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경향 및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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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한국영화의 발달
I-1.한국 전쟁 이전의 역사
I-2.한국 영화의 전성과 굴절(1953-1979)

II.한국의 현대영화

III.1903년에서 199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경향 및 변화
1. 초창기와 민족영화의 대두
2. 토키등장에서 일제패망까지
3. 조국광복에서 한국전쟁까지
4. 중흥기의 한국영화
5. 시련의 70년대
6. 전환과 발전의 80~90년대

IV.리얼리즘

V.1990년대 한국 영화

본문내용

잔여금으로 출발한다. 관객들의 호기심어린 반응과 함께 이국 취미의 비민중적 성향으로 출발한다.
(2) 서사의 개발과 민중성(1926-1934) : 나운규 <아리랑>은 최초의 독자적 서사로서 가치를 가지며, 일본 전래의 신파성과 한국 영화는 만난다. 이 신파성 속에는 퇴폐성과 민중성이 공존해 있다. 또 이 시기에 카프 영화 운동이 전개되는데 이 또한 민중성과 기형성을 동시에 가진 것이었다.
(3) 기술적 발전과 강제된 문화(1935-1944) : 1935년 토키영화 출현과 더불어 영화계의 재편성된다. 새로운 영화 인력이 영화계에 보충되면서 세대 교체가 일어난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멜로 드라마 성향의 완성도있는 영화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40년대는 친일영화의 시대로서 한국 영화사를 암흑으로 채운다.
(4) 카오스 상태의 저개발(1945-1954) : 해방 직후의 영화 노선은 영화인과 상영 활동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자주독립국가를 만드는데 치중하는 파와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흥행하는 일에 몰두하는 파로 구분되었다. 전자는 조선영화동맹이었고, 후자는 최인규의 <자유만세>로 대표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우익 이데올로기가 확립된다.
(5) 재출발을 위한 준비(1955-1959 : 이규환의 <춘향전> 성공은 영화 산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또 외국 문예와 영화의 영향으로 한국 영화가 자기 인식의 초보적 단계로 진입한다.
(6) 정체성 모색과 산업 발달(1960-1969) :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 김수용, 이만희 감독 등으로 대표되는 시기로서 비로소 영화 매체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영화의 사회성에 대한 인식과 시도가 일어나는 동시에 외국의 다양한 사조의 영향과 모방이 이루어진다. 또 영화 산업이 기형적일 정도로 양적 팽창을 하는 것과 동시에 대중 오락으로서의 자리를 잡는다.
(7) 산업 퇴조와 억압으로 인한 기형적 정체 (1970-1979) : 새마을 영화, 관제 반공 영화, 이순신 시리즈로 대표되는 시기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억압과 대중의 저급한 경향을 쫓는 각종 코믹, 청춘, 고교생 영화, 멜로, 깡패 영화가 범람하지만 거의가 외면을 당한다. 한 마디로 영화 서사가 붕괴된 것이다. 이장호 하길종 김호선 이원세 등이 등장한다.
(8) 세대교체와 새로운 경향 또는 재출발(1980-1991) : 업계의 상업적 요구와 영화 인력의 성장에 의해 신인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다. 또 정치적 격변에 따른 사회적 인식의 성장으로 비판적인 영화가 나오는 동시에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서구적 드라마 서사의 확립되고 미적으로는 스타일적 실험이 이루어진다. 경제적 성장과 대중들의 인식 변화로 영화 이론과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 또한 증대한다.
(9) 자본 논리의 문화 상품으로 정착 (1992-현재) : 대자본 진출과 영화의 사회적 관심이 퇴조하면서 본격적인 흥행 장르가 개발된다. 사회와 산업 환경의 급변으로 영화계는 흥행적 작품으로, 중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각종 제도 개선 투쟁으로 연일 대중의 주목을 끈다. 영화 매니아가 생겨나고, 매니아적 창작 인력도 급증하며 국제화 노력의 갈등도 일어난다.
2) 앙드레 바쟁 지음, 기 엔느벨 엮음, 안병섭 옮김, {존재론과 영화언어}, 영화진흥공사, 1987. 바쟁은 "웰스는 몽타쥬의 표현주의적 방법들을 사용하기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깊이에서 쁠랑 세캉스들 사이에 이들을 적절하게 삽입하여 사용함으로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였다. (108쪽) 이상에서 보듯, 바쟁은 몽타주와 롱 테이크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보았지만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재생된 리얼리즘은 몽타쥬의 기법들을 단호하게 소멸시키기는커녕,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몽타쥬의 추상성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증가하는 영상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무성영화시대에 몽타쥬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환기시켰으나 1938년의 데꾸바쥬에서는, 몽타쥬는 그것을 서술했다."(111쪽)고 말한다.
3) Christopher Williams, Realism and the Cinema, Routege & Kegan Paul, 1980. pp. 17-24.
10) 로버트 스탬, 앞의 책, 47-48쪽. 스탬은 리얼리즘을 형식주의적으로 규정할 때, 여기에서는 모든 허구 규칙들의 관습들을 강조하고 또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관습성에 따른다고 한다.
11) 배창호 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뷰할 때 시나리오 사전 심의에서 무려 67개의 수정을 강요받았는데, 그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다룬 소설의 원제목을 쓰지 마라.", "요강을 방 안에 두지 마라", 등이 있었다. 이효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 열린책들, 1994, 158쪽.
12) "1980년 '서울의 봄'에 때맞추어 나타난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를 시작으로 하여 ", "지배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탄압과 영화 독점 자본의 경제적 압력하에서도 지난 10여년 동안 행해진 독립영화운동, 리얼리즘 영화로의 회귀노력 ", 이 구절에서 앞의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는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을 가리킨다. {영화언어} 4호, 앞의 책, 5쪽. 하지만 그러한 지지가 이 잡지에 실린 평문들의 성향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13) {미학사전}, 논장, 1988, 252쪽. 하지만 소비에트에서는 비판적 리얼리즘을 비판하는 경향과 그것과 공조해야 한다는 경향이 공존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서구의 좌파 미학자들 즉 루카치, 브레히트 등의 미학을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이해하기도 하며, 80년대 민족 민중 노동 문예론과는 약간의 차별성을 가졌다. 그러나 정치적 탄압 때문에 사회주의적 미학의 입장에 있는 사람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애용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영화의 쟁점 1(집문당. 2002)
한국영화감독론 1 : 해방전 한국영화작가 12인(지식산업사. 2002)
2001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집문당. 2001)
한국영화 100년 (문학사상사. 2000)
한국영화 작가 연구 (예니. 1998)
한국영화의 이해(예니.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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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7페이지
  • 등록일2003.04.16
  • 저작시기2003.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2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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