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교 -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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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2) [명백한 운명인가?]
(3) [인디언은 누구인가?]
(4) [미국원주민의 기원과 가치관]
(5) [백인들을 만난 미국원주민]
(6) [인디언들과 미국정부와의 관계]

본문내용

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들이 어떠한 역사를 거쳐서 현재의 상황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분석은 사역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인디언들은 결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역사가 오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상처는 더욱 현실로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흔히 "왜 인디언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원시적이고, 미개한 삶을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조금이나마 안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그들의 최근에 입은 상처에 대한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원주민들의 최후의 보루인 중부 대평원
동서를 먼저 점령당한 미국원주민들은 이제 남은 곳은 중부대평원밖에 없다. 이곳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것은 다음 몇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지리적 조건이 동부와 서부에 비해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백인들의 관심을 덜 받았다는 것. 둘째, 19세기 중엽의 서부 개척을 둘러싼 급박한 정세와 남북전쟁으로 정부의 관심이 분산되었다는 것. 셋째, 중부 대평원에는 다른 지역보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원주민 부족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입장에서는 다른 지역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중부 대평원 원주민들과는 가급적 평화조약을 통해서 힘의 손실을 방지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남북전쟁도 끝나고, 서부개척의 열기도 한풀 꺾인 1870년대에 들어와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정부로서 그 동안 아껴두었던 중부 대평원에 손질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중부 대평원을 중심으로한 정부의 정책은 두차례에 걸친 「라라미 요새 조약」을 통해 요약될 수 있다.
라라미 요새 조약의 배경에는 금광이 있었다
중부 대평원의 역사와 라라미 요새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834년 인디언들과의 모피거래를 위한 무역거리소로서 포트 윌리암스로 출발했던 이곳은 1841년 그곳을 통과하던 강의 이름을 따라서 포트 플래트로 명명되었다가 1849년에는 정부의 대륙확장계획에 따라서 군사기지로 매입되면서 이름이 포트 라라미로 개명되었다. 이 요새가 대평원 원주민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기지를 중심으로 인디언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졌음은 물론 미국원주민과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조약을 체결한 이유 때문이다. 1848년 캘리포니아의 금광이 발견되면서 서부로 향하는 개척자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되자 정부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1851년 수우(Sioux)인디언들과 이곳에서 첫 번째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의 내용은 백인들의 안정보장, 서부로 향하는 통로의 확보가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 조약 이후로 중부 대평원은 오레곤 길, 캘리포니아 길, 몰몬 길 등의 통로와 동서를 가로지르는 유니언 패시픽 철도 등으로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조약을 통해서 인디언들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토지소유권을 확보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금광으로 가는 길에는 원주민들의 생존권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동서의 양쪽으로 압박을 당하던 인디언들은 한마디로 갈곳이 없는 포위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이 지나지않아 몬태나 주의 버지니아 시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정부는 1851년의 첫 번째 라라미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몬태나 주로 향하여 '보즈만 길'이라는 통로를 세우며, 곳곳에 군사 요새를 건설하였다. 대평원의 막강한 수우 족은 래드 클라우드 추장을 중심으로 생명을 건 전투를 벌였으며, 당시 남북전쟁에 전력투구를 하던 정부는 이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던 이유로 패배하게 되면서 정부는 1868년 라라미 요새에서 두 번째의 조약을 맺으면서 수우 족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영원한 인디언 구역으로 그레이트 수우 보호구역(The Great Sioux Reservation)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 특기할 사항은 번번히 파기되는 조약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디언의 땅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의미에서 어떤 경우에도 인디언 남자 성인의 4분지 3의 서명이 없으면 조약의 내용을 변경할 수 없다는 단서를 첨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디언 종말의 삼각지대인 라라미 요새, 리틀 빅혼 그리고 운디드 니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 전력을 정비한 정부는 이 지대를 점령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드디어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은 1870년 직후 그레이트 수우 보호구역 중심부인 블랙힐즈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신문지상에 공개한 사람은 바로 천주교 선교사였던 쟝 스메트(Jean de Smet) 신부였다. 그가 메스컴에 이 소식을 전달하게 되자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정부는 1874년 남북전쟁의 영웅인 죠지 카스터 장군을 대장으로 하는 제7기병대를 이곳에 급파하여 금광 발견 소식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으며, 이 사건은 인디언들의 대미 항쟁을 막바지로 치닫게 하였다. 엄청난 금광이 있는 블랙힐즈 지역을 매입하려던 시도가 인디언들에 의해 거부 당하자, 1876년 제7기병대와 수우 족의 최대 부족인 라코타 족과 샤이엔 족의 연합군은 몬태나 주의 리틀 빅혼에서 결전을 벌였으며, 여기서 제7기병대는 치욕적인 전멸을 당하는 반면, 시팅불(Sitting Bull)과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추장은 승리자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게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인디언들도 너무 전력을 탕진한 나머지 재차 몰려오는 군사들을 감당할 길이 없어 시팅불은 캐나다로 망명하였으며, 크레이지 호스는 네브라스카 서북부의 로빈슨 요새로 투항하는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위대한 지도자들을 잃은 라코타 수우 족은 1890년 12월 29일 성탄절이 지난 직후 사우스다코타 주의 서남부에 위치한 파인리지 보호구역 내의 운디드 니에서 약 300명이 학살 당하면서 최종적으로 패배하게 되었다. 파인리지는 미국원주민들의 마지막 항쟁터로서 유명한 곳이며 이들의 한이 서려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1973년도에는 원주민들이 또 다시 무장 항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현재에도 절망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며 필자가 3년째 사역을 하고있는 곳이기도 하다.

키워드

미국,   선교,   원주민
  • 가격2,3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2.10.27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8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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