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들에게는 예수가 선언한 이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갈등과 불안과 위기를 가져다 주는 엄청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 그러므로 예수가 선언한 복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울 수 있는 복있는 사람이란 평화를 만들어내고 그 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마 5,9). 그들이야 말로 정말로 "복되도다"라고 칭찬받을 사람들인 것이다. 평화를 세우라는 부탁은 특별히 지혜적인 권면으로서 주로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평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된 평화를 내포하고 있다. '평화를 세운다'( )라는 말은 곧 수동적인 평화에 대한 준비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적대자들을 사랑하라는 말과도 상통한다(마 5,44-48).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됨의 약속을 받는 것(45)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6) 그러면 예수가 말씀과 삶으로 보여준 평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진정한 평화는 결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삶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오심 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이며, 그분과의 만남이 곧 평화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어떤 자에게는 오히려 불안과 투쟁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리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하고 진리와 평화이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 평화는 인간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친히 주므로 구체화 되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목박는 자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행하므로, 인간이 지닌 모든 공격성과 미움을 제거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보여준 평화의 모습이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의 길이다. 높아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짐이다. 이러한 예수의 평화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의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 개인 실존에서 사회적인 실존의 자리로, 그리고 민족을 넘어서는 우주적인 평화로 나아갔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가 그의 언어와 삶으로 보여준 평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는 우리가 누려야 할 평화의 근원자이시며 동시에 중개자이시다(롬 5,1; 골 1,20; 엡 2,14).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이 시대를 향하여 어떻게 외쳐야 할 것인가? 평화가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부재를 선언해야 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먼저 평화부재를 선언함으로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보게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는 우리의 평화'라고 먼저 말하기 전에 평화없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죄와 거짓과 포악, 그리고 음란과 부패가 만연한 우리가 거하는 삶과 이 시대의 자리를 확인할 때만이 어쩌면 평화의 내용을 그의 몸으로 사신 예수의 뒤를 따라가며 그분이 선언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을른지 모른다. 아니 예수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평화"인 것이다.
6. 그러므로 예수가 선언한 복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울 수 있는 복있는 사람이란 평화를 만들어내고 그 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마 5,9). 그들이야 말로 정말로 "복되도다"라고 칭찬받을 사람들인 것이다. 평화를 세우라는 부탁은 특별히 지혜적인 권면으로서 주로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평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된 평화를 내포하고 있다. '평화를 세운다'( )라는 말은 곧 수동적인 평화에 대한 준비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적대자들을 사랑하라는 말과도 상통한다(마 5,44-48).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됨의 약속을 받는 것(45)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6) 그러면 예수가 말씀과 삶으로 보여준 평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진정한 평화는 결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삶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오심 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이며, 그분과의 만남이 곧 평화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어떤 자에게는 오히려 불안과 투쟁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리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하고 진리와 평화이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 평화는 인간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친히 주므로 구체화 되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목박는 자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행하므로, 인간이 지닌 모든 공격성과 미움을 제거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보여준 평화의 모습이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의 길이다. 높아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짐이다. 이러한 예수의 평화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의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 개인 실존에서 사회적인 실존의 자리로, 그리고 민족을 넘어서는 우주적인 평화로 나아갔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가 그의 언어와 삶으로 보여준 평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는 우리가 누려야 할 평화의 근원자이시며 동시에 중개자이시다(롬 5,1; 골 1,20; 엡 2,14).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이 시대를 향하여 어떻게 외쳐야 할 것인가? 평화가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부재를 선언해야 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먼저 평화부재를 선언함으로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보게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는 우리의 평화'라고 먼저 말하기 전에 평화없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죄와 거짓과 포악, 그리고 음란과 부패가 만연한 우리가 거하는 삶과 이 시대의 자리를 확인할 때만이 어쩌면 평화의 내용을 그의 몸으로 사신 예수의 뒤를 따라가며 그분이 선언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을른지 모른다. 아니 예수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평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