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5장 2차 대부흥운동과 개척지방의 교회분열
Ⅰ. 미국의 종교부흥
Ⅱ. 서부의 제2차 대부흥
Ⅲ. 장로교의 분열
Ⅳ. 19세기 초의 종교 단체들
Ⅴ. 삼위일체 논쟁
제16장 교회 조직의 시대와 현대 선교활동의 시작
Ⅰ.교회의 조직
Ⅱ. 이방인 선교
Ⅲ. 침례교의 인디언 선교사업
Ⅳ.미국 내지 선교협회
Ⅴ. 선교회의 관계조직
Ⅵ. 기독교 문서선교
Ⅶ. 반선교적 결의들
제 17장 불안정한 30년대와 40년대의 종교
Ⅰ. 장로교의 분열
Ⅱ. 성공회
Ⅲ. 루터교회
Ⅳ. 독일개혁교회 분쟁
Ⅴ. 로마 가톨릭의 성장
Ⅵ. 비정상적 종교운동들-몰몬교
Ⅶ. 밀러나이트 운동
Ⅷ. 심령술
Ⅸ. 공산주의
Ⅹ. 찰스 피니
제18장 노예제 분쟁과 분파 운동
Ⅰ. 노예제도의 생성
Ⅱ. 노예제도 폐지
Ⅲ. 제2차 노예제도 반대 운동
Ⅳ. 교회의 분열
Ⅴ. 장로교와 감리교회
Ⅵ. 평신도 운동
제 19 장 남북부 교회와 남북전쟁
Ⅰ. 노예제 폐지론을 지지한 교회들
Ⅱ. 노예제 폐지론을 거부한 교회들
Ⅲ. 군목에 관하여
Ⅳ. 교회단체들의 협력
Ⅴ. 해방노예 협회
Ⅵ. 북부교회의 남부교회에로의 진출 문제
Ⅶ. 해외사절
Ⅷ. 교회의 자선사업
제 20 장 재건시기의 교회
Ⅱ. 흑인교회의 조직
Ⅲ. 부 패
Ⅳ. 이 민
Ⅴ. Y.M.C.A 와 무디
Ⅵ. 서부로의 이동
Ⅶ. 서부 인디언들의 동요
Ⅷ. 디사이플 파
Ⅸ. 전후의 가톨릭과 루터교, 유대인
Ⅹ. 미국교희의 변화
Ⅰ. 미국의 종교부흥
Ⅱ. 서부의 제2차 대부흥
Ⅲ. 장로교의 분열
Ⅳ. 19세기 초의 종교 단체들
Ⅴ. 삼위일체 논쟁
제16장 교회 조직의 시대와 현대 선교활동의 시작
Ⅰ.교회의 조직
Ⅱ. 이방인 선교
Ⅲ. 침례교의 인디언 선교사업
Ⅳ.미국 내지 선교협회
Ⅴ. 선교회의 관계조직
Ⅵ. 기독교 문서선교
Ⅶ. 반선교적 결의들
제 17장 불안정한 30년대와 40년대의 종교
Ⅰ. 장로교의 분열
Ⅱ. 성공회
Ⅲ. 루터교회
Ⅳ. 독일개혁교회 분쟁
Ⅴ. 로마 가톨릭의 성장
Ⅵ. 비정상적 종교운동들-몰몬교
Ⅶ. 밀러나이트 운동
Ⅷ. 심령술
Ⅸ. 공산주의
Ⅹ. 찰스 피니
제18장 노예제 분쟁과 분파 운동
Ⅰ. 노예제도의 생성
Ⅱ. 노예제도 폐지
Ⅲ. 제2차 노예제도 반대 운동
Ⅳ. 교회의 분열
Ⅴ. 장로교와 감리교회
Ⅵ. 평신도 운동
제 19 장 남북부 교회와 남북전쟁
Ⅰ. 노예제 폐지론을 지지한 교회들
Ⅱ. 노예제 폐지론을 거부한 교회들
Ⅲ. 군목에 관하여
Ⅳ. 교회단체들의 협력
Ⅴ. 해방노예 협회
Ⅵ. 북부교회의 남부교회에로의 진출 문제
Ⅶ. 해외사절
Ⅷ. 교회의 자선사업
제 20 장 재건시기의 교회
Ⅱ. 흑인교회의 조직
Ⅲ. 부 패
Ⅳ. 이 민
Ⅴ. Y.M.C.A 와 무디
Ⅵ. 서부로의 이동
Ⅶ. 서부 인디언들의 동요
Ⅷ. 디사이플 파
Ⅸ. 전후의 가톨릭과 루터교, 유대인
Ⅹ. 미국교희의 변화
본문내용
을 가져왔다.
Ⅴ Y.M.C.A 와 무디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들에 의해 발생된 새로운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심각한 노력이 청년기독자협회(Y.M.C.A) 등의 초교파적 조직에 있는 평신도에 의해 행해졌다. 한편, 전후시기의 가장 효과적 복음전도자는 평신도 무디(Dwight L. Moody)였다. 그는 시카고 시에서 종교적 일꾼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1865년에 시카고에 와서 플리머스 교회에 가입하여, 그 도시의 가장 빈곤한 구역들의 하나에 한 주일학교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 영향력있는 시카고 상인을 그 교장이 되도록 설득하였다. 1860년 그는 사업을 단념하고 시의 선교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남북전쟁 동안 병사들을 봉사하는데 일하였다. 무디는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탁월한 전도자였다. 그의 설교는 간단하였다. 그러나 확신과 중심점으로 차 있었다. 그는 간절한 동정심과 개인에 대한 통찰력과 위대한 실제적 기술과 기지를 가지고 있었다.
Ⅵ 서부로의 이동
남북전쟁 동안과 전후에 인구는 계속하여 서부에로 이동하였다. 1861년 켄사스가 연방정부에 가입되었다. 그리고 전쟁종식 2년 후 네브라스카가 한 주가 되었다. 60년과 70년대의 대광산업 유행으로 점차 더 많은 수의 백성들을 록키산맥 지방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1876년까지에는 콜로라도를 주로 승격하게 하였다.
Ⅶ 서부 인디언들의 동요
정착민들을 미즈리 관통지방으로 이거시키고, 대륙횡단 철도들을 건설함으로 된 불행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서부 인디언들 가운데 조성된 동요였다. 군대가 서부로 이동하는 정착민들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디언족 선교를 특별히 곤란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다수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도주하여야만 하였고, 그리고 인디언족의 종교적 및 경제적 조건은 악한 형편에서 극악에로 급속하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Ⅷ 디사이플 파
1869년까지 구학파와 새학파 장로교 사이의 분열의 원인들은 대체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년에 두 단체의 재통합이 다행히 완성되었다. 남북전쟁 후 연간은 회중교회파 내에 교파적 부흥의 시기를 이룩하였다. 이 운동은 전쟁 전에 개시되었다. 감리교와 침례교의 새로운 서부에서의 강력한 경쟁자는 디사이플 파였다. 이 파는 1883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교회들에 대여하기 위하여 교회확장 자금을 설립하였다.
Ⅸ 전후의 가톨릭과 루터교, 유대인
전후 이민으로부터 가장 큰 유익을 본 교회들은 가톨릭과 루터교회였다. 미국 루터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는 재건시기에 거대한 스칸디나비아인 이민단이 미국 내에 들어온 일이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의 루터교 단체는 그들이 옴으로써 제기된 문제들을완전히 해결하여 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대다수는 교회에서 떠나버렸다. 미국 루터교회측으로서 그 커다란 기회를 충분히 포착하는데 실패한 것은, 1860년에서 1870년 사이는 미국 루터교회 내의 분열기였다는 사실에 일부분의 원인으 찾을 수 있다.
1873년 제1차 유대인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을 형성하였다. 1830년과 1848년의 대이민때에 다수의 독일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왔다. 이것이 곧 새롭고 또 공격적인 지도체제를 산출하였다. 그것으로부터 대체로 유대인 연맹과 개혁운동이 나왔었다.
Ⅹ 미국교희의 변화
남북전쟁이 종식될 무렵에 미국 내의 대교회들은 철저히 정통이며 보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곧 종교적 사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될 어떤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한 세력은 회중교회 목사 브슈넬이 행한 것이었다.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하여서 새로운 종교적 사상과 경험의 고집자가 되었다. 미국의 부흥운동은 대체로 기독교적 성장의 법을 무시하였다. 그래서 브슈넬은 그의 소책자『기독교적 양육』에서 의식적으로 감정적 경험을 주장하는 부흥주의적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교회가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원리 때문에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 기간에 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창조기사와 충돌되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미국 내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관한 한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19세기 말기 동안에 교회는 즉시 소위 "고등비평"에 관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자유파와 보수파의 양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성경의 개정은 자연적으로 신조의 개정과 관한 토론에로 이끌었는데 특별히 장로교인들 사이에서 격렬하였으며, 보수주의를 향하는 결정적 반응을 일으켰다.
** 평 가 **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미국교회는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첫째는 흑인문제요, 둘째는 이신론의 등장과 함께 온 소위 성경의 고등비평의 문제였다. 흑인문제는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의 내면속에 자리하고 있는 문제로서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공회의 입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흑인문제에 대해서 다소 중도적 입장을 취한 듯 하다. 이들은 분열이 되지 않았다. 나머지 교파들은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여 남북전쟁을 종교전쟁으로 확대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종교 아니 기독교는 시대 정신을 이끌어야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여서는 않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시대의 아픔을 걸머지셨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교회의 입장 관계를 오늘의 시대로 바꾸어 보자. 과연 교회는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것이 타당한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소수의 교회들만을 제외하고는 입장표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은 시대정신을 선도할 수 없다. 현실적인 이유로 현재의 교회는 분명 기득권자들의 소굴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도 동일한 현실적 문제로 교회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당시 교회들의 외침 즉 "인간의 자유"는 오늘날 교회가 이룩한 위대한 결실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귀중한 본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교회 역시 현재의 상황속에서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중대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러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Ⅴ Y.M.C.A 와 무디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들에 의해 발생된 새로운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심각한 노력이 청년기독자협회(Y.M.C.A) 등의 초교파적 조직에 있는 평신도에 의해 행해졌다. 한편, 전후시기의 가장 효과적 복음전도자는 평신도 무디(Dwight L. Moody)였다. 그는 시카고 시에서 종교적 일꾼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1865년에 시카고에 와서 플리머스 교회에 가입하여, 그 도시의 가장 빈곤한 구역들의 하나에 한 주일학교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 영향력있는 시카고 상인을 그 교장이 되도록 설득하였다. 1860년 그는 사업을 단념하고 시의 선교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남북전쟁 동안 병사들을 봉사하는데 일하였다. 무디는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탁월한 전도자였다. 그의 설교는 간단하였다. 그러나 확신과 중심점으로 차 있었다. 그는 간절한 동정심과 개인에 대한 통찰력과 위대한 실제적 기술과 기지를 가지고 있었다.
Ⅵ 서부로의 이동
남북전쟁 동안과 전후에 인구는 계속하여 서부에로 이동하였다. 1861년 켄사스가 연방정부에 가입되었다. 그리고 전쟁종식 2년 후 네브라스카가 한 주가 되었다. 60년과 70년대의 대광산업 유행으로 점차 더 많은 수의 백성들을 록키산맥 지방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1876년까지에는 콜로라도를 주로 승격하게 하였다.
Ⅶ 서부 인디언들의 동요
정착민들을 미즈리 관통지방으로 이거시키고, 대륙횡단 철도들을 건설함으로 된 불행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서부 인디언들 가운데 조성된 동요였다. 군대가 서부로 이동하는 정착민들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디언족 선교를 특별히 곤란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다수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도주하여야만 하였고, 그리고 인디언족의 종교적 및 경제적 조건은 악한 형편에서 극악에로 급속하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Ⅷ 디사이플 파
1869년까지 구학파와 새학파 장로교 사이의 분열의 원인들은 대체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년에 두 단체의 재통합이 다행히 완성되었다. 남북전쟁 후 연간은 회중교회파 내에 교파적 부흥의 시기를 이룩하였다. 이 운동은 전쟁 전에 개시되었다. 감리교와 침례교의 새로운 서부에서의 강력한 경쟁자는 디사이플 파였다. 이 파는 1883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교회들에 대여하기 위하여 교회확장 자금을 설립하였다.
Ⅸ 전후의 가톨릭과 루터교, 유대인
전후 이민으로부터 가장 큰 유익을 본 교회들은 가톨릭과 루터교회였다. 미국 루터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는 재건시기에 거대한 스칸디나비아인 이민단이 미국 내에 들어온 일이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의 루터교 단체는 그들이 옴으로써 제기된 문제들을완전히 해결하여 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대다수는 교회에서 떠나버렸다. 미국 루터교회측으로서 그 커다란 기회를 충분히 포착하는데 실패한 것은, 1860년에서 1870년 사이는 미국 루터교회 내의 분열기였다는 사실에 일부분의 원인으 찾을 수 있다.
1873년 제1차 유대인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을 형성하였다. 1830년과 1848년의 대이민때에 다수의 독일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왔다. 이것이 곧 새롭고 또 공격적인 지도체제를 산출하였다. 그것으로부터 대체로 유대인 연맹과 개혁운동이 나왔었다.
Ⅹ 미국교희의 변화
남북전쟁이 종식될 무렵에 미국 내의 대교회들은 철저히 정통이며 보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곧 종교적 사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될 어떤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한 세력은 회중교회 목사 브슈넬이 행한 것이었다.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하여서 새로운 종교적 사상과 경험의 고집자가 되었다. 미국의 부흥운동은 대체로 기독교적 성장의 법을 무시하였다. 그래서 브슈넬은 그의 소책자『기독교적 양육』에서 의식적으로 감정적 경험을 주장하는 부흥주의적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교회가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원리 때문에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 기간에 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창조기사와 충돌되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미국 내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관한 한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19세기 말기 동안에 교회는 즉시 소위 "고등비평"에 관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자유파와 보수파의 양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성경의 개정은 자연적으로 신조의 개정과 관한 토론에로 이끌었는데 특별히 장로교인들 사이에서 격렬하였으며, 보수주의를 향하는 결정적 반응을 일으켰다.
** 평 가 **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미국교회는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첫째는 흑인문제요, 둘째는 이신론의 등장과 함께 온 소위 성경의 고등비평의 문제였다. 흑인문제는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의 내면속에 자리하고 있는 문제로서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공회의 입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흑인문제에 대해서 다소 중도적 입장을 취한 듯 하다. 이들은 분열이 되지 않았다. 나머지 교파들은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여 남북전쟁을 종교전쟁으로 확대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종교 아니 기독교는 시대 정신을 이끌어야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여서는 않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시대의 아픔을 걸머지셨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교회의 입장 관계를 오늘의 시대로 바꾸어 보자. 과연 교회는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것이 타당한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소수의 교회들만을 제외하고는 입장표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은 시대정신을 선도할 수 없다. 현실적인 이유로 현재의 교회는 분명 기득권자들의 소굴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도 동일한 현실적 문제로 교회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당시 교회들의 외침 즉 "인간의 자유"는 오늘날 교회가 이룩한 위대한 결실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귀중한 본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교회 역시 현재의 상황속에서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중대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러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