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실은 인간 상호간의 만남 속에서 숙성되는 과정에 해당된다. 그것은 결코 단
절되어 있는 감정이 아니다.
□ 헤아림
* "이웃에게 불리한 말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증언"이란, 어떠한 정해진 상황에서 "우리의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것과 연관된다. 우리의 증언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가, 누구를 위한 말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힘있는 사람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들,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아무런 특권이 없는 사람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말인가?"를 헤아려야 한다. "한 사람이 혹은 공동체가 '진실'이라는 명찰을 달고 '자기 중심적인 확신'속에서 내뱉은 독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픔으로 몰아 넣고 시대를 병들게 했는지 모른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작년에 新공안정국을 만들어 냈던 "박 홍씨의 주사파 발언"이나 일방적인 매스컴의 보도가 그 좋은 예이다.
* 사람들 서로가 "진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신뢰의 풍토", 이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는 사건을, "마디 마디 끊어진 감정이나 단절된 결과만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는 전체의 과정"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눈을 가지지 않을 때 쉽사리 거짓증언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게 된다. 모든 증언은 실로 "이웃의 생명과 명예와 삶에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책임, 즉 이웃에 대한 존경과 책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 져야 하고, 인간 상호간의 신뢰를 이어가는 "사회적인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마치 흑백그림을 그리듯이 어떠한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경솔하게 잘잘못을 자기 식으로 가위질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 "진실"의 가정 무서운 적은 직접적인 거짓말 속에 보다는 오히려 "성과" 혹은 "결과"만을 향한 눈 속에 있다. "성과 혹은 결과"에 눈이 멀어버린 경우에 진실을 말하거나 추구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속에는 사람의 관계가 자라잡지 못하고 냉정한 탐욕이나 이기심만이 자리하고 있다. 성과에 맞추어 매사를 판단해서는 안되며, 성과가 있는 것이, 양이 많은 것이, 비싼 것이,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결과를 묻는 물음으로 진실을 묻는 물음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 나 눔
* "거짓 증언을 못한다"는 계명이 지금 당신에게 어떠한 생각을 갖게 합니까?
* 우리 삶에서 발견되는 "진실의 명찰을 달고 있는 자기확신"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 "진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신뢰의 풍토"를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나 태도는 어떠한 것인지를 나누어 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 열한번째) 199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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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 앎
* "탐낸다"는 것은 "탐내는 감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취하는 행동"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실로 후속행동이 뒤따르는 "지향성을 지닌 감정"이다. "그릇된 소유충동의 행위(도둑질)"를 자극하는 탐심을 제어하고 이를 금하지 않고서는 이웃 사랑이 불가능해지며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만다.
* 계약공동체의 평화와 평등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원칙은 "인간의 동등한 상호성"이다. 누구나 서로를 침해할 수 없고, 서로의 "집"을 침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집"은 매매가 가능한 물건이 아니라 "공동체를 실현해 가는 최소의 단위"를 뜻하고, 대대를 이어 사람됨을 이루어 가는 "기본적인 권리공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웃의 "집"에 대한 "탐심"은 이웃의 기본 권리와 기초공동체 실현의 일상적 과정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행위이다.
* 어떠한 권리에 있어서도 일상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권리의 일상성"을 침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곧 "이웃의 인격적인 영역을 침해하고 삶을 실종시키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빚을 갚아야 하는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조차도 가난한 이웃의 일상적이고 인격적인 권리공간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많은 경우에 빚을 갚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일상적 권리를 부자들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빼앗기거나 농락 당하기 쉽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 헤아림
* "탐심"은 다른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는 "약탈자의 기질"이다.
*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 계명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경쟁력을 악용하는 행위" 쯤 될 것이다.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매년 오르는 전세금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집주인의 높은 집세 강요는 이러한 종류의 착취에 해당된다. 집을 헐고 건물을 지어 높은 수익을 올리려고 하는 집주인의 욕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권리를 빼앗고 농락하는 것이다. "능률과 소비의 경쟁"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하여 사람들의 욕구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또 자극하는 것은 사물의 가치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기준 속에서 자연을 착취하고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시키는 자연 약탈행위도 이에 해당된다.
* 이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이윤을 얻는다는 것"이 힘없는 이웃으로 하여금 "생존권의 일부를 잃게 하는 빼앗음"을 근거하고 있는 현실을 향하여 이 계명은 말하고 있다. "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는 "내" 몫에 대한 주장만 알고 있는 약탈적인 시대상은 사람의 인격적인 공동체를 없애버린다.
□ 나 눔
* 이 계명을 읽고 지금 당신은 어떠한 생각을 하게됩니까?
* 나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실용적인 가치나 필요에 중요성을 두고 있습니까?
* 오늘날 이 계명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생활 속에서 목적달성을 위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하는지 말해봅시다.
절되어 있는 감정이 아니다.
□ 헤아림
* "이웃에게 불리한 말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증언"이란, 어떠한 정해진 상황에서 "우리의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것과 연관된다. 우리의 증언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가, 누구를 위한 말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힘있는 사람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들,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아무런 특권이 없는 사람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말인가?"를 헤아려야 한다. "한 사람이 혹은 공동체가 '진실'이라는 명찰을 달고 '자기 중심적인 확신'속에서 내뱉은 독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픔으로 몰아 넣고 시대를 병들게 했는지 모른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작년에 新공안정국을 만들어 냈던 "박 홍씨의 주사파 발언"이나 일방적인 매스컴의 보도가 그 좋은 예이다.
* 사람들 서로가 "진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신뢰의 풍토", 이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는 사건을, "마디 마디 끊어진 감정이나 단절된 결과만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는 전체의 과정"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눈을 가지지 않을 때 쉽사리 거짓증언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게 된다. 모든 증언은 실로 "이웃의 생명과 명예와 삶에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책임, 즉 이웃에 대한 존경과 책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 져야 하고, 인간 상호간의 신뢰를 이어가는 "사회적인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마치 흑백그림을 그리듯이 어떠한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경솔하게 잘잘못을 자기 식으로 가위질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 "진실"의 가정 무서운 적은 직접적인 거짓말 속에 보다는 오히려 "성과" 혹은 "결과"만을 향한 눈 속에 있다. "성과 혹은 결과"에 눈이 멀어버린 경우에 진실을 말하거나 추구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속에는 사람의 관계가 자라잡지 못하고 냉정한 탐욕이나 이기심만이 자리하고 있다. 성과에 맞추어 매사를 판단해서는 안되며, 성과가 있는 것이, 양이 많은 것이, 비싼 것이,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결과를 묻는 물음으로 진실을 묻는 물음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 나 눔
* "거짓 증언을 못한다"는 계명이 지금 당신에게 어떠한 생각을 갖게 합니까?
* 우리 삶에서 발견되는 "진실의 명찰을 달고 있는 자기확신"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 "진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신뢰의 풍토"를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나 태도는 어떠한 것인지를 나누어 봅시다.
▣ 수요모임(십계명연구 열한번째) 199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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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읽기 / 출애굽기 20:1-17, 신명 5:6-21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 앎
* "탐낸다"는 것은 "탐내는 감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취하는 행동"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실로 후속행동이 뒤따르는 "지향성을 지닌 감정"이다. "그릇된 소유충동의 행위(도둑질)"를 자극하는 탐심을 제어하고 이를 금하지 않고서는 이웃 사랑이 불가능해지며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만다.
* 계약공동체의 평화와 평등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원칙은 "인간의 동등한 상호성"이다. 누구나 서로를 침해할 수 없고, 서로의 "집"을 침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집"은 매매가 가능한 물건이 아니라 "공동체를 실현해 가는 최소의 단위"를 뜻하고, 대대를 이어 사람됨을 이루어 가는 "기본적인 권리공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웃의 "집"에 대한 "탐심"은 이웃의 기본 권리와 기초공동체 실현의 일상적 과정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행위이다.
* 어떠한 권리에 있어서도 일상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권리의 일상성"을 침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곧 "이웃의 인격적인 영역을 침해하고 삶을 실종시키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빚을 갚아야 하는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조차도 가난한 이웃의 일상적이고 인격적인 권리공간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많은 경우에 빚을 갚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일상적 권리를 부자들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빼앗기거나 농락 당하기 쉽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 헤아림
* "탐심"은 다른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는 "약탈자의 기질"이다.
*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 계명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경쟁력을 악용하는 행위" 쯤 될 것이다.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매년 오르는 전세금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집주인의 높은 집세 강요는 이러한 종류의 착취에 해당된다. 집을 헐고 건물을 지어 높은 수익을 올리려고 하는 집주인의 욕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권리를 빼앗고 농락하는 것이다. "능률과 소비의 경쟁"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하여 사람들의 욕구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또 자극하는 것은 사물의 가치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기준 속에서 자연을 착취하고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시키는 자연 약탈행위도 이에 해당된다.
* 이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이윤을 얻는다는 것"이 힘없는 이웃으로 하여금 "생존권의 일부를 잃게 하는 빼앗음"을 근거하고 있는 현실을 향하여 이 계명은 말하고 있다. "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는 "내" 몫에 대한 주장만 알고 있는 약탈적인 시대상은 사람의 인격적인 공동체를 없애버린다.
□ 나 눔
* 이 계명을 읽고 지금 당신은 어떠한 생각을 하게됩니까?
* 나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실용적인 가치나 필요에 중요성을 두고 있습니까?
* 오늘날 이 계명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생활 속에서 목적달성을 위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하는지 말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