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사건의 배경과 경위
Ⅲ. 기소자 122인의 인물 분석
Ⅳ. 신민회 소속 인물의 분석과 사후 동향
Ⅴ.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
Ⅱ. 사건의 배경과 경위
Ⅲ. 기소자 122인의 인물 분석
Ⅳ. 신민회 소속 인물의 분석과 사후 동향
Ⅴ.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
본문내용
3·1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는지는 모르나 국가민족의 항일독립정신만은 결국 단절시키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표(表)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3·1운동과의 맥락에서 투명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Ⅴ.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
일제치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은 일제의 박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안악사건과 신민회사건(105인사건)은 바로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특히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직후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대규모의 항일민족 탄압사건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최대의 박해 사건이었다. 이 박해사건은 구한말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이 신민회를 통해 민족운동에 대거 참여한 것에 대한 일제측의 보복이며 식민통치 벽두에 기독교도를 비롯한 한민족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위협이었다.
105인 사건은 선교사가 연루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끌게 했던 개항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안태국의 뛰어난 기억력에 의한 반박으로 일제통치의 비도덕성과 만행이 세계에 널리 폭로되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러 각도에서 이 사건이 갖는 민족사 및 한국교회사적인 의의는 적지 않다. 1900년대 민족운동의 핵심체였던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려 했던 독립운동을 이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외에도 교회사적인 면에서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윤경로 교수가 105인 사건의 기소자 122명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그 중 기독교 신자가 82명을 차지하여 전체의 90%를 넘고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말 서북지방의 기독교도가 신민회 등을 통하여 한국민족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반대로 일제는 기독교를 한민족 통치의 장애물로 생각하여 교회를 탄압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상 1907년을 기점으로 볼 때 일반 기독교 신자와 항일운동진영 사이에는 민족운동사적인 측면에서 인식의 편차가 심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이러한 인식의 양극적 편차가 좁아지게 되고 일치될 수 있어서, 105인 사건은 그후 기독교의 민족운동성을 보다 강화시켜 주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국 민족운동의 촤고봉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意義)라고 한다면,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민족운동성과 한국교회의 신앙, 신념체계와의 관계성이 갈등관계, 충돌관계에 놓여져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정치적 민족운동에 민족구원사상, 민주민권사상이라는 이념적 근거가 되어줌으로서 역사와 신앙의 문제를 상호보완 하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사건의 교회사적 의의는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즉, 개인구원만을 너무 강조한다거나, 혹은 사회구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분법적 사고-생활 구조를 지양하도록 요청한다.
Ⅴ.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
일제치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은 일제의 박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안악사건과 신민회사건(105인사건)은 바로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특히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직후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대규모의 항일민족 탄압사건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최대의 박해 사건이었다. 이 박해사건은 구한말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이 신민회를 통해 민족운동에 대거 참여한 것에 대한 일제측의 보복이며 식민통치 벽두에 기독교도를 비롯한 한민족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위협이었다.
105인 사건은 선교사가 연루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끌게 했던 개항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안태국의 뛰어난 기억력에 의한 반박으로 일제통치의 비도덕성과 만행이 세계에 널리 폭로되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러 각도에서 이 사건이 갖는 민족사 및 한국교회사적인 의의는 적지 않다. 1900년대 민족운동의 핵심체였던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려 했던 독립운동을 이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외에도 교회사적인 면에서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윤경로 교수가 105인 사건의 기소자 122명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그 중 기독교 신자가 82명을 차지하여 전체의 90%를 넘고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말 서북지방의 기독교도가 신민회 등을 통하여 한국민족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반대로 일제는 기독교를 한민족 통치의 장애물로 생각하여 교회를 탄압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상 1907년을 기점으로 볼 때 일반 기독교 신자와 항일운동진영 사이에는 민족운동사적인 측면에서 인식의 편차가 심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이러한 인식의 양극적 편차가 좁아지게 되고 일치될 수 있어서, 105인 사건은 그후 기독교의 민족운동성을 보다 강화시켜 주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국 민족운동의 촤고봉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意義)라고 한다면,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민족운동성과 한국교회의 신앙, 신념체계와의 관계성이 갈등관계, 충돌관계에 놓여져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정치적 민족운동에 민족구원사상, 민주민권사상이라는 이념적 근거가 되어줌으로서 역사와 신앙의 문제를 상호보완 하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사건의 교회사적 의의는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즉, 개인구원만을 너무 강조한다거나, 혹은 사회구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분법적 사고-생활 구조를 지양하도록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