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원인과 그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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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4.19혁명의 전개 과정

1. 3.15 부정선거
2. 폭발하는 분노
3. ‘피의 화요일’
4. 무너지는 독재
5. 4.19 혁명의 배경
6. 4.19 이후 새세상을 열망하는 민중들의 목소리
7. 5․16 군사 쿠데타
■ 우리학교 선배열사분들

Ⅱ. 4.19혁명에서 꼭 짚어봐야할 것들

1. 4.19 혁명과 청년학생
2. 통일논의의 고양
3. 4.19 혁명에서 드러난 미국의 본질

Ⅲ. 기타 자료 및 읽을꺼리

1. NMD와 TMD
2. [입체 진단] 부시정권과 한미공조 들어라 양키들아! 민족 공조가 우선이다 -2001년 신동아 3월호에 실린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르러 통일운동은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4.19 민주혁명 1주년을 맞이하면서 학생들은 이제까지의 문제제기 수준을 넘어서 실천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4월 19일 서울대 학생들은 혁명 1주년 기념 집회를 개최하고 침묵 시위를 벌였는데 플래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들이 적혀있었다.
이어서 5월 3일 서울대 민족통일 연맹은 남북 학생회담과 학생 친선 체육대회 등 남북학생간의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전격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전국의 학생들로부터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19개 대학이 참여하는 '민족 통일 전국 학생 연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연맹은 즉각적으로 5월 이내에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회담을 열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5월 13일 3만여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민자통 주최로 열린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궐기 대회'에서는 5월 하순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회담을 개최할 것임이 발표되었고, 대회장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외쳐지는 속에 통일 열기로 들끓었다.
그러나 이 외침에 놀란 장면 정권은 즉각 남북 학생회담 불허 방침을 천명하고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는 일이 생기면 전원 체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여타 보수세력과 군부도 아연 긴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민주화의 열기와 통일의 열기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부세력의 쿠데타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3. 4.19 혁명에서 드러난 미국의 본질
4.19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미국은 이남에서의 사태발전이 당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에미칠 악영향에 대해 우려했다. 그래서 미국은 59년 들어 워싱턴에서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정세를 수습하기 위해서 미국이 적극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는데,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이승만정권을 그대로 두고서는 한국에서 더이상 자신들의 식민지적 영향력을 유지 연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그러한 자신들의 걱정을 접고 다른 방향 즉, 이승만 정권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렇게 된데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주된 이유는 이승만 정권이 대중들에 의해서 현실에 암둔하고 무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승만 정권이 안정적이지 않을 때 이것은 또한 미국이 한국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폭과 깊이에 많은 한계를 줄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포기하였고 자신의 정책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이른바 '솔로 5호'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내용을 간추려 보면, '백안관은 한국에서 부패한 정부기관들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하게 기층속에서 확대되고 있어 그것이 곧 폭발적인 것으로 될 수 있고, 이러한 전민중적 불안과 위력이 확대되고 있다. 하기에 더 이상 정당정치를 유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군인정치에 의한 교체가 요망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미국은 이미 전부터 이승만정권이 아닌 다른 정권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할 의향이 있었다. 바로 4.19가 미국이 저들의 최종결단을 내리게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노려 강행한 3.15 부정선거의 내막이 드러나게 되자 국민들은 이를 반대하는 투쟁이 거세차게 분출 하였다.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반대투쟁은 서울과 부산 대구와 광주로 급속히 파급되었는데, 4월 19일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자료를 보면 당시 백안관에서 미국무부의 현지인이었던 주한미대사 매카나기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구체적인 제시를 내렸다고 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국무부는 이승만의 하야를 추진시키기 위한 지시를 당시 주한미대사였던 매카나기에게 주었다. 그에 따르면 이승만을 일단 자유당 총재직에서 당선시키고 그 다음에 정세를 보아가며 대통령직에서 자진 퇴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미국이 의도하는데로 되지 않았다. 국민들은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에서만이 아니라 대통령직에서도 아예 물러날 걸 요구해서 또다시 들고 일어났다. 이같은 사태를 그냥 수수방관하다간 저들의 식민지 통치에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드디어 이승만에게 하야성명을 내리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미국은 또한 한국의 주인이 마치 자기들인 것처럼 그 간섭의 정당성을 주장해 나서기도 했다. 월트 리프만은 미국이 한국에 공공연히 간섭하는 것은 정직하고 건전한 것이었다고 하며 왜냐면 이와같은 공공연한 간섭은 이승만정권이 미국의 무력에 의해 세워졌고 미국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을 내놓고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이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이땅에서 정권을 교체하는 일이 결국에는 우리 국민이 아니라 미국의 입김에 의해 좌우지 된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가리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을 퇴진시킨 미국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친미성향을 지닌 장면정권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그걸 고양된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냉각시키고 시간적 공간을 얻기위한 정치술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미 저들의 정책화한 군부에 의한 한국 정치 내정간섭을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5.16 군사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군부세력을 지원하였음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 칭할 수 밖에 없다는 서글픈 역사의 아픔을 알 수가 있다.
<참고문헌>
박현채 편,《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소나무
김인걸 회 편저, 1998 《한국 현대사 강의》, 돌베개
한국역사연구회 편, 《한국역사입문》 3, 풀빛
한국역사연구회현대사 연구반, 《한국현대사》 2, 풀빛
강만길, 《고쳐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강만길 외, 《4월혁명론》, 한길사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안동일, 《새로운 사·일구》, 김영사
고성국 외, 《1950년 한국사회와 4·19혁명》, 태암
조화영, 《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김동춘 외,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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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3.25
  • 저작시기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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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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