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순정효황후 윤씨친가
2.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3.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4. 오위장 김춘영 가옥
5. 도편수 이승업 가옥
2.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3.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4. 오위장 김춘영 가옥
5. 도편수 이승업 가옥
본문내용
을 취하는 반면 안채는 ㄱ자나 ㄷ자형으로 폐쇄된 마당을 갖도록 하여 외부에서는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배치를 고려한다. 지금도 호남과 영남의 전통가옥에서는 안채를 개방하지 않아서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사랑채 반쪽만 보고 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4. 오위장 김춘영 가옥
-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 연결
- 건평 82.46m (25평)
- 이 가옥은 조선말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이다. 종로구 삼청동 125 - 1 번지에 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ㄷ자형(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대청은 오량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삼량가이며, 조선조의 도시형 가옥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판대공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의 뒤쪽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고석과 전돌을 사용하여 화방벽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득기할 만한 점이다.
- 이 가옥은 길가에 담장을 따로 두르지 않고 안채의 외벽면을 담장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고, 사랑채와 안채를 서로 분리한 듯 연결하여 공간의 손실을 줄이고 있으며, 대문에서부터 사랑채와 안채의 출입구를 따로 두어 대문간이 매개공간도 겸하는 슬기도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알뜰하게 공간을 활용하였음에도 사랑마당이 협소하여 아쉽다.
5. 도편수 이승업 가옥
- 안채, 사랑채
- 건평 119m (36평)
- 이 가옥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6 -2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정자형이고 사랑채는 ㄴ자형의 평면이다. 안채에서는 부엌과 안방쪽은 반오량으로 꾸며 전 후면의 지붕길이를 다르게 꾸민 것은 특색 있는 구조이다.
대청과 건넌방쪽은 일고주오량가로 구성되어 있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이 주도한 서민적 사실주의가 풍미한 뒤 자연히 은둔적 폐쇄주의가 대두되어, 사랑채를 대문에서 바로 접하지 않게 뒤쪽에 배치하는 특색이 나타났다고 한다. 본 가옥은 바로 그러한 은둔의 '별당'과 같은 사랑방 배치를 구체화시킨 좋은 예라 한다. 보통 대문산을 들어서면 본가옥의 아래채에 해당되는 자리에 사랑채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은 터이다.
4. 오위장 김춘영 가옥
-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 연결
- 건평 82.46m (25평)
- 이 가옥은 조선말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이다. 종로구 삼청동 125 - 1 번지에 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ㄷ자형(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대청은 오량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삼량가이며, 조선조의 도시형 가옥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판대공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의 뒤쪽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고석과 전돌을 사용하여 화방벽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득기할 만한 점이다.
- 이 가옥은 길가에 담장을 따로 두르지 않고 안채의 외벽면을 담장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고, 사랑채와 안채를 서로 분리한 듯 연결하여 공간의 손실을 줄이고 있으며, 대문에서부터 사랑채와 안채의 출입구를 따로 두어 대문간이 매개공간도 겸하는 슬기도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알뜰하게 공간을 활용하였음에도 사랑마당이 협소하여 아쉽다.
5. 도편수 이승업 가옥
- 안채, 사랑채
- 건평 119m (36평)
- 이 가옥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6 -2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정자형이고 사랑채는 ㄴ자형의 평면이다. 안채에서는 부엌과 안방쪽은 반오량으로 꾸며 전 후면의 지붕길이를 다르게 꾸민 것은 특색 있는 구조이다.
대청과 건넌방쪽은 일고주오량가로 구성되어 있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이 주도한 서민적 사실주의가 풍미한 뒤 자연히 은둔적 폐쇄주의가 대두되어, 사랑채를 대문에서 바로 접하지 않게 뒤쪽에 배치하는 특색이 나타났다고 한다. 본 가옥은 바로 그러한 은둔의 '별당'과 같은 사랑방 배치를 구체화시킨 좋은 예라 한다. 보통 대문산을 들어서면 본가옥의 아래채에 해당되는 자리에 사랑채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은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