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1) 북방해로(노철산항로)
(2) 황해횡단항로
(3) 남방해로
(4) 선박과 항해술
2) 해외무역
(1) 수출품
(2) 수입품
(3) 일본과의 교역
(4) 이슬람과의 교역
3) 당에서의 활동
(1) 유학생과 문인의 교류
(2) 구법승의 순례
(3) 재당 신라인과 무역상
(1) 북방해로(노철산항로)
(2) 황해횡단항로
(3) 남방해로
(4) 선박과 항해술
2) 해외무역
(1) 수출품
(2) 수입품
(3) 일본과의 교역
(4) 이슬람과의 교역
3) 당에서의 활동
(1) 유학생과 문인의 교류
(2) 구법승의 순례
(3) 재당 신라인과 무역상
본문내용
냈고 당문사와의 본격적인 교유도 종사관 임기간에 이루어졌다. 최치원의 교유는 종사관 동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당 명사들과의 교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300년에 가까운 장기간에 걸친 당문화의 수용과 축적으로 신라사회의 지적 분위기는 당풍으로 물들어 갔고, 신라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면서 고려사회의 성립과 그 국가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지식인 가운데 중국 유학생, 특히 빈공과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시금 주목되는 일이다.
(2) 구법승의 순례
불법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간 승려들의 수도 유학생 수에 못치 않게 많다. 진흥왕 10년 신라승 각적이 남조의 양으로 구법의 길을 나섰고, 명관도 같은 왕 26년 진에 구법한 뒤 경론 1,700여권의 가지고 귀국했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당에 건너가 구법활동을 하거나 그곳에 머물면서 홍법에 전념한 승려의 수는 족히 기천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신라승들은 광대한 중국대륙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황량한 서역에서까지도 사원의 직승으로 사승으로 혹은 학문승으로 또는 산간촌락의 화속법사로 홍법활동에 전념하였다. 당승 해운의 <양음대법상승사자부법기>에 '신라승 수만이 몸을 잊고 승법을 구하러 입당하였다'고 한 내용에서 저간의 소식을 알 만하다고 본다.
(3)재당 신라인과 무역상
신라는 9C에 접어들면서 호족들의 지방분권적 할거상태가 시작된다. 중앙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토호들이 할거하게 되자 오히려 인민 대중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저력을 발휘해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에 쏟아 넣었다. 그리해 동아시아 교역권을 형성하고 나·당·일 3국간을 종횡무진 항해하면서 그 주인 노릇을 톡톡히 수행했던 것이다. 실로 한국 역사상 인민들의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이 가장 활기를 띄었던 시기가 이 시기이다. 이시기 신라사람들은 산동반도 남해안 일대에 해주, 그리고 대운하변과 양자강구·강남 연해안을 따라 집중 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 지역에 산재해 있던 마을을 연결해 보면 당시 신라와 당의 경제중심지를 이어주는 자연의 수로가 형성되고 그 김장부는 연수향이었다. 양주·초주·연수향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신라인들은 거의 신라 해외발전기와 청해진 전성기에 해양으로 진출하여 정착하였던 무역업자 또는 직업선원의 후예거나 당사자였다. 항해술에 능숙했던 이들은 신라·당·일본의 3국무역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양주·광주 등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와의 교역도 활발히 전개해 갔다.
300년에 가까운 장기간에 걸친 당문화의 수용과 축적으로 신라사회의 지적 분위기는 당풍으로 물들어 갔고, 신라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면서 고려사회의 성립과 그 국가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지식인 가운데 중국 유학생, 특히 빈공과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시금 주목되는 일이다.
(2) 구법승의 순례
불법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간 승려들의 수도 유학생 수에 못치 않게 많다. 진흥왕 10년 신라승 각적이 남조의 양으로 구법의 길을 나섰고, 명관도 같은 왕 26년 진에 구법한 뒤 경론 1,700여권의 가지고 귀국했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당에 건너가 구법활동을 하거나 그곳에 머물면서 홍법에 전념한 승려의 수는 족히 기천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신라승들은 광대한 중국대륙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황량한 서역에서까지도 사원의 직승으로 사승으로 혹은 학문승으로 또는 산간촌락의 화속법사로 홍법활동에 전념하였다. 당승 해운의 <양음대법상승사자부법기>에 '신라승 수만이 몸을 잊고 승법을 구하러 입당하였다'고 한 내용에서 저간의 소식을 알 만하다고 본다.
(3)재당 신라인과 무역상
신라는 9C에 접어들면서 호족들의 지방분권적 할거상태가 시작된다. 중앙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토호들이 할거하게 되자 오히려 인민 대중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저력을 발휘해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에 쏟아 넣었다. 그리해 동아시아 교역권을 형성하고 나·당·일 3국간을 종횡무진 항해하면서 그 주인 노릇을 톡톡히 수행했던 것이다. 실로 한국 역사상 인민들의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이 가장 활기를 띄었던 시기가 이 시기이다. 이시기 신라사람들은 산동반도 남해안 일대에 해주, 그리고 대운하변과 양자강구·강남 연해안을 따라 집중 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 지역에 산재해 있던 마을을 연결해 보면 당시 신라와 당의 경제중심지를 이어주는 자연의 수로가 형성되고 그 김장부는 연수향이었다. 양주·초주·연수향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신라인들은 거의 신라 해외발전기와 청해진 전성기에 해양으로 진출하여 정착하였던 무역업자 또는 직업선원의 후예거나 당사자였다. 항해술에 능숙했던 이들은 신라·당·일본의 3국무역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양주·광주 등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와의 교역도 활발히 전개해 갔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