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①인식적 측면
②정서적 측면
③실천적 측면
②정서적 측면
③실천적 측면
본문내용
자에게서 중요 장기를 적출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뇌사를 죽음이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뇌사를 죽음 자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뇌사자는 죽은 자이므로 그이 중요 장기를 적출 하는 것은 정당화된다' 고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 이식의 필요성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이 기준에 대해 논하게 됐을지라도 죽음의 기준 자체를 '장기 공급 원활하도록' 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정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사용에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중요 장기 확보라는 특정 결과에 맞게 새롭게 죽음의 의미를 정하면 이것은 그 말의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사용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죽음의 기준과 '죽음' 의 의미를 이렇게 새롭게 규정한다고 해서 바로 뇌사 자에게서의 중요 장기 적출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 이란 '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을 의미한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 중에는 몇 번의 큰 변화와 지속적이고 점진적 변화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중 어떤 변화를 죽음으로 볼 수 있는지는 즉각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여기서 먼저 크게 두 입장이 갈린다. 첫째, 산 자가 죽은 자가 되어 가는 과정 중의 큰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있으므로 이 변화야말로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이 있다. 둘째,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 큰 변화들 후에도 점진적인 변화들이 이어지므로, 죽음은 이런 변화들 전체가 종결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나는 두 번째 의견에 동의한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상태이다. 그래야 죽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거 같다.
이 중 첫 번째 입장에서 산 자를 죽은 자가 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격적인 측면과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나뉜다. 먼저 인격적인 측면에서는 '인 격성의 영원한 상실' 이야말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변화이기 때문에 이 변화를 '죽음' 의 의미에 부합하는 사건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다음으로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인격체라는 사실이라기보다 생명체라는 사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인간도 다른 생물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것, 인간의 인격적 기능은 생물학적 기능이 없어지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인격적 기능이라는 것도 실은 개체의 생물학적 유지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 가령 인간의 이성은 개체의 생명 유지의 도구로 볼 수 있다는 것 등을 내세울 것이다.
생물학적 측면을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 심폐사론과 뇌사론이 있다. 심페사론에서는 인간 유기체의 통합적 기능에 가장 중요한 것을 심장 박동과 호흡에 의한 순환으로 본다. 따라서 심장 박동과 호흡이 중단으로 이런 순환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시기로 본다. 뇌사론 에서는 심장 박동과 호흡이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그가 생물학적 통합 기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런 심장 박동과 호흡을 유지시키는 기관이 뇌간이다. 그러므로 이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가 불가역적으로 정지한 뇌사가 바로 죽음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 으로서의 '죽음' 은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종결을 의미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런 의미를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의 죽음인 세포사가 죽음의 기준이 될 것이다. 나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얼마간은 세포가 활동을 한다고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손톱이 자란다거나, 남자의 경우 정자가 계속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세포사가 인간의 완전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의 또 다른 의미로 죽음의 실천적 측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죽음' 을 어떤 사람에 대해 산 자와는 아주 다른 태도나 행위로 대할 수 있고 대해야 하는 경계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실천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뚱한다. 즉 사람들은 '죽음'을 '어떤 자를 죽은 자로 대해도 되게 하는 사건'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사람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다르게 대한다. 사람이 죽고 난 후 그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 사람을 잊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여기서 '죽음' 의 실천적 의미 중 하나가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죽음이란 '어떤 사람을 장례 지낼 수 있게 하는 사건' 이라는 것이다. 장례 지내도 좋은 조건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장과 호흡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그 사람을 장례지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뇌사자는 장례지 낼 수 없으며 심폐사한 자부터 장례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뇌사를 죽음이 기준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아직은 죽음의 기준을 심폐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구적으로 의식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뇌사자처럼 심장이나 폐가 기능 하는 사람에 대한 장례는 그 행위로 해를 입는 사람이 있으므로 정당화될 수 없다. 반면 심폐사한 사람에 대한 장례는 당사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 점은 '어떤 사람을 장례 지낼 수 있게 하는 사건' 이라는 의미를 충족시켜주는 죽음의 기준이 현재로서는 바로 심폐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의 일상 언어적 의미는 존재적 의미와 실천적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를 온전하게 만족시키는 기준은 심폐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능한 해결책도 모색하고 있다. 죽음을 두렵게만 느끼고 회피하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이란 것은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아간다면 지금의 삶의 질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기 이식의 필요성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이 기준에 대해 논하게 됐을지라도 죽음의 기준 자체를 '장기 공급 원활하도록' 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정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사용에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중요 장기 확보라는 특정 결과에 맞게 새롭게 죽음의 의미를 정하면 이것은 그 말의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사용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죽음의 기준과 '죽음' 의 의미를 이렇게 새롭게 규정한다고 해서 바로 뇌사 자에게서의 중요 장기 적출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 이란 '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을 의미한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 중에는 몇 번의 큰 변화와 지속적이고 점진적 변화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중 어떤 변화를 죽음으로 볼 수 있는지는 즉각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여기서 먼저 크게 두 입장이 갈린다. 첫째, 산 자가 죽은 자가 되어 가는 과정 중의 큰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있으므로 이 변화야말로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이 있다. 둘째,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 큰 변화들 후에도 점진적인 변화들이 이어지므로, 죽음은 이런 변화들 전체가 종결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나는 두 번째 의견에 동의한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상태이다. 그래야 죽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거 같다.
이 중 첫 번째 입장에서 산 자를 죽은 자가 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격적인 측면과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나뉜다. 먼저 인격적인 측면에서는 '인 격성의 영원한 상실' 이야말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변화이기 때문에 이 변화를 '죽음' 의 의미에 부합하는 사건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다음으로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인격체라는 사실이라기보다 생명체라는 사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인간도 다른 생물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것, 인간의 인격적 기능은 생물학적 기능이 없어지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인격적 기능이라는 것도 실은 개체의 생물학적 유지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 가령 인간의 이성은 개체의 생명 유지의 도구로 볼 수 있다는 것 등을 내세울 것이다.
생물학적 측면을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 심폐사론과 뇌사론이 있다. 심페사론에서는 인간 유기체의 통합적 기능에 가장 중요한 것을 심장 박동과 호흡에 의한 순환으로 본다. 따라서 심장 박동과 호흡이 중단으로 이런 순환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시기로 본다. 뇌사론 에서는 심장 박동과 호흡이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그가 생물학적 통합 기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런 심장 박동과 호흡을 유지시키는 기관이 뇌간이다. 그러므로 이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가 불가역적으로 정지한 뇌사가 바로 죽음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 으로서의 '죽음' 은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종결을 의미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런 의미를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의 죽음인 세포사가 죽음의 기준이 될 것이다. 나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얼마간은 세포가 활동을 한다고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손톱이 자란다거나, 남자의 경우 정자가 계속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세포사가 인간의 완전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의 또 다른 의미로 죽음의 실천적 측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죽음' 을 어떤 사람에 대해 산 자와는 아주 다른 태도나 행위로 대할 수 있고 대해야 하는 경계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실천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뚱한다. 즉 사람들은 '죽음'을 '어떤 자를 죽은 자로 대해도 되게 하는 사건'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사람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다르게 대한다. 사람이 죽고 난 후 그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 사람을 잊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여기서 '죽음' 의 실천적 의미 중 하나가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죽음이란 '어떤 사람을 장례 지낼 수 있게 하는 사건' 이라는 것이다. 장례 지내도 좋은 조건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장과 호흡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그 사람을 장례지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뇌사자는 장례지 낼 수 없으며 심폐사한 자부터 장례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뇌사를 죽음이 기준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아직은 죽음의 기준을 심폐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구적으로 의식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뇌사자처럼 심장이나 폐가 기능 하는 사람에 대한 장례는 그 행위로 해를 입는 사람이 있으므로 정당화될 수 없다. 반면 심폐사한 사람에 대한 장례는 당사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 점은 '어떤 사람을 장례 지낼 수 있게 하는 사건' 이라는 의미를 충족시켜주는 죽음의 기준이 현재로서는 바로 심폐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의 일상 언어적 의미는 존재적 의미와 실천적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를 온전하게 만족시키는 기준은 심폐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능한 해결책도 모색하고 있다. 죽음을 두렵게만 느끼고 회피하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이란 것은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아간다면 지금의 삶의 질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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