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상업혁명
2. 가격혁명
3. 토지개혁운동
4. 선대제와 매뉴팩처
5. 근대적 신용제도의 창출
2. 가격혁명
3. 토지개혁운동
4. 선대제와 매뉴팩처
5. 근대적 신용제도의 창출
본문내용
났으며, 이는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수공업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선대제는 매뉴팩처 단계에서도 나타났지만, 이 시기에는 길드 규제와 같은 강제력을 지니지 못한 느슨한 형태였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공장제 기계공업이 발달하면서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매뉴팩처는 노동과정의 일부분만을 담당하는 부분노동자와 발달된 복잡한 생산도구를 사용하는 분업을 기초로 하는 협업이라는 생산양식을 취함으로써 단순 협업에 비해 노동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켜, 상대적으로 보다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부분노동자의 합리적인 배치, 작업의 전문화에 의한 숙련도의 향상, 작업 전환에 따르는 노동시간 손실의 방지, 부분노동자에게 적합한 도구의 단순화, 개량화, 다양화 등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5. 근대적 신용제도의 창출
근대적 금융제도는 산업자본에 대한 원활한 자본 공급을 보장 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절대주의 시대의 금융은 고리대에 기초한 봉건적 금융 관행을 일부 완화시켰으나 그 고리대적 본질은 반봉건적 형태로 유지되었다. 농촌에서는 농촌공업에 기생하는 선대제 신용, 무역부 문에서는 환전 송금 대체 과정에서 환차액을 획득하는 환 금융, 절대왕정과의 유착을 통해 대부의 대가로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대정부금융 등이 절대주의 금융의 주류를 이루었다. 외상판매와 연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근대적 상업신용 은 1545년 이자취득의 공인 및 이자율의 인하조치를 기반으로 한다. 신용거래는 국지적 시장을 통 해 형성된 인격적 신뢰관계를 토대로 하는 생산자 상호간의 신용 에서 생산자와 상인간의 신용관계로 발전하고 상업어음의 거래와 이서 양도가 일반화된다. 이에 따라 어음할인 업무를 담당 할 근대적 은행신용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다. 1694년 런던의 상인과 금융업자들에 의해 주식회사형태로 설립 된 잉글랜드 은행은 당시 1할 이상의 어음할인율을 4~5%로 인하함으로써, 평균이윤율의 범위 내에서 대부자본의 수요-공급에 의해 이자율을 결정하는 근대적 대부자본의 효시가 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은 1709년 대정부금융 및 발권은행으로서의 독점권을 획 득했으며, 무역회사와 대상인을 대상으로 예금, 단기대출 등 일반 은행업무도 수행해 나갔다.
1821년 지방에 609개의 은행이 개설 되어 있었고 1880년에는 런던에만 70개의 개인은행이 존재했다. 이 같은 근대적 신용제도의 발달과 이자율의 저리화가 산업혁명의 전개에 필수적이었음은 물론이다.
매뉴팩처는 노동과정의 일부분만을 담당하는 부분노동자와 발달된 복잡한 생산도구를 사용하는 분업을 기초로 하는 협업이라는 생산양식을 취함으로써 단순 협업에 비해 노동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켜, 상대적으로 보다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부분노동자의 합리적인 배치, 작업의 전문화에 의한 숙련도의 향상, 작업 전환에 따르는 노동시간 손실의 방지, 부분노동자에게 적합한 도구의 단순화, 개량화, 다양화 등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5. 근대적 신용제도의 창출
근대적 금융제도는 산업자본에 대한 원활한 자본 공급을 보장 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절대주의 시대의 금융은 고리대에 기초한 봉건적 금융 관행을 일부 완화시켰으나 그 고리대적 본질은 반봉건적 형태로 유지되었다. 농촌에서는 농촌공업에 기생하는 선대제 신용, 무역부 문에서는 환전 송금 대체 과정에서 환차액을 획득하는 환 금융, 절대왕정과의 유착을 통해 대부의 대가로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대정부금융 등이 절대주의 금융의 주류를 이루었다. 외상판매와 연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근대적 상업신용 은 1545년 이자취득의 공인 및 이자율의 인하조치를 기반으로 한다. 신용거래는 국지적 시장을 통 해 형성된 인격적 신뢰관계를 토대로 하는 생산자 상호간의 신용 에서 생산자와 상인간의 신용관계로 발전하고 상업어음의 거래와 이서 양도가 일반화된다. 이에 따라 어음할인 업무를 담당 할 근대적 은행신용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다. 1694년 런던의 상인과 금융업자들에 의해 주식회사형태로 설립 된 잉글랜드 은행은 당시 1할 이상의 어음할인율을 4~5%로 인하함으로써, 평균이윤율의 범위 내에서 대부자본의 수요-공급에 의해 이자율을 결정하는 근대적 대부자본의 효시가 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은 1709년 대정부금융 및 발권은행으로서의 독점권을 획 득했으며, 무역회사와 대상인을 대상으로 예금, 단기대출 등 일반 은행업무도 수행해 나갔다.
1821년 지방에 609개의 은행이 개설 되어 있었고 1880년에는 런던에만 70개의 개인은행이 존재했다. 이 같은 근대적 신용제도의 발달과 이자율의 저리화가 산업혁명의 전개에 필수적이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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