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영화 운동으로서의 영상시대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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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머리말
1. 문제 제기
2. 연구 목적 및 방법

II. 한국영화사에서의 1970년대라는 시기

III. 청년영화 운동으로서의 영상시대
1. 영상시대가 결성되기까지
2. 영상시대의 결성 배경
3. 영상시대의 활동과 성과
4. 영상시대의 작품 경향

IV. 영상시대 운동에 대한 재평가와 재지도그리기
1. 영상시대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2. 영상시대 운동의 한계

V. 맺음말

본문내용

어 다시 만나리>와 <한네의 승천>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타협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김호선은 좀 예외의 경우였다. 그는 데뷔작 <환녀>를 제외한 1970년대 작품들 모두를 대중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타협'을 넘어서 현실에 안주했다고 밖에 볼 수 없게 만든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흥행 성공으로 고무된 그가 다음 작품(<여자들만 사는 거리>) 역시 같은 작가의 비슷한 내용의 작품 '모범작문'(조선작) 을 선택해 그럭저럭 또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대중성(또는 흥행성)이 이미 담보된 '대중소설의 영화화'의 유혹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안병섭의 말대로, "문학에서 소재를 빌어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영화작가가 문학가가 쓴 것을 보여준다는 영화적인 매력 속에서의 특성을 살려 영화적으로 표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그가 소홀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이러한 현실에의 안주가 전체 '영상시대' 운동의 단결성에 심각한 흠집을 낸 것만은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자금력의 부족은 이들의 다른 활동들 역시 힘들게 했다. 이들이 '흥행 감독'들이었던 활동 초기에는 여러 영화사들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어 '신인배우 선발대회'와 '연출지망생 공개모집' 같은 행사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후 이들의 작품이 연거푸 실패하자 사정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타협'의 대가로 이들이 다음 작품을 제작할 수는 있었어도, 그들이 내세웠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신인 발굴과 양성'이 실패한 연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전문지의 발간 사업이 늦춰졌던 것도,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지 못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들의 작품이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한계였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고 하고 싶은 활동을 펼쳐나갈 충분한 자금력이 있었다면 '영상시대' 운동이 이처럼 몇 번의 실패로 허망하게 끝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V. 맺음말
1978년 6월 30일, 계간「영상시대」1978년 여름호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영상시대' 운동은 3년여라는 결코 짧지 않았던 기간 동안의 활동을 마감했다. 공식적으로 이들이 해체를 선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이들의 연대는 이어지지 않았고 서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어쩌면 1976년 이장호가 '대마초 사건'으로 '영화제작 활동 금지'라는 치명적인 징계를 받았을 때부터, 또는 1977년 하길종과 김호선이 조해일의 베스트셀러 소설 『겨울여자』의 영화화를 놓고 서로 경쟁하던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하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발족식 때의 의욕적인 열정은 잇단 '흥행 실패'라는 쓰라린 좌절로 사그라들었고, 서로의 강한 개성들이 이즈음부터 서서히 부딪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녕 이장호의 말처럼, "그들은 뜻을 뭉쳤다기보다는 단지 인기를 합쳐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영상시대' 해체 후, 이들의 행보 역시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 유일하게 '영상시대' 활동기간 내에도 흥행 가도를 달렸던 김호선은 <죽음보다 깊은 잠> <밤의 찬가>(1979)로 연거푸 고배를 마셨고, '대마초 사건'으로 징계를 받던 이장호는 광고영화, 문화영화, 심지어 애니메이션 <별나라 삼총사>(1979, 강한영) 기획 영업 등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홍 파는 <갑자기 불꽃처럼>(1979) <외출>(1983) 등으로 재기를 노려보지만 결국 실패하고 영화계를 떠났고, 홍의봉 역시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하길종은 <속 별들의 고향>(1978)과 <병태와 영자>(1979)로 다시 '흥행 감독'의 반열에 복귀하는 듯 했지만, 1979년 38세의 나이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이후 '한때나마 영화 동지였던' 것이 정말인가 싶을 정도로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며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는 누구를 탓하기보다 바로 그들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이러한 이들의 파행적인 이후 행보들로 인해 그들의 과거 행적이었던 '영상시대' 운동에 대한 평가는 점점 더 인색해져만 갔다.
하지만 이들에게, 더 나아가 이후 세대 영화인들에게 '영상시대' 운동이 전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활동이었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정성일이, "70년대 '새로운 물결' 감독들이 부수어 놓은 리얼리즘 전통"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난해마지 않았던 '영상시대'의 '새로운 영화'를 위한 노력은 이후 박광수, 장선우 등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코리안 뉴 웨이브 Korean New Wave'로 계속 이어졌고, 간접적이나마 이들에게 그 흔적을 남긴 것은 분명했다. 또한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이장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이원세) 같은 소위 1980년대의 문제작들이 우연이 아닌, 이들의 그 오랜 고민과 방황의 끝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시 연대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그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상시대' 운동이 '1970년대 한국'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만 그 존재가치를 가지는, 그래서 현재의 시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활동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특히 1980년대의 '영화운동론'에 따른다면 '영상시대'는 결코 '영화운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성질의 활동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상시대' 역시 '변화'가 절실히 필요했던 당대의 시대적 요구에 의해 등장한 소중한 우리 영화인들의 노력임에는 틀림없었고, 비록 사상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동일한 시기와 장소에서 영화제작에 구별되는 전제들을 공유하며 작업한 영화제작인들의 무리"로서 "형식적, 양식적, 주제적 요소들을 공유"했던 '영화운동'으로서의 성립요건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활동이 비록 사소하게 비춰질 수는 있어도, 결코 그 존재 자체까지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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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29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9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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