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기의 사회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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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골품사회의 동요
1.진골귀족의 자기항쟁
2.6두품세력의 성장

지방세력의 대두
1.호족세력의 대두배경
2.호족세력의 유형과 성장

농민봉기와 후삼국의 성립◆
1.후삼국의 성립
2. 후삼국의 건립과 발전

사상계의 변화
1.불교계의 변화
2.유교정치사상의 대두
3.사상의 복합화

본문내용

러한 선종은 당시 지방호족들의 체질에 맞았기 때문에 호족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전통적인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선종의 혁신성은 지방에서 크게 일어나고 있던 독자적인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彌勒信仰 및 말법사상의 유행이 두드러졌다. 특히 미륵신앙은 轉輪成王의 치세관과 얽혀 사회모순 극복의 이념으로 승화되었다. 더구나 미륵신앙의 사회개혁론과 말법사상은 그 이상과 중생제도에서 일치점을 찾아 禪師들의 의식속에 침투되고 더 나아가 일반 민중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궁예의 이상세계관으로 연결될 수 있었으며, 농민반란이나 민간신앙과 일정한 유대를 갖게된 것이다.
2.儒敎政治思想의 대두
신라중대 무열왕계 왕권은 통일 후 강력한 전제왕권을 뒷받침하는 유교정치이념으로 율령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유교정치이념은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는 근거가 되었고, 여기에는 최치원을 비롯한 渡唐留學生들의 역할이 컸다. 6두품 계열이 중심인 이들은 신라의 骨品制度를 비판하고 중앙집권적인 유교정치 실현을 주장하였고 당문화를 전수하는 역할도 하였다. 6두품들은 반골품적, 반진골적 성향을 가진 이들로서 엄격한 신라사회에 '실력위주의 풍토'를 가져오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왕권에 결탁하여 측근정치를 지향하는 세력이었다. 이러한 6두품을 중심으로 한 유학의 진흥은 지방의 호족에까지 퍼져 유교정치사상이 지방사회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3.사상의 복합화
6두품을 중심으로 한 유교정치사상의 진흥과 지방사회로의 확산은 신라 하대에 불교와의 결합을 이루게 하였다. 지방호족들은 선종에 의탁함과 동시에 유교사상에 대한 지식을 겸하게 된 것이었다. 또 유학자들과 선승들도 유교와 불교에 대해 깊은 관심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최치원과 최언위가 선승들의 비명을 지은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신라 하대의 유·불·선 3교의 융합은 3교가 서로 교섭을 가지면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특히 당시 선승들은 불·유 사상뿐만 아니라 풍수사상, 노장사상에까지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동리산파의 제 2조인 道詵은 풍수설에 능통하여 「도선비기」를 저술하였고 송악지방의 왕씨와 연결하여 고려건국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주산파의 대통 역시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도 여러 사상의 융합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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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26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8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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