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행정개혁의 정의
1. 최근의 행정개혁에 대한 이론적 모델
2. 선진국 행정개혁의 배경
3. 선진국 행정 개혁의 공통적인 방향
Ⅱ.선진 각국의 행정개혁
1. 미국의 행정개혁
2.영국의 행정개혁
3.프랑스의 행정개혁
4.독일의 행정개혁
5.뉴질랜드의 행정개혁
6.일본의 행정개혁
Ⅲ. 결론
1. 최근의 행정개혁에 대한 이론적 모델
2. 선진국 행정개혁의 배경
3. 선진국 행정 개혁의 공통적인 방향
Ⅱ.선진 각국의 행정개혁
1. 미국의 행정개혁
2.영국의 행정개혁
3.프랑스의 행정개혁
4.독일의 행정개혁
5.뉴질랜드의 행정개혁
6.일본의 행정개혁
Ⅲ. 결론
본문내용
경제는 활력을 되찾았다. 개혁초기인 85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 0.2% 였고, 개혁이 한창이던 90년대에는 마이너스 3%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개혁이 마무리 시점에 접어든 93년은 5.8%, 95년은 5.5%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같은 성장률과 함께 91년과 92년 10.3%에 달했던 실업률도 6.0%로 떨어졌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기치로 내세운 끝에 규제와 비효율의 상징으로 전락했던 뉴질랜드는 10년의 개혁을 통해 인허가와 사전조정통제가 없는 '21세기형 국가' 모델로 다시 태어났다.
6.일본의 행정개혁
(1) 제 1기 (1945-1951년)
이 시기의 일본의 행정개혁은 전시체제, 군국주의체제의 일소를 도모하고 행정체제의 민주화를 추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출발했으나 1948년부터는 행정기구의 축소와 공무원의 감원에도 중점을 두게 되었다. 특히 1949년 2월 행정기구쇄신위원회의 건의를 받은 제 3차 요시다내각은 행정기구와 공무원수를 각각 30% 감원정리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철도사업, 전매사업의 공사화를 단행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지방행정기관의 철저한 조리 등을 실시하여 기구가 감축되었으며 공무원 총수의 15%에 해당되는 229,350명이 감원되었다. 이것이 요시다내각의 제 1차 행정조리로서 그 당시에는 '명치 이래의 획기적 사업'이라고 평가되었다.
(2) 제 2기 (1952-1977년)
이 기간 중에는 일본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보조를 맞추어 일본의 행정기구와 공무원수도 꾸준히 팽창을 거듭했다. 과학기술의 진흥을 담당할 기구로 원자력위원회, 원자력구, 과학기술청 등이 설치되었으며, 후생성연금국이 신설되어 국민연금행정기구 정비도 이루어 졌다.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위하여 많은 공단과 사업당도 신설되어 1954년에는 25개에 지나지 않던 공단, 사업단이 5년 동안에 62개로 늘어났다. 한편, 기존 성청의 내부조직도 팽창을 거듭하여 1955년에 77개였던 중앙성청의 국이 3년 동안에 23개국이 늘어나 100개국이 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공무원도 꾸준히 늘어나 1955년부터 1960년까지 5년동안 45만명 정도의 순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팽창기에 있어서도 한편에서는 기구조리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1955년 11월에 출범한 제 3차 하또마야내각은 행정제도의 개혁을 삼대정책의 하나로 내걸고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중앙성청기구의 역학 조정으로 끝났다.
1961년에는 미국의 Hoover위원회를 모방한 감시행정조사회를 설치하고 '행정을 개선하며, 행정의 국민에 대한 봉사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행정의 실태에 전반적인 검토'를 가하도록 했다. 1964년 9월까지 2년 7개월에 걸쳐 활동을 계속한 감시행정조사회는 행정개혁전반에 걸쳐서 많은 건의를 했으나 실현된 것은 행정감리위원회의 설치, 소비자행정의 강화, 청소년행정의 강화 등 기구신장에 관련된 것뿐이었으며 기구, 업무의 축소는 번의회의 일부정리와 인허가사항의 정리, 표준화만이 이루어졌다.
이 기간 중에 이루어진 최대의 기구정리는 샤또오내각에 의해 이루어진 '일성청 일국 소멸'설치라고 할 수 있다. 재정경직화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청이 1개국씩 감축할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경제기획청장관의 건의에 따라 총리지시로 1968년에 이루어진 이설치로 18개성청의 18개국이 폐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제 2기에 있어서는 정부기구가 확장하고 공무원 수도 꾸준히 늘어났다고 하겠다.
(3) 제 3기(1977년 이후)
자원에너지 유한시대를 맞이하여 일본경제는 안정성장의 이행과정에 있으며 민간부문에 있어서는 이에 상응하기 위하여 이미 많은 합리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행정정부도 종래의 타성에서 벗어나 근대화, 효율화를 추진하고 그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후꾸다내각은 1977년 12월 국가공무원의 정년제도입, 각 성청의 지방지분국의 통폐합, 중앙성청내의 51개국의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행정개혁계획'을 각의에서 결정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한 채 후꾸다내각은 물러가고 1978년 12월에 오히라내각이 출범했다.
'안가의 정부'를 내걸고 출범한 오히라내각은 1979년 1월 각종종속기구의 통폐합을 용이케 하기 위하여 각성설치법을 개정한다, 공사등의 경영관리화를 기한다, 검사, 검정기관의 정리, 합리화를 단행한다, 기구, 정원의 팽창을 억제하는 내용을 지닌 행정효율화를 위한 기본방침을 결정했다.
1980년 7월에 출범한 스즈키내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61년의 제 1차 감시행정조사회와 유사한 제 2차 감시행정조사회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행정개혁작업에 착수했는데 이 2차 조사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행정의 감량을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부부문화 민간부문의 역할분담의 재검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능분담의 합리화, 행정서비스의 합리화, 정부규제의 완화를 내걸고 있다.
방대한 규제적자를 줄이기 위해 세출을 절감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제 2차 감시행정조사회의 설치가 국민생활의 모든 측면에 미쳐있는 행정의 활동영역이나 정부사업을 얼마나 감량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좀 더 두고보아야 한다.
Ⅲ. 결론
행정개혁은 현상의 변혁이므로 현상을 유지하고 옹호하려는 입장에 의한 저항과 반동이 불가피하게 된다. 행정개혁을 추진할 때에는 이러한 저항의 원인을 규명하고, 구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을 취함으로서 바람직한 행정개혁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1980년대부터 작은 정부 구현을 위한 행정개혁을 쇄신 작업을 추진해 왔다. 더욱이 1997년 12월 IMF체제 이후 국민경제를 포함한 국가사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정치권과 정부에 대한 비판이 극한에 이르면서 정부혁신이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정부운영을 민주화해야 하는 것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된다. 정부운영의 민주화를 위한 과제에는 의사소통의 원활화, 참여의 확대, 동기부여의 장려, 직무확립, 분권화의 촉진, 업적평가의 공정화 등이 있다.
6.일본의 행정개혁
(1) 제 1기 (1945-1951년)
이 시기의 일본의 행정개혁은 전시체제, 군국주의체제의 일소를 도모하고 행정체제의 민주화를 추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출발했으나 1948년부터는 행정기구의 축소와 공무원의 감원에도 중점을 두게 되었다. 특히 1949년 2월 행정기구쇄신위원회의 건의를 받은 제 3차 요시다내각은 행정기구와 공무원수를 각각 30% 감원정리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철도사업, 전매사업의 공사화를 단행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지방행정기관의 철저한 조리 등을 실시하여 기구가 감축되었으며 공무원 총수의 15%에 해당되는 229,350명이 감원되었다. 이것이 요시다내각의 제 1차 행정조리로서 그 당시에는 '명치 이래의 획기적 사업'이라고 평가되었다.
(2) 제 2기 (1952-1977년)
이 기간 중에는 일본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보조를 맞추어 일본의 행정기구와 공무원수도 꾸준히 팽창을 거듭했다. 과학기술의 진흥을 담당할 기구로 원자력위원회, 원자력구, 과학기술청 등이 설치되었으며, 후생성연금국이 신설되어 국민연금행정기구 정비도 이루어 졌다.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위하여 많은 공단과 사업당도 신설되어 1954년에는 25개에 지나지 않던 공단, 사업단이 5년 동안에 62개로 늘어났다. 한편, 기존 성청의 내부조직도 팽창을 거듭하여 1955년에 77개였던 중앙성청의 국이 3년 동안에 23개국이 늘어나 100개국이 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공무원도 꾸준히 늘어나 1955년부터 1960년까지 5년동안 45만명 정도의 순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팽창기에 있어서도 한편에서는 기구조리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1955년 11월에 출범한 제 3차 하또마야내각은 행정제도의 개혁을 삼대정책의 하나로 내걸고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중앙성청기구의 역학 조정으로 끝났다.
1961년에는 미국의 Hoover위원회를 모방한 감시행정조사회를 설치하고 '행정을 개선하며, 행정의 국민에 대한 봉사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행정의 실태에 전반적인 검토'를 가하도록 했다. 1964년 9월까지 2년 7개월에 걸쳐 활동을 계속한 감시행정조사회는 행정개혁전반에 걸쳐서 많은 건의를 했으나 실현된 것은 행정감리위원회의 설치, 소비자행정의 강화, 청소년행정의 강화 등 기구신장에 관련된 것뿐이었으며 기구, 업무의 축소는 번의회의 일부정리와 인허가사항의 정리, 표준화만이 이루어졌다.
이 기간 중에 이루어진 최대의 기구정리는 샤또오내각에 의해 이루어진 '일성청 일국 소멸'설치라고 할 수 있다. 재정경직화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청이 1개국씩 감축할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경제기획청장관의 건의에 따라 총리지시로 1968년에 이루어진 이설치로 18개성청의 18개국이 폐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제 2기에 있어서는 정부기구가 확장하고 공무원 수도 꾸준히 늘어났다고 하겠다.
(3) 제 3기(1977년 이후)
자원에너지 유한시대를 맞이하여 일본경제는 안정성장의 이행과정에 있으며 민간부문에 있어서는 이에 상응하기 위하여 이미 많은 합리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행정정부도 종래의 타성에서 벗어나 근대화, 효율화를 추진하고 그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후꾸다내각은 1977년 12월 국가공무원의 정년제도입, 각 성청의 지방지분국의 통폐합, 중앙성청내의 51개국의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행정개혁계획'을 각의에서 결정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한 채 후꾸다내각은 물러가고 1978년 12월에 오히라내각이 출범했다.
'안가의 정부'를 내걸고 출범한 오히라내각은 1979년 1월 각종종속기구의 통폐합을 용이케 하기 위하여 각성설치법을 개정한다, 공사등의 경영관리화를 기한다, 검사, 검정기관의 정리, 합리화를 단행한다, 기구, 정원의 팽창을 억제하는 내용을 지닌 행정효율화를 위한 기본방침을 결정했다.
1980년 7월에 출범한 스즈키내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61년의 제 1차 감시행정조사회와 유사한 제 2차 감시행정조사회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행정개혁작업에 착수했는데 이 2차 조사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행정의 감량을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부부문화 민간부문의 역할분담의 재검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능분담의 합리화, 행정서비스의 합리화, 정부규제의 완화를 내걸고 있다.
방대한 규제적자를 줄이기 위해 세출을 절감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제 2차 감시행정조사회의 설치가 국민생활의 모든 측면에 미쳐있는 행정의 활동영역이나 정부사업을 얼마나 감량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좀 더 두고보아야 한다.
Ⅲ. 결론
행정개혁은 현상의 변혁이므로 현상을 유지하고 옹호하려는 입장에 의한 저항과 반동이 불가피하게 된다. 행정개혁을 추진할 때에는 이러한 저항의 원인을 규명하고, 구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을 취함으로서 바람직한 행정개혁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1980년대부터 작은 정부 구현을 위한 행정개혁을 쇄신 작업을 추진해 왔다. 더욱이 1997년 12월 IMF체제 이후 국민경제를 포함한 국가사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정치권과 정부에 대한 비판이 극한에 이르면서 정부혁신이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정부운영을 민주화해야 하는 것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된다. 정부운영의 민주화를 위한 과제에는 의사소통의 원활화, 참여의 확대, 동기부여의 장려, 직무확립, 분권화의 촉진, 업적평가의 공정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