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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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봉건제도의 의제와 효도
2) 권역의 신비성과 유교의 교의
3) 경의 확립
4) 도참 신앙과 유교의 성립

본문내용

. 고로 성제.애제 대의 재수명설에 의한 운동에 대한 왕망의 선양운동의 관계는, 방사 등의 신도본위에 대한 유가들의 인도본위의 운동의 관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왕망도 군주가 되고, 또한 군주의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인도본위로 일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주술적인 초인적인 권위를 필요로 했다. 즉 그는 [주례]나 [효경]등에 준거한 정치.교화를 행하고, 스스로 주공에 비했지만, 다른 면에서, 참, 부명, 신倦 등을 믿고, 신비적 권위를 나타내는데 급급했다. 사실은 한에서 그에게의 신양은, 요의 후인 화덕의 한에서 순 후인 토덕의 그에게로 물려지는 것으로, 요순의 선양에 필적함과 동시에, 적의 화덕에서 황의 토덕으로 옮기는 천도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왕망에게는 병적인 뿐이 있었지만, 감충가의 [태평전]이 오경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에 반대한 류흠도, 그 자신에 관계하는 부명을 믿어서 일을 일으키려한 정도이다. 특히 스스로 주술신앙을 품고, 무축과 같은 주술자에 지도되어 있는 민중과의 관계가 절박한 경우, 관련된 민중을 지배하는 군주가 되고, 또는 군주의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신비적인 권위가 한층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선제, 원제가 반전정책을 행하고, 애제 무렵에는 왕씨가, 평제 무렵에는 왕망이 이것에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정도로 지배자층과 빈궁의 민중 등과의 대립관계가 긴박해 있었던 왕망의 경우는 한층 더 그러했다. 그리고 왕망은 빈궁한 민중을 동원하고, 화덕(적)의 한과 같은 덕을 표방하는 적간 등에 의해 타도되었던 것이다.
광무제는 적간이나 그와 같은 류를 진압하고, 여러 호족을 혹은 억압하고, 혹은 그들과 타협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그는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호족 등에 대해서도 타협적이였다. 그리고 소위 호족의 연합정책을 수립했다고 전해지지만, 게다가 王者에는 分土나 分民의 견지에 서고, 또한 대국과 사현을 넘지 않도록 그들을 억압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상적.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도, 주술적인 천도에 서는 것과 인도 본위의 그것과를, 왕망의 경우보다 더욱 밀접히 결합해서 이를 이용했다. 그는 경전의 교를 존중함과 동시에 도참을 신봉한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는 왕망 무렵에 개혁된 교사를 행함과 동시에 봉선을 행했지만, 이 봉선은 거의 완전히 도참에 기반을 두고 행해졌다. 거기에는 상서가.역가의 河圖.洛書에 의한 것과 [孝經鉤命決]과 같은 것도 있어, 경을 돕는 緯로 보아야 할 것이 있었다.
또한 이 도참 안에는, 류향, 류흠에 의해 귀신을 빌린 것, 오경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배척된 감충가의 [태평전]과 같은 류의 것도 있었다. 즉 광무제 때 [孔丘秘經]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에 의하면, 공자는 한을 위해 赤制. 즉 한의 제도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군?의 상서 안에 천지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다스리는 것이고, 황왕의 연대도 圖錄에 명확히 되어 있지만, 공자는 이것에 의해 한의 歷運이 긴 것을 명백히 하고, 한을 위해 적제를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공자의 도참이다. 더욱이 이것도 공자가 한의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고 있어, 이것은 [공구비경]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자가 한을 위해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왕망 때에도 알져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말하면 후한의 반고나 공양학자는 이것을 받아, 공자가 한을 위해 제도를 만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한 말에서 후한초에 걸쳐 경을 돕는 緯로서의 도참이나 공자가 만든 도참이 나타나 있고, 광무제 등은 이것을 신봉한 것이다.
광무제는 도참을 신봉하고, 이것을 천하에 공포했다. 그런데 이 도참에는 경의 해설 또는 경을 도우는 것으로서의 위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나, 공자가 만든 것 등이 있었다. 고로 이들 도참은 경전 그 자체는 아니지만, 주술호서의 천도에 서는 군주가 그대로 공자의 교에 복속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군주 이하의 인간계가 모두 공자의 교에 복속한다고 하는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나는 여기에 소위 국가교학의 정통으로서의 공자교, 즉 유교의 성립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군주가 공자의 교에 복속한다고 하는 의미로 군주 측의 공자교에의 타협인 것 같지만, 그 전에 공자교가 주술로서의 천도에의 왜곡이 있었고, 따라서 공자교의 군주에의 타협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자는 [역전]에서는 형이상의 천도를 형이하의 器에 의해 파악하고, 이것이 인간계에 나타나는 성인의 교를 해설하는 것이고, 동중서나 류향에서는 서상과 재이에 하늘의 의지와 언어, 즉 天譴과 天戒를 읽어서 인민에게 가르치는 것이였지만, 도참에 있어서는 하늘의 소리를 발하고, 괴력난신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하늘, 귀신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후한시대에 인도본위의 유가 안에는 군주가 도참.위를 신봉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도 있었다. 광무제에 직접 반대한 환담, 조금 뒤의 왕충이나 장형과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체제를 고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서는 첫째로 왕망, 류흠에 보여지듯이, 흑자.[역전]이래, 전제군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초인간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두번째는 대학편, 중용편에 보여지듯, 한의 많은 유가는 맹자와 같이 천인의 연속에 서고, 命에 구속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사상가는 기존의 것, 전통적인 것을 命인 것으로서 수용하기 쉽고, 예를 들면 양웅과 같이 이들과 대결하지 않고, 이들 가운에 자기를 保全한 것, 세번째로 예를 들면 교사 등의 개혁을 주장한 匡衡,?方進의 경우처럼, 많은 유가적 관료는 그들의 영역에 관해,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私利를 꾀하고 군주에 의존하느라고, 한편에서는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과의 사이에 깊은 대립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적간이나 그와 같은 류를 앞에 해서 권력과 연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점 등이 생각될 수 있다. 그리하여 육조의 초기에 이르러 도참, 위는 파기되게 되었다. 그러나 경서, 경학의 안에는 [역경]이나 [역전], [상서]나 [대전]과 같은 도참에 가까운 것이 있고, 또한 때때로는 도참.위의 결함을 도교나 불교가 보충하는 것도 있었다

키워드

유교,   도참 신앙,   ,   권역
  • 가격2,3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2.12.10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5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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