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 장 미국 종교의 창조적인 세력(힘)
제 2 장 유럽적 배경
제 3 장 미국에 세워진 영국 국교회
제 4 장 청교도 식민지 : 미국회중교회의 시작
제 5 장 종교적 자유속에서 이루어진 제1차 실험
제 6 장 중부 식민지의 종교적 다양성 : Dutch Reformed, English Quakers
제 7 장 중부식민지에서의 종교적 다양성 : 독일 단체들
제 8 장 식민지의 장로교도들
제 9 장 New England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
제 10 장 중부와 남부 식민지에서의 대부흥
제 11 장 미국 식민지들에서의 선교사업과 자선사업
제 12 장 독립전쟁과 미국교회
제 13 장 미국 교회의 토착화
제 14 장 인구의 서부 이동과 대중교회의 발생
제 15 장 2차 대부흥운동과 개척지방의 교회분열
제 16 장 교회 조직의 시대와 현대 선교활동의 시작
제 17 장 불안정한 30년대와 40년대의 종교
제 18 장 노예제 분쟁과 분파 운동
제 19 장 남북부 교회와 남북전쟁
제 20 장 재건시기의 교회
제 21 장 교회와 변화하는 경제질서
제 22 장 교회와 도시성장
제 23 장 제 1 차 세계대전 : 번영과 불경기
제 24 장 폭풍의 10년을 지나서 세기 중엽에로
제 2 장 유럽적 배경
제 3 장 미국에 세워진 영국 국교회
제 4 장 청교도 식민지 : 미국회중교회의 시작
제 5 장 종교적 자유속에서 이루어진 제1차 실험
제 6 장 중부 식민지의 종교적 다양성 : Dutch Reformed, English Quakers
제 7 장 중부식민지에서의 종교적 다양성 : 독일 단체들
제 8 장 식민지의 장로교도들
제 9 장 New England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
제 10 장 중부와 남부 식민지에서의 대부흥
제 11 장 미국 식민지들에서의 선교사업과 자선사업
제 12 장 독립전쟁과 미국교회
제 13 장 미국 교회의 토착화
제 14 장 인구의 서부 이동과 대중교회의 발생
제 15 장 2차 대부흥운동과 개척지방의 교회분열
제 16 장 교회 조직의 시대와 현대 선교활동의 시작
제 17 장 불안정한 30년대와 40년대의 종교
제 18 장 노예제 분쟁과 분파 운동
제 19 장 남북부 교회와 남북전쟁
제 20 장 재건시기의 교회
제 21 장 교회와 변화하는 경제질서
제 22 장 교회와 도시성장
제 23 장 제 1 차 세계대전 : 번영과 불경기
제 24 장 폭풍의 10년을 지나서 세기 중엽에로
본문내용
아니라, 전쟁기간 전체를 통하여 미국 교회들에 적용될 수 있고 또 전쟁 후 짧은 기간 동안도 적용된다. 사실상 만일 교회들이 벌써 인간과 종교전진운동, 금주운동, 평신도 선교운동, 세계학생기독자연합회, 학생의용운동, 교회통일과 세계평화운동 등의 사업들을 증진하는데 개혁정신에 감염되어 있지 않았다면, 미국 교회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평화의 계획을 가지고 전쟁자체에 대해 그렇게 열심있는 지원자가 되지 아니하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싸우는 지원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결국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평화를 이루고 또 독일의 독재정치에 대항하는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모든 전쟁을 종결시킬 많은 확률이 있는 만치,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고 혹은 전쟁 이전 연간의 모든 월등한 개신교 교회지도자들이 열렬하게 지원하던 방법으로서 세계와 미국에서 기독교가 승리하게 할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을 고한 뒤 특별히 영어 사용하는 세계에는 절대평화주의의 유능한 주창자들이 상당한 수가 일어났다. 그들의 이 입장은 그들이 생각한 바 예수의 결정적 평화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의의가 깊은 다른 하나의 사실은 미서전쟁의 종식이래로 미국의 기독자 시민들은 더욱더 국제적인 정신으로 되어갔다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외국선교에대한 취미가 지배적인 흥미였다. 역동적 개성과 기독교의 신속한 세계승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모트와 스피어는 대학과 대학교 단체들 앞에서 인기있는 연사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대학들에 있는 젊은 남녀로서 YMCA, 혹은 YWCA하에, 혹은 어떤 교회 이사회의 후원하에 외지 기독교 봉사의 어떤 형태로든지 헌신하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전체 대학사회 어디에 가든지 학생자원단체들이 번창하였다. 극동에 있어서의 모트의 영향력과 광범위한 지식이 매우 잘 공인되었음으로 윌슨 대통령은 그에게 주중국 미국대사직을 수락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초청을 모트는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분명히 그가 세계의 비기독자 백성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24 장 폭풍의 10년을 지나서 세기 중엽에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환멸기 동안에 전쟁연간의 관념론을 경시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란 구절을 언급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것"을 계획적 사기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사실은 어떠냐 하면 잘못된 것은 전쟁연간의 관념론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 후 연간에 있어서 어떤 관념론의 결핍이었다. 진실로 전쟁연간의 관념론은 당시에도 타당하였던 것처럼 오늘도 타당하다. 전쟁의 이상들이 하나도 성취됨이 없음은 전쟁지도 체제때문이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종식 직시로 지배권을 얻게 된 미국의 지도체제의 형태 때문이었다.
192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시까지 한 강력한 평화운동이 영어사용하는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거의 즉시로 다수의 저명한 미국의 종교 지도자들은 베옷을 입고 또 재를 쓰고 그들의 제1차 대전 참여를 회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서 다시금 미국교회는 전쟁이란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전쟁참여 문제는 국민 앞과 교회 내에서 함께 신속하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특히 진주만 사건은 대부분의 사회복음 형태의 미국평화주의자들을 싫어하는 전쟁참가자로 변형시켜 버렸다. 진주만 폭격 이후 더 크리스찬 센추리지는 선포하기를, "우리가 전쟁을 시작하게 됨은 이제 불필요한 필연성이 되었다"고 하였다. 진주만 폭격 이전에 강경한 전쟁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교회단체들이, 이제는 만약 어떤 공의롭고 또 지속적인 평화가 존재하려면 추축국의 패배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과 전쟁 후에 미국 교회는 공중여론을 형성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행하였다. 교회신문과 공식 교회단체들의 많은 발언들은 세계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각성된 흥미를 입증한다. 미합중국이 전쟁에 참가한 지 얼마 후, 미국 그리스도 교회연합 평의회는 공의롭고 또 영속적 평화를 위한 근거들을 연구하기 위한 한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1948년 8월 22일에서 9월 4일 사이에 40개국으로부터 135개 교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암스텔담에 회집하여 세계교회 평의회를 형성하였다. 세계기독교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그 운동은 19세기의 두 개의 커다란 영향력에서 발생하였다. 첫째는, 세계의 모든 모퉁이까지 이르는 거대한 기독교의 선교팽창이었다. 둘째는, 기독교 백성들의 비점령지역에로의 이주였다.
☞ 평 가
전쟁에 대해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국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제기이다. 미국의 시작은 전쟁에서 시작하였고, 그 현장에 교회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전쟁을 방관했는가? 아니면, 전쟁을 적극 지지했는가? 아니면 전쟁에 대해 반대하였는가? 미국의 역사는 전쟁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관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교회가 몸소 앞장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역사속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변혁시키는 주체이다. 역사가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향할때는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 방관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미국의 역사는 역사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향할 때 교회는 과감히 거부했다. 오늘날에에도 다분히 정치적인 동기가 있긴 하지만, 미국의 의회 뒤에는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비스트로 깔려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조와 위배되게 의회가 움직이면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긍정적인 측면이란 바로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고, 실현해가는 전달자로서의 인간과 교회의 역할을 미국교회가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을 고한 뒤 특별히 영어 사용하는 세계에는 절대평화주의의 유능한 주창자들이 상당한 수가 일어났다. 그들의 이 입장은 그들이 생각한 바 예수의 결정적 평화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의의가 깊은 다른 하나의 사실은 미서전쟁의 종식이래로 미국의 기독자 시민들은 더욱더 국제적인 정신으로 되어갔다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외국선교에대한 취미가 지배적인 흥미였다. 역동적 개성과 기독교의 신속한 세계승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모트와 스피어는 대학과 대학교 단체들 앞에서 인기있는 연사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대학들에 있는 젊은 남녀로서 YMCA, 혹은 YWCA하에, 혹은 어떤 교회 이사회의 후원하에 외지 기독교 봉사의 어떤 형태로든지 헌신하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전체 대학사회 어디에 가든지 학생자원단체들이 번창하였다. 극동에 있어서의 모트의 영향력과 광범위한 지식이 매우 잘 공인되었음으로 윌슨 대통령은 그에게 주중국 미국대사직을 수락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초청을 모트는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분명히 그가 세계의 비기독자 백성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24 장 폭풍의 10년을 지나서 세기 중엽에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환멸기 동안에 전쟁연간의 관념론을 경시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란 구절을 언급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것"을 계획적 사기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사실은 어떠냐 하면 잘못된 것은 전쟁연간의 관념론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 후 연간에 있어서 어떤 관념론의 결핍이었다. 진실로 전쟁연간의 관념론은 당시에도 타당하였던 것처럼 오늘도 타당하다. 전쟁의 이상들이 하나도 성취됨이 없음은 전쟁지도 체제때문이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종식 직시로 지배권을 얻게 된 미국의 지도체제의 형태 때문이었다.
192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시까지 한 강력한 평화운동이 영어사용하는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거의 즉시로 다수의 저명한 미국의 종교 지도자들은 베옷을 입고 또 재를 쓰고 그들의 제1차 대전 참여를 회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서 다시금 미국교회는 전쟁이란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전쟁참여 문제는 국민 앞과 교회 내에서 함께 신속하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특히 진주만 사건은 대부분의 사회복음 형태의 미국평화주의자들을 싫어하는 전쟁참가자로 변형시켜 버렸다. 진주만 폭격 이후 더 크리스찬 센추리지는 선포하기를, "우리가 전쟁을 시작하게 됨은 이제 불필요한 필연성이 되었다"고 하였다. 진주만 폭격 이전에 강경한 전쟁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교회단체들이, 이제는 만약 어떤 공의롭고 또 지속적인 평화가 존재하려면 추축국의 패배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과 전쟁 후에 미국 교회는 공중여론을 형성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행하였다. 교회신문과 공식 교회단체들의 많은 발언들은 세계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각성된 흥미를 입증한다. 미합중국이 전쟁에 참가한 지 얼마 후, 미국 그리스도 교회연합 평의회는 공의롭고 또 영속적 평화를 위한 근거들을 연구하기 위한 한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1948년 8월 22일에서 9월 4일 사이에 40개국으로부터 135개 교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암스텔담에 회집하여 세계교회 평의회를 형성하였다. 세계기독교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그 운동은 19세기의 두 개의 커다란 영향력에서 발생하였다. 첫째는, 세계의 모든 모퉁이까지 이르는 거대한 기독교의 선교팽창이었다. 둘째는, 기독교 백성들의 비점령지역에로의 이주였다.
☞ 평 가
전쟁에 대해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국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제기이다. 미국의 시작은 전쟁에서 시작하였고, 그 현장에 교회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전쟁을 방관했는가? 아니면, 전쟁을 적극 지지했는가? 아니면 전쟁에 대해 반대하였는가? 미국의 역사는 전쟁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관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교회가 몸소 앞장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역사속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변혁시키는 주체이다. 역사가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향할때는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 방관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미국의 역사는 역사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향할 때 교회는 과감히 거부했다. 오늘날에에도 다분히 정치적인 동기가 있긴 하지만, 미국의 의회 뒤에는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비스트로 깔려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조와 위배되게 의회가 움직이면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긍정적인 측면이란 바로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고, 실현해가는 전달자로서의 인간과 교회의 역할을 미국교회가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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