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철학자 - 아리스토텔레스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Ⅲ.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1. 논리학
2. 자연철학
3. 형이상학
4. 윤리학과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의 차이점

Ⅳ.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
1. 철학적 업적
2. 과학적 업적
3. 후대에 미친 영향

Ⅴ. 비판

Ⅵ. 맺음말

본문내용

에서든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본성상 그것에 가장 좋고 즐거운 것" 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을 따른 생활이 가장 좋고 즐거운 것이라고 하여, 이러한 생활을 인간의 가장 행복한 생활이라고 결론짓는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선' 개념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개연적인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개연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밖에 없음을 전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원리를 형성하였다. 그는 도덕적인 덕에 대해 설명한 부분에서, 과도와 부족의 중간을 지킨다는 의미로 "중용" 에 대해 언급하고, 각 상황마다의 가장 적절하고 치우침없는 인간의 행위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그가 '중간적인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중용)' 을 일반적인 원리로 고수하여 자신의 전제에 합당하게 인간의 실제 생활에서의 중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단지 산술적인 중간, 즉 중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반적인 원리라고 인정할 수 없다면, 윤리학뿐만 아니라 철학이라는 학문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제에 모순되는 논의를 한 것만으로도 그 논의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반적인 원리라고 인정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에 대한 답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플라톤의 '선' 을 비판하면서도, 오히려 지적인 덕에 대해 설명한 부분에서는 플라톤의 철학과 유사한 부분을 보여 준다. 먼저 그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가 "모든 것에 공통되는 이데아" 라고 하여, '선' 이란 모든 경우에 항상 합당하게 들어맞는 단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이 '선' 을 모든 범주에 적용하여 단일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선 자체' 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지도 않을 뿐더러 이를 비유에 의해서만 제시하려고 할 뿐이다. 또 플라톤에게 있어, 선은 무조건적인 가치를 가지며, 다른 모든 것은 선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므로, 선의 이데아는 완전히 무전제적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식작용과 존재, 이성과 이성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이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과의 궁극적 근거이고, 더구나 그 자체는 이들 구별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관점에서 '선' 을 인간의 행위에만 국한하여 이해했기 때문에 플라톤의 '선'을 잘못 비판하여, 자신의 '선'을 이해하려는 사람을 오히려 혼돈케 했다. 그리고 지적인 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자신이 비판한 플라톤의 철학과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는 지적인 덕에 대해 설명할 때, 인간의 이성적 원리를 파악하는 부분을 '인식적 부분'과 '사량적 부분' 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필연적인 것을 후자는 우연적인 것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는 즉 개별적인 것이 대상이 되는 것을 '실천지' 라 하며, 이것은 인간이 행위하는 데 일종의 도구 역할을 한다. '실천지' 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사량적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인식적 부분에 속하는 '학적 인식'은 그 대상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근본 전제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오직 "이성만이 근본 전체 자체를 파악할 수 있다." 고 그는 말한다. '지혜' 는 고귀한 것들에 관한 이성과 학적 인식이 합쳐진 것이며, 특히 '철학적 지혜(철학자가 가진 지혜)' 는 그(고귀한 것들) 중에서도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제한 인간적인 선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행복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관조적인 활동" 이었고, "덕을 따른 활동들 가운데 철학적 예지의 활동이 가장 즐거운 것" 이라고 하여 이것이 관조의 활동에 속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여러 계급 중 철학자가 가장 상위의 계급에 속하는 것과 관련시키면 전혀 어긋난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와 같은 주장은 플라톤의 논의에 살을 붙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와 같은 주장은 플라톤 철학에서의 '선'을 추구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철학적 예지의 활동이 인간에게 있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신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관조적 활동을 통해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이것으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켰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과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고 그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철학이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주장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철학을 오해하여, 비판할 수 없는 것을 비판하게 된 셈이라고 생각한다.
Ⅵ. 맺음말
오늘날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 그 원인은 그의 철학에 담겨 있는 획일성과 단순성에 대한 혐오와 결합된 비상한 포괄성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 또는 소수의 보편적 명제에서 모든 진리를 연역하는 칸트의 기하학적 의미와 같은 체계적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적인 사유는 다양하고도 미세한 구분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분할과 분리만을 일삼지 않고, 사물의 복잡성과 연결성을 이해하며, 인간경험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생애 및 그의 업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철학이 정말로 만만치 않은 학문이란 것을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인간의 삶과 사고, 교육에 대하여 실로 많은 철학자들이 사유했다. 또한 그들의 사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철학자들의 사상이 얼마나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가? 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러한 철학의 통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두 가지 반성이 나에게 마지막 의문으로 남는다.
  • 가격2,3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3.03.30
  • 저작시기2003.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207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