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가계와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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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언

Ⅱ. 이황의 가계

Ⅲ. 이황의 생애
1. 그의 성품과 생활태도
2. 그의 관역과 관직관
3. 그의 현실참여

Ⅳ. 결 어

본문내용

, 남북에 빈틈이 있고 민생이 곤췌하니 환란에 대한 방비가 없어도 된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이어서 그는 예로부터 군주의 초기의 정치는 대개 청명하지만 뒤에 가면 간관의 간쟁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또 간사한 무리들이 그 틈을 타서 군주의 뜻에 영합하게 되면, 올바른 사람은 착수할 곳이 없어져 간당들의 세상이 되는 법인 바, 지금은 신정의 초기라서 뜻을 굽혀 간쟁에 따르지만 오랜 뒤 군상의 뜻이 바뀌게 되면 그 때도 오늘 같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라 하여 경계의 뜻을 밝힌 일이 있었다.
) 宣祖修正實錄 卷3, 2年 3月 乙巳條
上曰 卿今歸矣 乃有所欲言者乎 滉對曰……今世雖似治平 南北有 生民困悴 不可謂無可憂之防也 上復問所欲言 對曰……自古人君 初政淸明 正人見用 君有過則諫 有失則爭 人主必生厭苦之意 於是奸人 乘隙而逢迎之 人主之心 以爲若用此人 則吾所欲無不如意 自此與小人合 而正人無着手 處然後 奸臣得志 無所不至矣 今新政之初 凡所諫諍 皆屈意從之 無大過矣 久而聖心或移 安能保其如今日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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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위에 든 몇 가지의 상소나 진계의 내용을 통하여 그는 외교·시장·인사·언로 등 시정의 해결에 직접 개입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그에게 있어서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하였고, 국왕에 대한 그의 상소·진계·차의 상당수는 자기자신을 현실에서 떼어놓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실의 행정에 대한 그의 기여가 컸다고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신이
이황이 이전에도 부르심을 받고 부조하였으나, 한 차례 계복하여 예에 따라 입시한 뒤로는 소대·계납의 이익이 없었다. 밖으로 그 이름을 흠모하였는데 내실이 정성스럽지 못하였다면 이황이 이제 온다 한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 明宗實錄 卷32, 21年 4月 辛未條
史臣曰……滉前此 亦承召赴朝 然一度啓覆 隨例入侍之後 別無召對啓納之益 外慕其名 內實不誠 則滉今雖來 抑有何助
라고 말한 것은 위의 사실을 매우 적절하게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Ⅳ. 결 어
여말의 향리에서 출발하여 선초에 와서 가까스로 양반의 반열에 끼였던 스스로의 가문을 혁혁한 문지로 승격, 정착시킨 퇴계 이황은 일생의 학구생활을 통하여 성리학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움으로써
) 宣祖實錄 卷7, 6年 11月 壬寅의 府啓
贈領議政李滉 篤信好學 理明義精而爲德行 發而爲事業 其扶植斯文維持吾道之功 實東方所未有也
同書 卷20, 19年 2月, 工曹正郞 趙穆의 陳疏
臣師臣李滉……故其發於詩文論辨者 皆所以淑人心而扶世道 承前聖而啓後蒙也
당시의 학자나 유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同書 卷 196, 39年 2月 辛亥의 領經筵事 沈喜壽의 陳啓
李滉…·承召而來 館學諸生 雖不得相與講論 而 然有所衿式 仰之如山斗 信之如神明 故士習丕 人皆激昻
그리고 관리로서의 청렴하고 조심스러운 그의 생활은 그를 '권근지인'으로 또는 청백리로
) 淸選考 卷7, 淸白條
만듬으로써 여러 사람의 숭앙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는 당시의 국왕이나 신료들로부터 아낌을 받았고, 따라서 그들은 그를 늘 국왕의 측근에 두고 고문의 임무를 맡기고자 간절히 원하였던 것이다.
) 明宗實錄 卷7, 3年 1月 庚寅의 司憲府 上啓
同書 卷17, 9年 8月 辛未의 領經筵事 尹漑의 陳啓
同書 卷20, 11年 3月 庚辰의 史臣의 記錄
그러나 그는 국왕이나 신료들의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늘 사직, 귀향할 것을 희망하였고, 따라서 그의 관직생활은 공백기가 많은 산만한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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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이처럼 늘 현실에서 멀리 떠나 향곡에 숨고자 노력한 것은 중종기의 기묘사화와 특히 그의 형이 피화한 을사사화로 인한 직접적 충격과 사화 후의 사습의 퇴폐 및 세도의 탁란에 말미암은 점이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사화를 겪고 난 뒤 사림에는 현실의 정계를 떠나서 향곡에 숨어 살려고 하는 현실기피적·은둔적인 풍조가 생겨나서 이황처럼 출사에 신중을 기하거나 출사를 완전히 체념하는 인물도 드물지 않은 실정이었다.
) 宣祖修正實錄 卷20, 19年 10月 趙憲의 上疏
당시 그러한 인물로는 李滉 외에도 成守琛·成渾·林億齡·徐敬德·金麟厚·曹植·李恒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본질적인 요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곧 그의 성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의 성품에는 다소 소극적, 피동적인 일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를 스스로의 학문의 성취와 인격의 수양에 만족하는 학자형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데는 매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폐의 이정이나 시정의 개혁에 공헌할 만한 탁월한 능력과 강렬한 참여의식을 갖춘 바람직한 관료형 인간으로 그를 성장시키지는 못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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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 성리학을 확고한 기반 위에 정착시키고 또 그 차원을 높이는 데 공헌함으로써 후대에까지 추앙을 받게 되었던 것이나, 그가 성취한 학문을 현실에 도입하여 정치적 경륜으로 적용하는 데까지는 끌고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은 자기가 터득한 학문의 지식을 현실에 도입하여 온갖 시대적, 인적 악조건을 무릅쓰고 「지치」의 현실을 꾀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의 피화를 자초하였던 조광조의 경우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광조가 적극적·능동적·현실참여적인 특징이 강한 관료형 인간이었다고 한다면, 이황은 순수·겸허·염정·명백한 성격의 학자형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사신이
이황의 재조나 기국은 비록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성리학의 학리)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정미함을 다한 것에 이르면 조광조의 미칠 바가 못된다.
) 同書 卷4, 3年 12月 甲午條
滉才調器局 雖不及光祖 至深究義理 以盡精微 則非光祖之所及矣
라고 한 것은 두 사람에 대한 인물평으로는 적확한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황의 성품·생활태도라든가, 관직관·현실참여태도·업적 등을 종합해 볼 때, 그는 탁월한 행정능력과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지닌 훌륭한 관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성실성과 심잠성을 지니고 학문에 집착하여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또 후대에까지 큰 영향력을 지닌 훌륭한 학자였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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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퇴계,   이황,   가계,   생애
  • 가격3,000
  • 페이지수23페이지
  • 등록일2002.12.20
  • 저작시기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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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5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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