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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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의 Praxsis는 구약으로 나아간다.
베자는 칼빈보다 더 나아간다. 칼빈은 무장저항을 하되 하급관리가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베자는 더 나아가 일반 시민도 무장 저항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복음과 정의(2)
<박건택 교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사람과의 관계에서 학연과 지연을 떠나서 사회에 관계가 형성된다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티를 내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 진정한 관심을 가져주는 사회가 진정한 정의로운 사회이다 이런 사회가 황금률에 가까운 사회이다.
오늘 우리는 황금률에 붙어 있는 다음의 말을 보고자 한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말이 붙어 있다. 하나님은 온 율법을 종합한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며 그것은 황금률이었다 율법 중에서 도덕법만이 복음으로 넘어오고 있다. 선지자들이 분열된 왕국에서 활동할 때, 권력과 관련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드러난다. 모세의 율법을 예수님은 일점일획도 버리지 않고 완성한 것이 마5장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상의 것을 보이셨다.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활동을 한마디로 복음의 수준으로 말하고 있다. 복음의 수준은 선지자의 활동 그 이상으로 말하고 있다.너희도 하나님처럼 온전하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같이 온전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까지 이르지 않는한 우리는 도토리 키재기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 이하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이 말하는 정의는 자신이 온전하신 것처럼 인간의 정의도 온전하기를 바란다.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도 온전히 행하지 못한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하시고 행하게 하실 때만 가능하다. 왜그런가? 그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이 타락한 본성은 탐욕과 힘의 정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활동은 그런 면에서 힘의 정신에 대한 것이다.
몇 년 전에 어떤 학생이 "산상설교를 포기했다"는 고백을 들었다. 산상설교대로 해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인간 사회에 법과 정치가 세워지는 것은 인간의 탐욕을 막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황금률을 내 놓았다. 그리스도의 공화제와 로마의 법제도를 도입하면서 법의 또 다른 사용, 칼벵의 유대화하는 현상을 보면서 구약으로 돌아가는 느낌은 율법의 제3사용에 의한 것이다.
이들에게 로마법은 세례를 받으면서 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법으로 탄생하였다. 인간정의의 책임정신은 독재자를 무력으로 퇴치시킬 수 있는데까지 나아갔다.
우리는 21세기 다원주의 사회, 세속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기독교 국가가 없는 사회에서 복음과 정의는 어떻게 관련되어 나타날 것인가?
WCC가 말하는 복음은 사회제도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민주화가 마치 복음인양 말하고 있다.
복음이 한번도 들려지지 않는 곳은 그 사회의 법체제를 뒤엎어 버린다. 불법적인 복음 게릴라를 낳고 그 사회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복음을 전한다. 우리는 중국에도 북한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된 사회에서는, 이미 기독교 국가시대는 끝났기 때문에 한국과 같이 1/4이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복음이 해야 할 일 중에 정의실현이다.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그 사회가 정의화되지 않으면 그 사회가 복음화 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복음을 수출한다는 그 단체들,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비 복음적이며 비정의적인가를 보면, 복음의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복음대로 하지 않는 복음단체 속에 하나님의 정의가 서지 않는다면, 나아가 인간의 정의가 서지 못한다면 개혁파는 무력저항도 가능하다. 그 정의가 서지 못하게 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무력으로 그들을 밀어 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막아버리는 기독교 단체가 서 있다면 개혁파 신학은 물론 합법적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불법을 행하면 막아야 하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몰아 내어야 한다. WCC는 개혁파 저항신학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해서도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다.
그동안 개인윤리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는 사회 윤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공적으로 문란한 사람, 공적 질서 속에 문란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우리는 개인적인 윤리에 있어서는 그렇게 지적하면서 사회윤리에서는 잘못해도 그냥 넘어간다. 차라리 공생활이 문란하기 보다는 사생활이 문란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개혁파의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 역사적 무력저항적 참여라면, 개혁주의 역사참여는 비폭력적 참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력을 쓰고 싶은 충동이 있다. 그러나 내가 산상설교에 물려 있다. 한번 물리면 미치게 된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공적인 생활 속에서 이 말씀이 실천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 있다. 산상설교에서 비폭력적 참여가 말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거기서 가장 큰 무기는 말이다. 나는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탐욕과 힘의 정신 앞에 서야 한다. 힘의 정신은 남을 지배하려는 정신이다. 힘의 정신에 눌려 있는 사람들,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 것도 믿지 말고 내 자신도 믿지 말라. 그러나 모든 것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열어놓은 그 전망을 믿으라. 사람이나 사회가 변할 것을 믿으라. 이것을 이해하면 강의는 끝났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예면 예요 아니면 아닌 것이다. 억지로 믿게 하려는 사람이 수상하다.
이것이 비폭력적 역사 참여의 자세이다. 예수님은 명백히 역사의 비폭력적 참여자로 나타났고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개혁파는 역사의 비폭력적 싸움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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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격3,300
  • 페이지수48페이지
  • 등록일2002.10.04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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