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으로 나타난다. 곧 신체적 건강으로, 경제적 빈곤에서의 해방으로, 사회적 갈등의 극복 등 모든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는 힘으로 지금 여기에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사단을 결정적으로 이겼다. 그러나 사단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단은 등뼈가 부러졌지만, 아직도 사지에 힘이 남아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죄를 저지르게 하려고 사주하고, 죄악을 저지르면 죽음으로 그 삯을 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여기에 있는가 하면, 사단의 나라의 죽음도 여기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단을 자기 발등상에 두시고, 사단을 완전히 무력화했을 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이 두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사단을 주로 고백하면(사단의 말을 따르면) 죄와 죽음을 맛보는 것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말을 따르면 구원을 맛보는 것이다. 지금 현재 여기서 체험하는 것이다. 지금 그 구원이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통치 속으로 이미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단이 우리에게 와서 자꾸 속삭이는 것이다. 네 이익을 위해서 살라고. "저놈의 것을 조금 더 착취하라. 저 원수를 갚으라"고. 그러나 그렇게 하면 죽음이 자꾸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반면, 그순간 예수는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용서하라, 이웃을 섬겨라"고 하신다. 예수의 말을 들으면 샬롬이 확대된다. 자유가 그만큼 확대된다. 건강도 확대된다.
자, 그러니까 이 구원이 관념화되고 추상화되어서 미래에, 내세에 영원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을 받을텐데,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우리가 있게 됨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체험하는가? 우리의 실존의 결단으로 시시각각의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사단을 주로 섬기고 그의 뜻을 좇을 것인가? 하나님 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에 따라 죽음을 열매로 거두든지, 삶을 열매로 거두든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가치 판단의 순간마다,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우리가 세례받을 때에 고백했던 믿음(우리를 믿는 자 되게 한 믿음, 우리의 구원의 사건이 되었던 그 믿음)이 지금 현재 실재화(actualize)되고, 그때 얻었던 구원이 지금 현재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 또는 단편적이다. 왜냐하면, 종말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한 자들에게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는가? 두 가지 계명을 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막 12:28-34).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존과 순종)은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말이다. 보통 사람은 나무나 돌 조각에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지만, 예수는 맘몬에 대한 것을 경계하셨다. 돈에 대한 우상숭배는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옛 아담적 자아(하나님이 필요없음,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존하지 않음 -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 한다. 그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은 돈이다.), 즉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자아는 돈으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삶의 원칙은 착취의 원칙이 된다. 곧 이웃에 대한 자기 주장이다. 그래서 그런 삶의 자세는 불의와 갈등 곧 상호 공포(삭개오적 존재가치)에 빠지게 된다. (예 : 미국처럼 인간성의 황폐, 인간 관계의 단절, 갈등, 쾌락주의에서의 죽음 등 한마디로 죽음을 가져온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온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의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신다고 하신다. 내가 그의 무한한 덕을 덧입음, 그래서 내가 시시각각으로 기도 가운데 "아빠" 하고 말하면서 그의 자원을 끌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되고, 맘몬을 상대화 할 수 있다. 그리고 맘몬을 자기 安全과 幸福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이웃을 섬기는데 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맘몬을 섬기면 죽음을 가져오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자세는 지금 여기에 더 많은 自由와 더 많은 正義와 더 많은 진정한 의미의 풍요를 가져온다. 부의 불공정한 분배는 불의와 자유의 결핍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풍요의 결핍도 가져온다. 즉 富의 불공정한 분배는 앞으로 굶어죽는 사람에게만 빈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풍요 속에서도 죽어가는 현상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가져오는 구원, 곧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 올바르게 연결시켜서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으로 그에게 의존함과 순종함으로 살고 이웃과 올바르게 관계를 갖는 그런 구원은 종말에 완성될 것이지만, 오늘 여기에서 좀더 많은 자유와 좀더 많은 풍요와 좀더 많은 正義, 平和, 곧 生命의 북돋음 -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온전해지는 무엇에게까지도 - 으로 지금 現在에 實在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육신적 메시야 사상은, 또 그것의 아류들인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적 문명 낙관론의 내재적인 메시야 사상은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자유, 좀더 많은 정의, 좀더 많은 풍요도 확보하지 못한다. 여기에 갈림길이 있다.
예수의 메시야 됨이 얼마나 오묘하고 진리다운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 또는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본주의적 메시야 사상, 내재주의적 메시야 사상, 그것이 자본주의 형태로 나타나든, 문명 낙관론 인본주의로 나타나든, 공산주의로 나타나든, 해방신학으로 나타나든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메시야 사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진정한 救媛을 가져다 줄 수 없다!
NADO7
황금교회 라황용드림
☏(0655) 32-8875
자, 그러니까 이 구원이 관념화되고 추상화되어서 미래에, 내세에 영원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을 받을텐데,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우리가 있게 됨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체험하는가? 우리의 실존의 결단으로 시시각각의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사단을 주로 섬기고 그의 뜻을 좇을 것인가? 하나님 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에 따라 죽음을 열매로 거두든지, 삶을 열매로 거두든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가치 판단의 순간마다,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우리가 세례받을 때에 고백했던 믿음(우리를 믿는 자 되게 한 믿음, 우리의 구원의 사건이 되었던 그 믿음)이 지금 현재 실재화(actualize)되고, 그때 얻었던 구원이 지금 현재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 또는 단편적이다. 왜냐하면, 종말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한 자들에게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는가? 두 가지 계명을 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막 12:28-34).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존과 순종)은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말이다. 보통 사람은 나무나 돌 조각에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지만, 예수는 맘몬에 대한 것을 경계하셨다. 돈에 대한 우상숭배는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옛 아담적 자아(하나님이 필요없음,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존하지 않음 -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 한다. 그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은 돈이다.), 즉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자아는 돈으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삶의 원칙은 착취의 원칙이 된다. 곧 이웃에 대한 자기 주장이다. 그래서 그런 삶의 자세는 불의와 갈등 곧 상호 공포(삭개오적 존재가치)에 빠지게 된다. (예 : 미국처럼 인간성의 황폐, 인간 관계의 단절, 갈등, 쾌락주의에서의 죽음 등 한마디로 죽음을 가져온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온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의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신다고 하신다. 내가 그의 무한한 덕을 덧입음, 그래서 내가 시시각각으로 기도 가운데 "아빠" 하고 말하면서 그의 자원을 끌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되고, 맘몬을 상대화 할 수 있다. 그리고 맘몬을 자기 安全과 幸福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이웃을 섬기는데 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맘몬을 섬기면 죽음을 가져오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자세는 지금 여기에 더 많은 自由와 더 많은 正義와 더 많은 진정한 의미의 풍요를 가져온다. 부의 불공정한 분배는 불의와 자유의 결핍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풍요의 결핍도 가져온다. 즉 富의 불공정한 분배는 앞으로 굶어죽는 사람에게만 빈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풍요 속에서도 죽어가는 현상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가져오는 구원, 곧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 올바르게 연결시켜서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으로 그에게 의존함과 순종함으로 살고 이웃과 올바르게 관계를 갖는 그런 구원은 종말에 완성될 것이지만, 오늘 여기에서 좀더 많은 자유와 좀더 많은 풍요와 좀더 많은 正義, 平和, 곧 生命의 북돋음 -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온전해지는 무엇에게까지도 - 으로 지금 現在에 實在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육신적 메시야 사상은, 또 그것의 아류들인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적 문명 낙관론의 내재적인 메시야 사상은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자유, 좀더 많은 정의, 좀더 많은 풍요도 확보하지 못한다. 여기에 갈림길이 있다.
예수의 메시야 됨이 얼마나 오묘하고 진리다운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 또는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본주의적 메시야 사상, 내재주의적 메시야 사상, 그것이 자본주의 형태로 나타나든, 문명 낙관론 인본주의로 나타나든, 공산주의로 나타나든, 해방신학으로 나타나든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메시야 사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진정한 救媛을 가져다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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