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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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황하 문명의 전사 (인류의 출현과 문화의 여명)
2) 황토와 황하 (농경 문화 발생의 배경
3) 신석기시대의 2대 문화 모습
4) 안양에의 도정
맺은말

본문내용

자.
㉠ 성벽안에 은대의 토기편등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성벽 그 자체가 은대에 세워졌다고는 할 수 없다. 구축에 필요한 대량의 흙을 파내려면 인가부근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거주지구라고 하는것은 시대에 따라서 이동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따라서 사람들이 익숙한 곳에서 채집한 흙 가운데는 당시 사용하였던 것보다 오히려 전 시대의 것이 포함되리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였어야 되지 않았을까
㉡ 성벽이 방비용의 기능을 하고있던 시대에 그 위에 사람이 산다든지 그안에 구멍이나 묘지를 판다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다. 그러한 파괴공작이 행해진것은 성벽이 불필요하게 된후의 일임에 틀림없다.
㉢ 만명의 사람이 18년이나 걸렸다고 하는 대공사가 은대중기의 경제상태로써 가능한 것이었을까. 또 그 정도의 희생을 하면서 이처럼 대규모의 성벽을 세울필요가 있었을까. 그 답은 모두 아님'일 것이다.
안금괴氏는 성벽을 세우는 노동력을 계산해보고 채토에 종사하였던 인부중 천명이 청동제의 삽을 이천명이 돌로된 삽을 사용하였다고 판정하고 있다. 그러나 청동의 가치가 높았던 것이 틀림없었을 그 때 청동삽이 그 정도로 보급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생산용구의 위부터 말하면 당시는 아직 석기시대의 연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생산력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왕궁지역을 둘러쌀 정도면 어쨌든 둘레가 7km나 되는 성벽이라는 것은 당시의 정열로 볼 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않는다. 이처럼 큰 성벽이 필요하게 된것은 도시의 인구가 집중적으로 증가하고 도시간의 공방전이 과격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 성벽이 은대중기의 정주에 있으면 은대말기의 안양에도 있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조사의 결과로는 안양에는 성벽의 흔적도 없고 겨우 소둔촌의 서방에 왕궁지구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보여지는 주호의 일부가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國」이라는 글자의 외곽은 국도를 에워싸는 성벽이라고 추정된다. 갑골문자의 「國」이라는 글자가 「或」라고 표현되어져 있는 것은 은의 국도에 성벽이 없었다는 증거이다.「國」처럼 외곽이 증가하는것은 말할 필요도없이 서주의 금문(金文)으로 부터다.
④. 은대 중기에 도(度)라는 것이라 불려진 동기에 대한 의문 문제의 동기는 서술한 바와 같이 휘현류리각·정주백가장·황피현발룡성·제1남대신장 등으로부터 발견되어있고 그 분포는 황하유역을 중심으로하여 꽤 넓은 범위에 걸쳐있다. 현재 그것들의 연대를 은대중기하고 보는 일은 이미 정설화한 관점이 있긴하지만 이것은 과연 바른것인가. 일찌기 민원말치氏와 필자만은 이러한 견해에 이론을 외쳐 그 연대가 약간내려와야 할것을 주장하였다. 이형·박수·조조·무명을 통성으로 하고 철선문·원권문·곡절문 등으로 특징이 붙은 문제의 동기군(銅器群)은 한번본 정도로 은대 말기(소둔기)의 것보다 원시적인것 같다. 그러나 잘 조사해보면 오히려 반대로 본격적인 동기의 퇴화한 것이라 보는쪽이 좋을것 같다.
2.3의 이유를 들면 도철의 생명인 눈이 퇴화하여 흔적만이 된것.
눈은 남아있지만 이미 도철의 몸을 하지않고 용경氏의 소위 「목뢰문」화 된것 좌우의 기봉이 허물어져서 당초상으로 변화한것. 이와같은 것이 은대말기의 정연된 도철 문의 원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또 원권문과 곡절문은 문양이라고 하기엔 오히려 방계의 관점이 있어 은대말기의 본격적인 동기보다도 형식이 단순화된 은말주초(殷末周初)의 동기에 많아 보인다. 앞에서 정주의 성벽의 연대를 의심. 본항에서는 그것과 다른 문제의 동기의 연대에 관해 의문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 종류의 동기를 낸 백가자의 묘는 상벽의 위에 퇴적한 문화층의 안에 있었다고하니 성벽의 연대가 내려온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동기 그것의 연대도 내려오는것이 된다.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상이 설정된 은문화의 편년에 관한 의문이다.
필자는 은문화의 총체적 편년을 완수한 사람들의 공적을 과소평가하려고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단지 이 편년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른쪽에서 들은 여러가지의 의문에 관하여 꼭 납득이 가는 설명을 원한다. 은문화의 성립과정에 관하여는 아직 모르는게 많다. 예를들면, 용산문화를 지고 있던 사람들의 일부가 외부로부터 청동기술을 들여와 서서히 은왕조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또는 청동병기로 무장한 외래민족과 같은 사람이 황하중원에 침입하여 정복왕조의 주인이 된것일까. 이부분의 해명은 전부 장래의 연구에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1)관야웅 「문화의 지방차」 「대안」 3권 12호 1957년
2)조연광 「정주남관외상대유지발굴간보」 「고고통역」 1958년 2기
3)안지민 「관간종주 「상성」 적기개문제」 「고고」 1961년 8기
4)동전. 유소익 「「미도」질의」 「문물」 1961년 10기
5)매원말치 「은중기라 되어있는 정주출토고동기의 성질」 「사학」 33권 2호 1961년 관양웅. 전계 「룡산문화의 해명」 9-19항 동(同) 「황하문명등처럼 발전하였나」 「계간역사교육연구」 24호 1962년 45~49항
맺음말
「황하문명의 형성」 이라고 하는 문제를 대하게 되었을 때 필자자신이 문제삼고있던 점을 하나하나 풀어보고싶다는 희망에 젖었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중국인의 형성과정을 밝히는 일. 신석기 시대의 사회구성에 대해 공식적인 견해를 재검토하는 일.은문화의 편년을 싸고 있는 여러가지의 의문을 하게 하는 것. 거기에 황하문명을 필자처럼 정의하는 것이 바른것인지 반성하는 일. 이상이 그 주된것이다. 그러나 장기에 걸친 대학분쟁에 화가되어 본의아니게 시간이 되어 형식상 끝내지 않으면 안되는것은 정말 유감이다. 그러나 앞에서 들은 모든점은 어느 것을 들어보아도 증거굳힘에 복잡한 수속을 필요로하고 조급히 해결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러한 특정문제를 들기에는 대하게된 지면이 충분치않다. 더구나 황하문명되는 것이 이제까지 본격적으로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이상 여기에 하나의 전망을 표현해 놓는 일도 반드시 무의미하진 않다는 생각한다.
황하문명의 형성과정에 대하여는 아직 모르는 것 뿐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명이 되어버렸지만 지적한 몇개의 문제점은 어쨌든 순서대로 해명하기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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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2.10
  • 저작시기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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