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서사극의 비유적 성향
1.1 망명과 비유극 형식의 정착
1.2 「콜롬부스의 달걀」: 비유의 기본구조와 서사극
1.3 비유 형식과 생소화 효과
2. 사실주의적 모사이론과 비유극
2.1 사회과학적 실험구도로서의 비유극
2.2 비유극의 가능성과 한계
3.『남자는 남자다』
4.『사천의 선인』
4.1 언어와 시간의 다층적 구조
4.2 실험도구로서의 사건진행
4.3 ‘유용성의 환난’과 인간 분열의 문제
1.1 망명과 비유극 형식의 정착
1.2 「콜롬부스의 달걀」: 비유의 기본구조와 서사극
1.3 비유 형식과 생소화 효과
2. 사실주의적 모사이론과 비유극
2.1 사회과학적 실험구도로서의 비유극
2.2 비유극의 가능성과 한계
3.『남자는 남자다』
4.『사천의 선인』
4.1 언어와 시간의 다층적 구조
4.2 실험도구로서의 사건진행
4.3 ‘유용성의 환난’과 인간 분열의 문제
본문내용
비극적 비관주의와 세계상을 읽으려는 사람은 변증법적 생소화 연극이 그 본질상 완벽한 해결책과 세계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셈이다. 관객이 셴테의 운명에서 비극성을 느끼고 거기에 感入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겠으나, 이 작품이 특정한 가치나 미덕의 절대성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비극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셴테의 비극적 상황은 제도의 변혁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시대 착오적인 것이기 때문에 희극적으로 반전한다는 기제의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셴테의 진지하고 자발적인 시도가 그녀의 무지와 맹목성이 야기하는 희극적 효과 때문에 관객의 시각에서 완전히 우습게 느껴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희극적 인물은 허위의식을 상징하는 세 神과 이발사 슈푸, 건물주인 미취 여사 등 사천의 기득권층에 몰려 있다.
본질적으로 비극은 감정이입을, 희극은 거리감을 필요로 하고 또 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놋쇠구입』추기에서 서사극 이론에 내재된 유물론적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감정이입과 거리갑 사이의 모순은 심화되어 묘사의 한 요소가 된다.\"고 밝혔다. 비판의 주도 아래 감입과 거리감, 오락과 교훈의 조화를 시도한 작가의 이러한 변증법적 연극론은 비극성과 희극성의 관계에도 준용되어야 한다. 결국 셴테의 운명을 통해 작가는 감동과 비판적거리감을 동시에 기대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예로, 셴테 / 슈이타가 담배공장을 설립하는 상황를 관객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감정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 공장에서 빈민들은 착취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면피한 식객과 도둑의 처지를 청산하게 되며, 대체로 관객의 호감을 얻는 셴테도 자멸하지 않고 자신과 아이의 생존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양면적 감정은 비판의 주도 아래 더 나은 해결책을 요구할 것이며, 이로써 작가가 의도한 감입과 거리감의 조화가 달성될 것이다.
4.5 열린 결말과 이상향
『四川의 善人』이 촉구하는 더 나은 세계로의 사회변혁은 오늘날에 이르러 역사적 필연성을 크게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브레히트가 옛 소련과 중국의 혁명에 고무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혁명이 달성된 뒤 그는 이 작품의 에필로그를 다시 쓰면서, \"선하며 동시에 살아갈 수 없는 사천의 수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GW 4, Anm. 2)는 말을 앞세웠다. 그러나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닌 그는 변혁을 통해 이룩될 새로운 사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대신, \"살아가기 위해 특별히 미덕이 더는 필요없는 나라\" (GW 12,519)
를 이상향으로 이해했다. \"제도가 좋으면 인간은 특별히 선할 필요가 없다.\"
(GW 12,520)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그는 셴테의 입을 빌려, 노동이 착취가 아니라 친절을 뜻하는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친절을 베푸는 것보다 어떻게 그걸 더 잘 보여주겠어요? […] 누군가 노래를 부르거나 기계를 제작하거나 벼를 심으면 그게 사실은 친절이에요.』 (GW 4, 526)
셴테를 통해 전달되는 또 하나의 소박한 호소는 인간성에의 낙관과 신뢰이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이론가들은 자주 사회주의 이념이 인간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전제한다고 비판한다. 셴테 / 이타의 존재양식에서 드러나듯이, 브레히트는 性善說이나 性惡說의 한쪽을 전제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 본래의 성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낙관적인 견해를 가졌다. 이마의 핏줄이 불끈 튀어나온 일본 노[能] 극의 한 가면을 보면서 그는 인간이 악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생각했고, 여기에 착안하여 「四川의 善人」에서 그 시의 주제를 셴테가 관객에게 전한다.
『이웃 사람을 짓밟는 일
그것은 힘들지 않나요? 저들 이마의 핏줄은
탐욕에 겨워 불끈 부풀어 오릅니다.
자연스럽게 뻗친 손은
주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별게 받지요. 오직
욕심 사납게 움켜쥘 때만 그 손은 애를 써야 해요. 아,
얼마나 큰 유혹인지, 남에게 주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요.
친절을 베푸는 것은! 정다운 말 한 마디는
행복에 겨운 한숨처럼 새어 나오지요. (GW 4, 1570)』
친절과 선행의 성향을 지닌 인간이 파멸하지 않으면서 그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단순한 친절로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노동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고 믿는 사회가 우리의 이상일 수 있다면, 『四川의 善人』이 요구하는 새로운 질서는 오늘날에도 계속 추구되어야 할 인류의 목표가 아닐까. 선인이 고통을 받는 사회, 특별한 미덕을 요구하거나 악용하는 사회가 남아 있다면 셴테의 고난은 여전히 관객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연출자에 따라서는 작가의 의도에 반하여 사천을 사회주의 국가로 발꿔 해석하려는 시도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사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가에 따라 그가 속한 사회의 성격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 당대의 시급하던 현안 문제나 계급투쟁의 공격적인 구호들은 호소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노래한 \'만물으 흐름\'은 그 자신의 사상과 작품에도 여지없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위와 폭력을 고발하는 생소화 기법과 그 바탕에 깔린 인간애는 아마도 시공을 넘어 남게 될 것이다. 관객 스스로 좋은 결말을 찾으라고 호소하는 에필로그(GW 4, 1670)는 애초부터 구속력 있는 공산주의 사회혁명의 촉구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관중은 아마도 개인과 사회가 함께 변해가야 한다는 답변을 뇌리에 떠올릴 것이다.
브레히트는 비유 형식을 취하고 거기에 일반적인 문제를 담음으로써 이 작품에 긴 생명력을 주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관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추적하는 그의 변증법적 연극론은 비유극 형식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시대와 체제를 넘어 호소력을 갖는 보편적 진실을 형상화할 수 있었다. 비유 형식이 \'콜롬부스의 달걀\' 이라는 브레히트의 주장은 『四川의 善人』을 비롯한 그의 후기 걸작들의 보편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말로 확대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셴테의 비극적 상황은 제도의 변혁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시대 착오적인 것이기 때문에 희극적으로 반전한다는 기제의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셴테의 진지하고 자발적인 시도가 그녀의 무지와 맹목성이 야기하는 희극적 효과 때문에 관객의 시각에서 완전히 우습게 느껴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희극적 인물은 허위의식을 상징하는 세 神과 이발사 슈푸, 건물주인 미취 여사 등 사천의 기득권층에 몰려 있다.
본질적으로 비극은 감정이입을, 희극은 거리감을 필요로 하고 또 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놋쇠구입』추기에서 서사극 이론에 내재된 유물론적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감정이입과 거리갑 사이의 모순은 심화되어 묘사의 한 요소가 된다.\"고 밝혔다. 비판의 주도 아래 감입과 거리감, 오락과 교훈의 조화를 시도한 작가의 이러한 변증법적 연극론은 비극성과 희극성의 관계에도 준용되어야 한다. 결국 셴테의 운명을 통해 작가는 감동과 비판적거리감을 동시에 기대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예로, 셴테 / 슈이타가 담배공장을 설립하는 상황를 관객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감정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 공장에서 빈민들은 착취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면피한 식객과 도둑의 처지를 청산하게 되며, 대체로 관객의 호감을 얻는 셴테도 자멸하지 않고 자신과 아이의 생존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양면적 감정은 비판의 주도 아래 더 나은 해결책을 요구할 것이며, 이로써 작가가 의도한 감입과 거리감의 조화가 달성될 것이다.
4.5 열린 결말과 이상향
『四川의 善人』이 촉구하는 더 나은 세계로의 사회변혁은 오늘날에 이르러 역사적 필연성을 크게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브레히트가 옛 소련과 중국의 혁명에 고무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혁명이 달성된 뒤 그는 이 작품의 에필로그를 다시 쓰면서, \"선하며 동시에 살아갈 수 없는 사천의 수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GW 4, Anm. 2)는 말을 앞세웠다. 그러나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닌 그는 변혁을 통해 이룩될 새로운 사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대신, \"살아가기 위해 특별히 미덕이 더는 필요없는 나라\" (GW 12,519)
를 이상향으로 이해했다. \"제도가 좋으면 인간은 특별히 선할 필요가 없다.\"
(GW 12,520)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그는 셴테의 입을 빌려, 노동이 착취가 아니라 친절을 뜻하는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친절을 베푸는 것보다 어떻게 그걸 더 잘 보여주겠어요? […] 누군가 노래를 부르거나 기계를 제작하거나 벼를 심으면 그게 사실은 친절이에요.』 (GW 4, 526)
셴테를 통해 전달되는 또 하나의 소박한 호소는 인간성에의 낙관과 신뢰이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이론가들은 자주 사회주의 이념이 인간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전제한다고 비판한다. 셴테 / 이타의 존재양식에서 드러나듯이, 브레히트는 性善說이나 性惡說의 한쪽을 전제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는 인간 본래의 성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낙관적인 견해를 가졌다. 이마의 핏줄이 불끈 튀어나온 일본 노[能] 극의 한 가면을 보면서 그는 인간이 악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생각했고, 여기에 착안하여 「四川의 善人」에서 그 시의 주제를 셴테가 관객에게 전한다.
『이웃 사람을 짓밟는 일
그것은 힘들지 않나요? 저들 이마의 핏줄은
탐욕에 겨워 불끈 부풀어 오릅니다.
자연스럽게 뻗친 손은
주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별게 받지요. 오직
욕심 사납게 움켜쥘 때만 그 손은 애를 써야 해요. 아,
얼마나 큰 유혹인지, 남에게 주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요.
친절을 베푸는 것은! 정다운 말 한 마디는
행복에 겨운 한숨처럼 새어 나오지요. (GW 4, 1570)』
친절과 선행의 성향을 지닌 인간이 파멸하지 않으면서 그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단순한 친절로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노동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고 믿는 사회가 우리의 이상일 수 있다면, 『四川의 善人』이 요구하는 새로운 질서는 오늘날에도 계속 추구되어야 할 인류의 목표가 아닐까. 선인이 고통을 받는 사회, 특별한 미덕을 요구하거나 악용하는 사회가 남아 있다면 셴테의 고난은 여전히 관객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연출자에 따라서는 작가의 의도에 반하여 사천을 사회주의 국가로 발꿔 해석하려는 시도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사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가에 따라 그가 속한 사회의 성격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 당대의 시급하던 현안 문제나 계급투쟁의 공격적인 구호들은 호소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노래한 \'만물으 흐름\'은 그 자신의 사상과 작품에도 여지없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위와 폭력을 고발하는 생소화 기법과 그 바탕에 깔린 인간애는 아마도 시공을 넘어 남게 될 것이다. 관객 스스로 좋은 결말을 찾으라고 호소하는 에필로그(GW 4, 1670)는 애초부터 구속력 있는 공산주의 사회혁명의 촉구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관중은 아마도 개인과 사회가 함께 변해가야 한다는 답변을 뇌리에 떠올릴 것이다.
브레히트는 비유 형식을 취하고 거기에 일반적인 문제를 담음으로써 이 작품에 긴 생명력을 주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관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추적하는 그의 변증법적 연극론은 비유극 형식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시대와 체제를 넘어 호소력을 갖는 보편적 진실을 형상화할 수 있었다. 비유 형식이 \'콜롬부스의 달걀\' 이라는 브레히트의 주장은 『四川의 善人』을 비롯한 그의 후기 걸작들의 보편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말로 확대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