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바울이 이 용어를 그토록 자주 그리고 중요하게 사용했는 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만든다.
명사 euangelion은 바울 이전에 이미 희랍 문헌과 비문에서 사용되었다. Homer의 Odyssey에서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는 상급"(14.152, 166)을 가리켰다. "좋은 소식" 또는 단순히 "소식"이라는 의미로 이 단어는 희랍 문서들에서 종종 발견된다.
) 예를 들면 Plutarch, Sertor. 11.4; Appian, Bell. civ. 3.93 §384; 4.20 §78; Josephus, J.W. 2.17, 4 §420; 4.10, 6 §618. euangelion/euangelia에 대한 세속적인 용법은 희랍어 구약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삼하 4:10; 18:20. 22. 25. 27; 왕하 7:9; 렘 20:15.
이 단어가 "좋은 소식을 얻기 위하여"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칭할 때에는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 예를 들면 Diodorus Siculus 15.74, 2; Plutarch, Sertor. 26.3을 참조.
이 단어에 대한 보다 중요한 용법은 1899년에 최초로 출판된 소아시아 지방의 프리에네(Priene)의 달력 비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비문은 새해 첫날을 9월 23일이었던 황제 아우구스도와의 탄생일과 일치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로마의 아시아 주(州)에서 율리우스력(曆)을 사용하도록 소개하는 글의 일부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신(= 신의 아들 [divi filius]인 아우구스도)의 [탄생일]은 그로 말미암은 세상을 향한 모든 선한 소식의 시작이었다( rxen de t kosm t n di' autou euangeli [ n h genethlios] tou theou).
) 이에 관해서는 Wilhelm Dittenberger, Orientis graeci inscriptiones selectae (2 vols.; Leipzig, S. Hirzel, pp. 1903-05; reprinted, Hildesheim, G. Olms, 1970, sec. 458, pp. 40f. Cf. Wilhelm Schneemelcher, "1. Gospel", in Hennecke and Schneemelcher, eds., New Testament Apocrypha, trans. by R. M. Wilson (2 vols.; London, Lutterworth Press, 1963, 1965), I, 71-75 을 참조하라.
여기에서는 복수 euangelia의 신탁적인(beneficial), 심지어는 신성한 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당대에 euangelion의 용법에 관한 상당한 희랍적인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은 euangelion에 대한 바울적 용법을 전부 이 배경 하에서만 설명하는 일에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euangelizesthai라는 용어가 희랍어 구약성경에서 보다 가까운 종교적 의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시 68:12; 96:2; 나 2:1; 사 52:7; 참조, 솔로몬의 시편 11:1).
) 바울적 용법에 대한 배경은 Peter Stuhlmacher, Das paulinische Evangelium: I. Vorgeschichte (FRLANT), 95; Go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68)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는 종종 히브리어 명사 b r h, "(사자에 의해 선포되는) 좋은 소식"의 번역이다. 종교적인 용법에 있어서 바울이 당대의 황제 숭배에 크게 의존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바울이 말하는 euangelion의 종말론적인 함의(含意)와 황제 숭배의 신탁적인 함축 의미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더욱이 바울 자신이 "복음"(10:16)의 선포에 대해 말하는 문맥인 로마서 10장 15절에서 정확하게 이사야 52장 7절을 의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euangelion의 개념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그의 메시지에 대한 개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물론, 기독교적 선포(kerygma)가 고린도전서 15:1-2이 암시하듯이 바울 이전에 euangelion이라는 개념으로 확정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분명치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쨋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주되심과 그를 통해 인류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새로운 방식(mode)에 대한 좋은 소식을 euangleion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적 용례는 당대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행해지던 황제 숭배에서의 euangelion에 대한 소위 신성한 또는 신탁적인 용법과는 독립적으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의 euangelion에 대한 용법을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문서들에 나타난 용법과 관련 짓는 것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된 복음"(롬 1:2)에 대한 바울의 언급과 바울 자신이 전했던 복음의 언약적인 특성 간의 미묘한 차이를 더 잘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비록 euangelion이라는 단어를 문학적 구성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용법이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가정이다. 우리는 앞서 바울의 euangelion에 대한 용법이 마가가 예수의 활동과 말씀에 대한 자신의 진술에서 그 개념을 도입하게 된 전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거기서부터 이 용어는 다른 "복음서들"(정경 및 외경)을 지칭하는 기독교적 단어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이 용어가 지닌 독특한 기독교적 용법은 희랍어 euangelion이 라틴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nuntius bonus로 번역되지 않고, 희랍어 euangelion이 지닌 독특한 내용과 의미 때문에 단순히 evangelium으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라틴어에서 evangelium으로 표기된 이 단어는 후에 로망스 말에서 vangile, vangelo, evangelio 등으로 확산되었다.
명사 euangelion은 바울 이전에 이미 희랍 문헌과 비문에서 사용되었다. Homer의 Odyssey에서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는 상급"(14.152, 166)을 가리켰다. "좋은 소식" 또는 단순히 "소식"이라는 의미로 이 단어는 희랍 문서들에서 종종 발견된다.
) 예를 들면 Plutarch, Sertor. 11.4; Appian, Bell. civ. 3.93 §384; 4.20 §78; Josephus, J.W. 2.17, 4 §420; 4.10, 6 §618. euangelion/euangelia에 대한 세속적인 용법은 희랍어 구약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삼하 4:10; 18:20. 22. 25. 27; 왕하 7:9; 렘 20:15.
이 단어가 "좋은 소식을 얻기 위하여"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칭할 때에는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 예를 들면 Diodorus Siculus 15.74, 2; Plutarch, Sertor. 26.3을 참조.
이 단어에 대한 보다 중요한 용법은 1899년에 최초로 출판된 소아시아 지방의 프리에네(Priene)의 달력 비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비문은 새해 첫날을 9월 23일이었던 황제 아우구스도와의 탄생일과 일치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로마의 아시아 주(州)에서 율리우스력(曆)을 사용하도록 소개하는 글의 일부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신(= 신의 아들 [divi filius]인 아우구스도)의 [탄생일]은 그로 말미암은 세상을 향한 모든 선한 소식의 시작이었다( rxen de t kosm t n di' autou euangeli [ n h genethlios] tou theou).
) 이에 관해서는 Wilhelm Dittenberger, Orientis graeci inscriptiones selectae (2 vols.; Leipzig, S. Hirzel, pp. 1903-05; reprinted, Hildesheim, G. Olms, 1970, sec. 458, pp. 40f. Cf. Wilhelm Schneemelcher, "1. Gospel", in Hennecke and Schneemelcher, eds., New Testament Apocrypha, trans. by R. M. Wilson (2 vols.; London, Lutterworth Press, 1963, 1965), I, 71-75 을 참조하라.
여기에서는 복수 euangelia의 신탁적인(beneficial), 심지어는 신성한 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당대에 euangelion의 용법에 관한 상당한 희랍적인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은 euangelion에 대한 바울적 용법을 전부 이 배경 하에서만 설명하는 일에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euangelizesthai라는 용어가 희랍어 구약성경에서 보다 가까운 종교적 의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시 68:12; 96:2; 나 2:1; 사 52:7; 참조, 솔로몬의 시편 11:1).
) 바울적 용법에 대한 배경은 Peter Stuhlmacher, Das paulinische Evangelium: I. Vorgeschichte (FRLANT), 95; Go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68)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는 종종 히브리어 명사 b r h, "(사자에 의해 선포되는) 좋은 소식"의 번역이다. 종교적인 용법에 있어서 바울이 당대의 황제 숭배에 크게 의존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바울이 말하는 euangelion의 종말론적인 함의(含意)와 황제 숭배의 신탁적인 함축 의미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더욱이 바울 자신이 "복음"(10:16)의 선포에 대해 말하는 문맥인 로마서 10장 15절에서 정확하게 이사야 52장 7절을 의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euangelion의 개념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그의 메시지에 대한 개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물론, 기독교적 선포(kerygma)가 고린도전서 15:1-2이 암시하듯이 바울 이전에 euangelion이라는 개념으로 확정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분명치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쨋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주되심과 그를 통해 인류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새로운 방식(mode)에 대한 좋은 소식을 euangleion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적 용례는 당대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행해지던 황제 숭배에서의 euangelion에 대한 소위 신성한 또는 신탁적인 용법과는 독립적으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의 euangelion에 대한 용법을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문서들에 나타난 용법과 관련 짓는 것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된 복음"(롬 1:2)에 대한 바울의 언급과 바울 자신이 전했던 복음의 언약적인 특성 간의 미묘한 차이를 더 잘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비록 euangelion이라는 단어를 문학적 구성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용법이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가정이다. 우리는 앞서 바울의 euangelion에 대한 용법이 마가가 예수의 활동과 말씀에 대한 자신의 진술에서 그 개념을 도입하게 된 전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거기서부터 이 용어는 다른 "복음서들"(정경 및 외경)을 지칭하는 기독교적 단어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이 용어가 지닌 독특한 기독교적 용법은 희랍어 euangelion이 라틴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nuntius bonus로 번역되지 않고, 희랍어 euangelion이 지닌 독특한 내용과 의미 때문에 단순히 evangelium으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라틴어에서 evangelium으로 표기된 이 단어는 후에 로망스 말에서 vangile, vangelo, evangelio 등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