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불교와 정치적 정통성
Ⅲ. 근대화와 불교개혁운동
Ⅳ. 국가개발 정책과 승가의 참여
Ⅴ. 결론
Ⅱ. 불교와 정치적 정통성
Ⅲ. 근대화와 불교개혁운동
Ⅳ. 국가개발 정책과 승가의 참여
Ⅴ. 결론
본문내용
키고 둘째, 불교를 믿지 않는 고산족의 불교에 대한 신앙심 강화 및 불교로의 개종 셋째, 고산족과 정부 관리, 국가 사이의 상오 이해 및 우호관계를 조성하여 태국인으로서의 소속감을 갖게 하고 고산족들로 하여금 정부관리들이 다른 태국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고산족을 위해서 행정을 펼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5명씩으로 구성된 10개의 그룹이 최초의 사절단으로 지방에 파견되었으며 한달 반의 결과 800명이 불교로 개종하고 12명이 방콕의 벤짜마보핏 사원에서 수계식을 가졌다. 1966년에는 60명으로 구성된 16개의 그룹이 이 계획을 추진하여 20명이 수계식을 가졌다. 67년에는 96명의 승려로 구성된 21개의 그룹으로 계획이 확대되었으며 46명의 고산족이 수계를 받고 4명이 승려가 되었다. 68-69년에 20개 그룹으로 축소된 탐마짜릭 그룹은 70년대에 다시 21개의 그룹으로 증가했다.
한편 이 계획은 고산족을 대상으로 한 불교 개종이라는 목적이외에 건전한 위생습관을 가르치고 고산족 어린이를 교육시켰으며, 정부 조직에 관한 기초지식, 타이어, 태국 고유의 전통, 관습,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의무 등을 가르치고 의료품 및 다른 생활 필수품을 제공해 줌으로써 정부와 고산족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도록 노력했다. 의쵸품의 제공은 고산족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러한 물건들을 주기전이나 주고난 후에 승려들은 고산족들로 하여금 삼보에 예(禮)를 표하도록 가르쳤다.
Ⅴ. 결론
태국의 형이상학적 전통불교는 쑤코타이왕국이래 전근대 태국사회의 사회질서와 권위주의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정치체제의 정통성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태국의 전통불교는 랏따나꼬씬왕국의 라마 4세 몽꿋왕의 근대화 정책과 불교개학운동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합리주의적이며 반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게되었으며 절대왕권의 정치체제 역시 점진적인 성격의 변화과정을 겪게되었다. 이후 1932년 입헌혁명의 발발로 절대군주제가 붕괴됨으로써 전근대 사회의 왕권중심의 정치,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했던 불교의 정치적 역할을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태국의 정치 체제는 정통성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1932년 입헌혁명이후 태국은 외형상으로는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32년 이후 오랜 동안 군부가 주도하는 집정주의 적 정치체제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부정권은 정통성의 원리고 채택한 합법적지배의 취약성에 직면하여 전근대 태국 정체체제를 지지했던 불교와 왕권이라는 양대 주요가치의 복원을 통해서 정통성을 보강받고자 했다. 이런 현상은 타이주의에 기반을 둔 싸릿정권때부터 뚜렸다게 나타났다.
싸릿은 합법적지배의 취약성을 보강하고 정통성을 제공했던 불교는 절대 군주제의 역사적 모델을 따르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정치구조를 지지하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몽꿋왕이 주도한 탐마윳운동으로 시작된 불교개혁운동은 몽꿋왕이후 마하니까이파 승려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마하니까이파 승려들의 불교개혁운동은 승가의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권력구조에 반발한 승가법 개정운동으로 구체화되었으며 20C후반 태국사회가 급속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으면서 일부 개혁주의 승려들은 전통주의 불교교리의 재해석을 통해서 불교개혁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개혁주의 불교의 교리는 전통적인 태국인의 구원관인 업사상을 대신한 개인구원의 사상을 중시했으며 전통주의 불교가 종교적인 공덕과 왕권을 중심으로하는 산회 계서제도의 확립을 중심주제로 삼은데 반하여 개혁주의 불교는 참여적인 민주줘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불교교리의 발전은 현실적으로 분명한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혁주의 불교에서 주장하는 불교와 참여적 민주주의와의 관련성은 역사적인 영속성을 통해서 제도화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불교의 교리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적요소는 전근대 태국사회에서 발전되지 못했으며 불교의 형이상학적, 계서적, 권위주의적 요소가 정치체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32년 혁명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지지하게 되는 형이상학적 전통주의 불교는 태국사회의 전통적인 정통성의 상징인 국가, 종교, 왕이라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독점하면서 태국의 정치 체제를 또다시 지배하게 됨으로써 개혁주의 불교의 발전을 제약하게 되었다.
한편 개혁주의 불교는 전통적 정치엘리트들의 정치 권력독점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왕, 불교, 국가기구의 전복을 바라고 있지 않다. 개혁주의 불교는 전통주의 불교와의 교리해석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며 태국국민의 전통적 가치인 불교의 약화는 전체 사회의정치적 구조와 사회질서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공통된 우려를 하고 있으며 정통성있는 권위에 입각한 안정된 정치적 기구를 유지하고자 한다.
현재의 태국의 정치체제는 더 이상 전통적인 왕권체제나 군사적 권위주의정권을 특징짓는 일원적 정치구조를 유지하고 있자 않으며 귀족, 민간 군부관료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저이 엘리트층과 영향력있는 사업과 계층, 개혁지향적인 중산층과 전문직종사자를 양축으로 하는 권력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주의 불교교리의 형이상학적인 공식만으로는 다원화된 권력구조를 갖는 현대 태국의 정치체제의 정통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아직까지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와 대다수 국민이 형이상학적인 전통주의 불교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 불교는 교리의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서 개혁주의 불교의 사회적 열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전통주의 불교는 궁극적으로 몽꿋왕이 주도한 불교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 영향력의 우위현상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불교의 요소를 일정부분 수용하려 할 것이며 개혁주의 불교는 현대 태국사회의 양대권력층의 힘의 반전이 생기 때를 기다리면서 교리의 재해석과 참여적 민주주의와의 관련성을 제도화 시키고 사회적 영향력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문헌>
김흥구. "태국불교와 정치적 정통성", 동남아시아연구, 제4호.
http://www.thaiembassy.or.kr
이 계획에 따라 5명씩으로 구성된 10개의 그룹이 최초의 사절단으로 지방에 파견되었으며 한달 반의 결과 800명이 불교로 개종하고 12명이 방콕의 벤짜마보핏 사원에서 수계식을 가졌다. 1966년에는 60명으로 구성된 16개의 그룹이 이 계획을 추진하여 20명이 수계식을 가졌다. 67년에는 96명의 승려로 구성된 21개의 그룹으로 계획이 확대되었으며 46명의 고산족이 수계를 받고 4명이 승려가 되었다. 68-69년에 20개 그룹으로 축소된 탐마짜릭 그룹은 70년대에 다시 21개의 그룹으로 증가했다.
한편 이 계획은 고산족을 대상으로 한 불교 개종이라는 목적이외에 건전한 위생습관을 가르치고 고산족 어린이를 교육시켰으며, 정부 조직에 관한 기초지식, 타이어, 태국 고유의 전통, 관습,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의무 등을 가르치고 의료품 및 다른 생활 필수품을 제공해 줌으로써 정부와 고산족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도록 노력했다. 의쵸품의 제공은 고산족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러한 물건들을 주기전이나 주고난 후에 승려들은 고산족들로 하여금 삼보에 예(禮)를 표하도록 가르쳤다.
Ⅴ. 결론
태국의 형이상학적 전통불교는 쑤코타이왕국이래 전근대 태국사회의 사회질서와 권위주의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정치체제의 정통성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태국의 전통불교는 랏따나꼬씬왕국의 라마 4세 몽꿋왕의 근대화 정책과 불교개학운동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합리주의적이며 반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게되었으며 절대왕권의 정치체제 역시 점진적인 성격의 변화과정을 겪게되었다. 이후 1932년 입헌혁명의 발발로 절대군주제가 붕괴됨으로써 전근대 사회의 왕권중심의 정치,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했던 불교의 정치적 역할을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태국의 정치 체제는 정통성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1932년 입헌혁명이후 태국은 외형상으로는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32년 이후 오랜 동안 군부가 주도하는 집정주의 적 정치체제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부정권은 정통성의 원리고 채택한 합법적지배의 취약성에 직면하여 전근대 태국 정체체제를 지지했던 불교와 왕권이라는 양대 주요가치의 복원을 통해서 정통성을 보강받고자 했다. 이런 현상은 타이주의에 기반을 둔 싸릿정권때부터 뚜렸다게 나타났다.
싸릿은 합법적지배의 취약성을 보강하고 정통성을 제공했던 불교는 절대 군주제의 역사적 모델을 따르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정치구조를 지지하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몽꿋왕이 주도한 탐마윳운동으로 시작된 불교개혁운동은 몽꿋왕이후 마하니까이파 승려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마하니까이파 승려들의 불교개혁운동은 승가의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권력구조에 반발한 승가법 개정운동으로 구체화되었으며 20C후반 태국사회가 급속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으면서 일부 개혁주의 승려들은 전통주의 불교교리의 재해석을 통해서 불교개혁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개혁주의 불교의 교리는 전통적인 태국인의 구원관인 업사상을 대신한 개인구원의 사상을 중시했으며 전통주의 불교가 종교적인 공덕과 왕권을 중심으로하는 산회 계서제도의 확립을 중심주제로 삼은데 반하여 개혁주의 불교는 참여적인 민주줘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불교교리의 발전은 현실적으로 분명한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혁주의 불교에서 주장하는 불교와 참여적 민주주의와의 관련성은 역사적인 영속성을 통해서 제도화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불교의 교리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적요소는 전근대 태국사회에서 발전되지 못했으며 불교의 형이상학적, 계서적, 권위주의적 요소가 정치체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32년 혁명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지지하게 되는 형이상학적 전통주의 불교는 태국사회의 전통적인 정통성의 상징인 국가, 종교, 왕이라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독점하면서 태국의 정치 체제를 또다시 지배하게 됨으로써 개혁주의 불교의 발전을 제약하게 되었다.
한편 개혁주의 불교는 전통적 정치엘리트들의 정치 권력독점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왕, 불교, 국가기구의 전복을 바라고 있지 않다. 개혁주의 불교는 전통주의 불교와의 교리해석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며 태국국민의 전통적 가치인 불교의 약화는 전체 사회의정치적 구조와 사회질서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공통된 우려를 하고 있으며 정통성있는 권위에 입각한 안정된 정치적 기구를 유지하고자 한다.
현재의 태국의 정치체제는 더 이상 전통적인 왕권체제나 군사적 권위주의정권을 특징짓는 일원적 정치구조를 유지하고 있자 않으며 귀족, 민간 군부관료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저이 엘리트층과 영향력있는 사업과 계층, 개혁지향적인 중산층과 전문직종사자를 양축으로 하는 권력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주의 불교교리의 형이상학적인 공식만으로는 다원화된 권력구조를 갖는 현대 태국의 정치체제의 정통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아직까지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와 대다수 국민이 형이상학적인 전통주의 불교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 불교는 교리의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서 개혁주의 불교의 사회적 열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전통주의 불교는 궁극적으로 몽꿋왕이 주도한 불교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 영향력의 우위현상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불교의 요소를 일정부분 수용하려 할 것이며 개혁주의 불교는 현대 태국사회의 양대권력층의 힘의 반전이 생기 때를 기다리면서 교리의 재해석과 참여적 민주주의와의 관련성을 제도화 시키고 사회적 영향력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문헌>
김흥구. "태국불교와 정치적 정통성", 동남아시아연구, 제4호.
http://www.thaiembass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