력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닐 때가 더 많다. 너무 모순적일 때도 있다. 어떤 일상적 일들의 내용이 이야기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객관적이라고 평가될 때가 있다. 그 반대로 똑같은 사실을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이해하지 못하겠다느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느니 등 한다.
따라서 능력있는 이야기자라는 말을 하게끔 된다. 리꾀르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은 이상적 관객, 물론 이상적 독자
. Ricoeur, Temps et r cit, 84쪽.
를 전제하지 않았느냐 비판하듯이, 가다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인식을 뜻했던 해석학적으로 훈련된 의식
.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282쪽.
에 대해 후학들이 이상적 의식이라 비판했듯이 또한 리꾀르에게서도 이상적 이야기자가 전제되어있지 않느냐라는 의문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그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며 그 이해된 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이상적 관객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이상적 관객과 독자만이 작품과 작품에 의해 생산된 문화를 가장 잘 정화(katharsis)할 수 있지 않는가? 해석학적 역사 의식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그리하여 보편적 역사 이해를 가능케할 해석학적으로 훈련된 의식을 가진 해석학자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보편 구조 통일성을 훌륭하게 마스터한 그리하여 그 구조 통일성으로부터 산출된 텍스트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실현할 능력있는 이상적 독자가 리꾀르에게 전제되어 있지 않는가? 아니면 그러한 이상적 독자만이 텍스트를 읽지 않은 이상 보편적 구조 통일성은 사실은 그 독자만의 보편적 구조 통일성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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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2.10.03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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