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정말 좋은 레포트입니다*
I. 1050년경의 서유럽 사회
II. 11-12세기의 사회와 교회
1. 수도원 개혁운동
2. 교회 개혁과 성직 서임권 투쟁(1076-1122)
3. 십자군 전쟁
4. 도시의 형성
III. 이단운동과 지식인들
1. 새로운 수도회들의 등장
2. 걸식 수도회
3. 이단척결운동
4. 스콜라주의
5. 대학의 발전
IV. 교황권의 위기와 교회의 분열
<참고문헌>
I. 1050년경의 서유럽 사회
II. 11-12세기의 사회와 교회
1. 수도원 개혁운동
2. 교회 개혁과 성직 서임권 투쟁(1076-1122)
3. 십자군 전쟁
4. 도시의 형성
III. 이단운동과 지식인들
1. 새로운 수도회들의 등장
2. 걸식 수도회
3. 이단척결운동
4. 스콜라주의
5. 대학의 발전
IV. 교황권의 위기와 교회의 분열
<참고문헌>
본문내용
nstanze)에게 상속된 노르만왕국이었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죽게되자 성장 일로의 황제권은 발전을 멈추고 쉬타우퍼(Staufer)와 벨펜(Welfen) 두 왕가의 패권 싸움으로 더욱 침체되어 갔다. 황제권의 약화는 교황 이노첸티우스 3세(1198-1216)가 교황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주었다.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1212-1250)는 약화된 황제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시칠리아는 물론 북 이탈리아에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려 하였지만, 독일에 대한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제국에 대한 황제권 역시 약화 되어갔다. 황제권의 약화와 더불어 교황권 역시 약화되어 가면서 보편주의에 입각한 범유럽주의는 민족적인 지배체제의 형성과 더불어 와해되어갔다. 유럽에서 당시 가장 강력한 왕국을 수립한 프랑스는 추기경회의(Conclave)를 장악함으로써 교황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켜갔다.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314)는 로마가 아니라 리용에서 즉위하여 계속 프랑스에서 재위하였고 아비뇽(Avignon)에 교황청(1309-1378)을 마련하여 거주하였다. 이로 인해 ‘영원한 도시’인 로마와 연관된 베드로의 후계로서의 정당성은 물론이거니와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 하에 형성된 유럽의 보편주의가 무너져갔다.
Franzen, 앞의 책, p. 220.
그레고리 11세(1370-1378)는 성 카타리나(Katharina von Siena, 1380 死)와 성 브리기테(Brigitte von Schweden, 1373 死)의 예언에 따라 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실망하여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오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로마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70년 이상 로마를 떠났던 추기경회의가 로마에서 열려 차기 교황을 선출하여야하였다. 당시 추기경회의는 1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11명이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에서 교황은 다시 프랑스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이를 막기 위해 추기경에게 압력을 가해 로마인을 교황으로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인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인이었던 바리(Bari)의 대주교를 Urban 6세(Urban VI, 1378-1389)로 선출하였다. 그 후 석 달이 지나 11명의 프랑스 추기경들과 1명의 스페인 추기경이 함께 교황 우르반 6세의 선출을 무효화하고 프랑스인 로베르(Robert)를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378-1394)로 임명하여 아비뇽 교황시대를 지속시켰다. 교황권은 이처럼 로마 교황(Urban VI, 1378-1389; Boniface IX, 1389-1404; Innocent VII, 1404-1406)과 아비뇽 교황(Clemens VII, 1378-1394; Benedict XIII, 1394-1417)으로 분리되었다.
ibid, pp. 223-226.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법의 발전의 결과로 교황 중심적인 교회의 체제가 입헌제형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대분열(1378-1417)이란 위기사태에 직면한 중세교회는 공의회운동으로 다시 결속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의회운동은 14세기에 형성되고 15세기에 소위 개혁공의회에서 사용한 규정으로 공의회의 권위를 교황권 위에 두었다. 이러한 공의회운동의 뿌리는 12-13세기의 교회법학자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예로 들어 12세기의 유명한 교회법학자인 후국치오(Huguccio, ?-1210)에 의하면 교황은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로마교회는 보편교회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와 이하 공의회운동에 관하여: H. Jedin, Art. “Konziliariamus”, in: Lexikon fur Theologie und Kirche, Band 6, Freiburg 1986, pp.532-534.
이 운동은 1409년 피사에서 시작되어 콘스탄츠(1414-1417)와 바젤에서 (1431-1449) 계속된 일련의 종교회의에서 전개되었다. 피사의 종교회의는 완전한 실패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제3의 교황입후보자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콘스탄츠 종교회의는 적어도 분열의 문제만은 해결하였다. 1417년 마르틴 5세(Martin V, 1417-1431)를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통일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은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더 뿌리 깊은 것이었다. 교회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간의 대립, 수도원의 쇠퇴와 부패, 고위성직자들의 세속적인 경향 그리고 새로운 화폐경제에 의한 사회경제적 불안 등이었다.
비록 교회분열이 공의회운동을 통해 해결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할지라도 공의회운동은 교황지상권주의를 지양하고 교회 내에 일종의 입헌정치를 수립함으로써 교황이 공의회의 결정을 준수하는 입헌군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교회의 입헌정치에 자신의 절대권한을 양보하지 않으려 하였고, 이에 따라 종교개혁이라는 다른 차원의 교황배척운동이 시작되면서 교황권은 점차 약화되어갔다.
<참고문헌>
John McManners(Ed.),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Christianity, Oxford/New York 1990
Noreen Hunt, Cluny under Saint Hugh 1049-1109, London 1967
Joachim Wollasch, Monchtun des Mittelalters zwischen Kirche und Welt, Munchen 1973
Ernst Werner/Martin Erbstoser: Kleriker, Monche, Ketzer. Das religiose Leben im
Hochmittelalter, Darmstadt 1992
유럽중세 대학에 관한 연구서: 이광주, 『대학사』, 서울(민음사) 1997
이석우, 『대학의 역사』, 서울(한길사) 1998
논문: 이석우, 서양 중세 대학의 형성과 전개 -내적 동인(動因)과 외부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최애리 역, 중세의 지식인들, 동문선, 서울 1998.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1212-1250)는 약화된 황제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시칠리아는 물론 북 이탈리아에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려 하였지만, 독일에 대한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제국에 대한 황제권 역시 약화 되어갔다. 황제권의 약화와 더불어 교황권 역시 약화되어 가면서 보편주의에 입각한 범유럽주의는 민족적인 지배체제의 형성과 더불어 와해되어갔다. 유럽에서 당시 가장 강력한 왕국을 수립한 프랑스는 추기경회의(Conclave)를 장악함으로써 교황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켜갔다.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314)는 로마가 아니라 리용에서 즉위하여 계속 프랑스에서 재위하였고 아비뇽(Avignon)에 교황청(1309-1378)을 마련하여 거주하였다. 이로 인해 ‘영원한 도시’인 로마와 연관된 베드로의 후계로서의 정당성은 물론이거니와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 하에 형성된 유럽의 보편주의가 무너져갔다.
Franzen, 앞의 책, p. 220.
그레고리 11세(1370-1378)는 성 카타리나(Katharina von Siena, 1380 死)와 성 브리기테(Brigitte von Schweden, 1373 死)의 예언에 따라 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실망하여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오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로마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70년 이상 로마를 떠났던 추기경회의가 로마에서 열려 차기 교황을 선출하여야하였다. 당시 추기경회의는 1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11명이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에서 교황은 다시 프랑스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이를 막기 위해 추기경에게 압력을 가해 로마인을 교황으로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인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인이었던 바리(Bari)의 대주교를 Urban 6세(Urban VI, 1378-1389)로 선출하였다. 그 후 석 달이 지나 11명의 프랑스 추기경들과 1명의 스페인 추기경이 함께 교황 우르반 6세의 선출을 무효화하고 프랑스인 로베르(Robert)를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378-1394)로 임명하여 아비뇽 교황시대를 지속시켰다. 교황권은 이처럼 로마 교황(Urban VI, 1378-1389; Boniface IX, 1389-1404; Innocent VII, 1404-1406)과 아비뇽 교황(Clemens VII, 1378-1394; Benedict XIII, 1394-1417)으로 분리되었다.
ibid, pp. 223-226.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법의 발전의 결과로 교황 중심적인 교회의 체제가 입헌제형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대분열(1378-1417)이란 위기사태에 직면한 중세교회는 공의회운동으로 다시 결속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의회운동은 14세기에 형성되고 15세기에 소위 개혁공의회에서 사용한 규정으로 공의회의 권위를 교황권 위에 두었다. 이러한 공의회운동의 뿌리는 12-13세기의 교회법학자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예로 들어 12세기의 유명한 교회법학자인 후국치오(Huguccio, ?-1210)에 의하면 교황은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로마교회는 보편교회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와 이하 공의회운동에 관하여: H. Jedin, Art. “Konziliariamus”, in: Lexikon fur Theologie und Kirche, Band 6, Freiburg 1986, pp.532-534.
이 운동은 1409년 피사에서 시작되어 콘스탄츠(1414-1417)와 바젤에서 (1431-1449) 계속된 일련의 종교회의에서 전개되었다. 피사의 종교회의는 완전한 실패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제3의 교황입후보자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콘스탄츠 종교회의는 적어도 분열의 문제만은 해결하였다. 1417년 마르틴 5세(Martin V, 1417-1431)를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통일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은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더 뿌리 깊은 것이었다. 교회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간의 대립, 수도원의 쇠퇴와 부패, 고위성직자들의 세속적인 경향 그리고 새로운 화폐경제에 의한 사회경제적 불안 등이었다.
비록 교회분열이 공의회운동을 통해 해결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할지라도 공의회운동은 교황지상권주의를 지양하고 교회 내에 일종의 입헌정치를 수립함으로써 교황이 공의회의 결정을 준수하는 입헌군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교회의 입헌정치에 자신의 절대권한을 양보하지 않으려 하였고, 이에 따라 종교개혁이라는 다른 차원의 교황배척운동이 시작되면서 교황권은 점차 약화되어갔다.
<참고문헌>
John McManners(Ed.),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Christianity, Oxford/New York 1990
Noreen Hunt, Cluny under Saint Hugh 1049-1109, London 1967
Joachim Wollasch, Monchtun des Mittelalters zwischen Kirche und Welt, Munchen 1973
Ernst Werner/Martin Erbstoser: Kleriker, Monche, Ketzer. Das religiose Leben im
Hochmittelalter, Darmstadt 1992
유럽중세 대학에 관한 연구서: 이광주, 『대학사』, 서울(민음사) 1997
이석우, 『대학의 역사』, 서울(한길사) 1998
논문: 이석우, 서양 중세 대학의 형성과 전개 -내적 동인(動因)과 외부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최애리 역, 중세의 지식인들, 동문선, 서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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