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부 남만인을 억류하라
제2부 조선항로를 봉쇄하라
제2부 조선항로를 봉쇄하라
본문내용
우리는 일본과의 무역에 불씨를 일으키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코레아와 직교역을 해보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요한 마차이케르-동인도 회사 동양본부장]
동인도 회사의 최종결정은 조선과의 직교역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에도막부가 이를 적극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결국 동인도 회사가 의욕적으로 명명했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한번도 항해하지 못하는 운명이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럽이 출범시킨 세계 경제체제가 출범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질서체계가 와해 되고있던 17세기.
유럽문명과 조선의 만남! 그물꼬를 막았던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유럽문명과의 교류를 독점했다.데지마에는 네델란드와의 교역 사무를 보던 일본인 통사들이 있었다.
그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위해 그들은 자식들에게 네델란드 말을 배우게 했다.
8대 장군 요시무네는 네델란드와의 교역을 위해 네델란드말 교습소를 개설하는 한편 서양서적 수입도 허가했다.요시무네의 해금 조치로 수입된 서적중 하나가 의학서 해체신서다.해체신서에 따라 사형수의 몸을 해부해본 일본은 그 정확함에 놀랐다.
일본은 사전도 없이 이 책을 번역했다.이것을 계기로 네델란드 학문을 익히고 배우자는 난학이 태동했다.이 때부터 유학생들이 나가사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전국에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난학을 배우기위해 몰려들었던 것이다.
난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네델란드말을 배워야 했다.1796년 마침내 일본인들의 손으로 일-란 사전이 완성됐다.그리고 그 대상도 네델란드 학문 뿐만아니라 모든 서양 학문으로 확대됐다.난학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오사카에서 오마다광이 설립한 비끼주꾸는 난학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이곳에서 배출된 사람들은 난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한편,막부도 산하에 난학 연구소를 설립했다.이후 난학 연구소에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 동경대의 전시 바로 이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 그 저력은 난학이었다.파라입소-아시아를 벗어난 서양 선진대열 합류를 주장했던 난학자 도쿠가와 이유쿠치. 그러나 그의 학문은 서양학문의 망종이 맹종이 아니었다.도쿠자와 함께 일본 근대화의 양대 기둥이었던 오무라 마쓰찌꾸.
그 동상이 난학자들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칼로 상징되는 주체와 망원경으로 상징되는 개방의 조화가 바로 그것이다."
17c 조선은 개방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켰던 힘의 실체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효종은 하멜을 북벌과 연계 시킴으로서 당시 세계를 변화시켰던 힘의 실체를 수용하고자 했다.그러나 청의 견제로 그 기회는 무산됐다.
코레아호가 조선으로 항해 했을때 또 하나의 기회였다. 이때는 일본의 방해로
무산됐다.그로부터 100년 뒤인 18c 이때 등장한 실학파는 조선내부에서 성장한 기회였다.그러나 실학자의 대부분이 유배 당하거나 재야에 남아 있어야했다. 그들의 새로운 실험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배척당해 버린 것이다.
다시 1세기 후인 19세기,조선은 200년전 조선의 개방을 가로막았던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고 말았다. 역사의 갈림길은 17세기 한 사건에서 이미 잉태됐던 것이다.
그때 네덜란드와 조선이 개항에 성공을 했더라면, 지금 우리 나라에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져 있을까?
하멜 표류기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을줄은 몰랐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우리나라는 왜 그 나라에 의해서 오랜 시간 지배 받고 방해를 받아야 하는지...
이번 하멜 표류기 감상을 통해 다시 한번 일본이란 나라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니다.코레아와 직교역을 해보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요한 마차이케르-동인도 회사 동양본부장]
동인도 회사의 최종결정은 조선과의 직교역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에도막부가 이를 적극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결국 동인도 회사가 의욕적으로 명명했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한번도 항해하지 못하는 운명이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럽이 출범시킨 세계 경제체제가 출범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질서체계가 와해 되고있던 17세기.
유럽문명과 조선의 만남! 그물꼬를 막았던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유럽문명과의 교류를 독점했다.데지마에는 네델란드와의 교역 사무를 보던 일본인 통사들이 있었다.
그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위해 그들은 자식들에게 네델란드 말을 배우게 했다.
8대 장군 요시무네는 네델란드와의 교역을 위해 네델란드말 교습소를 개설하는 한편 서양서적 수입도 허가했다.요시무네의 해금 조치로 수입된 서적중 하나가 의학서 해체신서다.해체신서에 따라 사형수의 몸을 해부해본 일본은 그 정확함에 놀랐다.
일본은 사전도 없이 이 책을 번역했다.이것을 계기로 네델란드 학문을 익히고 배우자는 난학이 태동했다.이 때부터 유학생들이 나가사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전국에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난학을 배우기위해 몰려들었던 것이다.
난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네델란드말을 배워야 했다.1796년 마침내 일본인들의 손으로 일-란 사전이 완성됐다.그리고 그 대상도 네델란드 학문 뿐만아니라 모든 서양 학문으로 확대됐다.난학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오사카에서 오마다광이 설립한 비끼주꾸는 난학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이곳에서 배출된 사람들은 난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한편,막부도 산하에 난학 연구소를 설립했다.이후 난학 연구소에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 동경대의 전시 바로 이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 그 저력은 난학이었다.파라입소-아시아를 벗어난 서양 선진대열 합류를 주장했던 난학자 도쿠가와 이유쿠치. 그러나 그의 학문은 서양학문의 망종이 맹종이 아니었다.도쿠자와 함께 일본 근대화의 양대 기둥이었던 오무라 마쓰찌꾸.
그 동상이 난학자들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칼로 상징되는 주체와 망원경으로 상징되는 개방의 조화가 바로 그것이다."
17c 조선은 개방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켰던 힘의 실체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효종은 하멜을 북벌과 연계 시킴으로서 당시 세계를 변화시켰던 힘의 실체를 수용하고자 했다.그러나 청의 견제로 그 기회는 무산됐다.
코레아호가 조선으로 항해 했을때 또 하나의 기회였다. 이때는 일본의 방해로
무산됐다.그로부터 100년 뒤인 18c 이때 등장한 실학파는 조선내부에서 성장한 기회였다.그러나 실학자의 대부분이 유배 당하거나 재야에 남아 있어야했다. 그들의 새로운 실험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배척당해 버린 것이다.
다시 1세기 후인 19세기,조선은 200년전 조선의 개방을 가로막았던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고 말았다. 역사의 갈림길은 17세기 한 사건에서 이미 잉태됐던 것이다.
그때 네덜란드와 조선이 개항에 성공을 했더라면, 지금 우리 나라에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져 있을까?
하멜 표류기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을줄은 몰랐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우리나라는 왜 그 나라에 의해서 오랜 시간 지배 받고 방해를 받아야 하는지...
이번 하멜 표류기 감상을 통해 다시 한번 일본이란 나라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